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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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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 독산성의 4차례 축성과정은 조총을 비롯한 화약 병기에 대비한 성제 변화를이끌었다. 서울의 배후 기지에 위치한 독산성은 전쟁 중에는 물론이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유일하게 보수와 관리가 지속된 산성이었다. 무엇보다도 독산성은 임진왜란 이후 조총 위주의화약병기에 대비해 축조한 첫 번째 성곽이자 산성으로서, 17세기 중반 인조대 남한산성을축성하기 전까지 조선의 성곽을 대표하는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성첩, 포루, 현안, 우마장, 성랑, 치성, 해자, 목책 등과 불랑기포의 배치 등은 임란 이후달라진 성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임진왜란 이후 독산성 성제의 변화에 핵심은 포루에 있다. 포루는 성을 지키는데 가장 긴요한 시설로서 임진왜란 이후 성제의 변화를 이끈 가장 핵심시설이었다. 유성룡이 “만약에 하나의 포루를 만들면 위 항목의 허다한 성의 제도는 다 쓸 필요가 없다. 이는 대개 옹성ㆍ현안ㆍ우마장의 제도를 겸해서 하나로 만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당시성곽 방어에서 포루가 갖는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특히 독성의 포루는 임진왜란 이후 가장 앞선 시기에 축조된 포루라는 점에서 의의가 클 뿐 아니라 조선후기 포루의 선구를 이룬다는점에서 성곽적 의미가 크다.
조선후기 도성방어는 국가 방어체계의 핵심이자 궁극적인 목적이었기 때문에 정치와 사회의 변동에 따라 도성방어체제가 변화해 갔다. 도성은 물론 인근의 산성들은 도성방어체계의변화에 따라 그 중요성이 변화했다. 이번에 검토한 독산성의 경우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도성자체의 방어력이 중시되면 될수록 독산성의 중요도는 낮아졌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후기약화된 지방군영의 사정과도 관련이 있었다. 중앙군은 그 명맥을 계속 이어갔지만 지방군은일찍이 붕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조선 후기 중앙정치의 변화와 도성에 대한 인식변화로 인해 도성방어체계가 변모해 갔다. 도성방어체계의 변화에 따라 독산성은 그 중요성이 증가하기도 혹은 감소하기도 했다. 인조- 숙종대 지방의 보장처를 강화하던 시기에는 붕괴된 국경방어체계를 대신해서 도성방어와 보장처 강화가 함께 추진되었다. 독산성과 같은 중소규모의 산성에 대한 관심은 자연 멀어지게되었다. 이시기 독산성은 수원부 중군의 휘하에 예속되어 있다가 별장이 파견되면서 지위가향상된 것으로 보았다. 군기의 강화와 군량의 확보가 추진되었고 봉수대의 신설이 논의되었다. 인조-숙종대 독산성은 수원 인근의 대표적인 관방으로 부상되어갔다. 영조대에는 집권초기 발생한 무신란의 영향으로 도성의 수비를 강화하는 도성사수론이 등장하는 분위기였다. 왕권 강화와 관련된 일련의 정비가 마무리되고 추진되었던 강화외성의축성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보장처 중심의 도성방어체계가 도성사수론으로 변화하였다. 외곽방어체계는 자연히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화외성에 대한 축성실패로 인해 외곽산성이나보장처에 대한 관심이 줄고 적을 주요 간선도로에서 차단할 수 있는 읍성의 축성이 늘어갔다. 독산성은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영조대에는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정조대에 들면서 지방상업도시의 발달과 도성 외곽방어체계의 강화에 따라 4유수부체계가확립되었다. 수원화성과 같은 거점도시의 축성에 집중하게 되면서 도성에 대한 관심은 이전시기에 비해 줄어들게 된다. 독산성은 이시기 수원화성에 버금가는 군사적 중요성으로 말미암아두 성이 기각지세를 이루며 수원 유수부를 지키는 전략이 수립된다. 정조 16년 폭우로 인해성곽이 일부 훼손되었는데 복구를 통해 독산성은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정조 승하 이후 장용영이 해체되면서 독산성의 전략적 활용도 감소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본고는 오산 독산성의 조선시대 축성사적 위치를 검토하고자 그 동안에 발굴조사된 조선시대 성벽의 축성방식 및 관련시설(여장과 배수시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경기도 지역에서조선시대에 경영 및 수개축된 상황이 발굴조사로 확인된 안성 죽주산성ㆍ여주 파사성ㆍ남한산성ㆍ북한산성ㆍ포천 반월산성ㆍ파주 덕진산성ㆍ화성 화량진성의 변화 양상도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오산 독산성과 비교하여 조선시대 관방체계의 변화에 따른 입지 및 규모, 성벽의 축성방식, 성벽 관련시설 중 치성과 여장에 대해서 축성사적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더불어오산 독산성의 향후 발굴조사를 진행함에 있어 조선시대 성벽 및 관련시설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성도 제시하였다.
독산성은 15∼16세기의 상황을 알려주는 문헌이나 물질자료가 부족하다. 따라서 독산성에관한 기존의 연구는 사료가 풍부한 임진왜란 이후의 시기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연구 경향으로인해 조선시대 독산성의 성격 변화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글은 독산성에서출토된 백자를 통해 조선시대 독산성의 변천 과정을 당시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유기적으로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독산성에서 수습된 백자는 대부분 18∼19세기에 제작되었다. 17세기로 추정해 볼 수 있는유물도 확인되었다. 이에 비해 15∼16세기에 생산된 자기(磁器)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이와같은 백자의 출토현황은 17세기 이후 독산성의 성격이 변화된 사실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15∼16세기 독산성은 수원부의 입보용(入保用) 산성(山城)이었다. 조선 초 산성은 전쟁 등비상시에만 활용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세종대 산성에서 읍성(邑城) 중심의 방어체제로전환되면서 ‘수원(水源)’을 확보하기 힘든 독산성이 정비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독산성은임진왜란 당시에도 ‘고성(古城)’이라는 이미지(image)가 강하였다. 임진왜란 중 독산성은 수축(修築)되었으나 전쟁이 끝나자 다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는 비상시적인 입보성의 일반적인 한계였다. 17세기 이후 독산성은 비상시적인 입보성에서 상시적인 군사적 공간이자, 민들의 생활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종결된 이후 양호(兩湖)의 도적이 증가하자 독산성에 도성을 보호하기 위한 치안(治安) 기능을 부여하였다. 성내에 우물을 만들고, 밭을 일구어식량을 확보하였다. 군사훈련도 실시하였다. 독산성은 백성과 군인 등이 항시 거주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독산성 내에 사람이 생활하게 되면서 백자의 수요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독산성에서 이 시기 백자가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독산성의 성격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독산성에서 출토된 백자는 독산성이 15∼16세기 비상시적인 입보성에서 17세기이후 상시적인 공간으로 변모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물질자료(物質資料)이다. 아울러 문헌을 통해 17세기 이후 독산성의 성격이 변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연구는 조선시대독산성의 변천 과정을 유물과 문헌을 바탕으로 역사고고학적인 시각에서 검토하였다는 데에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오산 독산성은 임진왜란을 막아낸 호국의 정신, 그리고 정조대왕의 효심을 느낄 수 있는충과 효를 상징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산성이다. 이러한 가치를 일찍이 인정받아 사적제14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까지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복원된 성벽이 조금씩 훼손되면서 정비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 맞춰서 정밀발굴조사도 진행되게 되었다. 본 고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오산 독산성에 대한 정밀발굴조사 성과를 간단하게 정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성벽의 축조시기와 남문 평탄지에서 확인된 축대 및 건물지 유구의성과를 살펴보았다. 약 3년 동안의 정밀발굴조사였지만, 제한적인 면적과 시간 등으로 인해서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벽의 초축 및 수축 시기ㆍ변화양상, 그리고 남문 평탄지일대가 조선시대 관청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명확하게 풀리지 않았다. 이러한 의문점은 차츰 고고학 자료가 쌓여가고 있으니 반드시 풀릴 것으로 보인다. 독산성 성벽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되었고, 통일신라시대를 거처 조선시대까지 필요에따라 지속적으로 수축하여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독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사용된성돌과 출토유물, 그리고 주변 성벽자료들과의 비교를 통해 6세기 후반~7세기 중반으로 파악하였고, 그 공간범위는 성 전역에 해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수축은 삼국시대 성벽의 보수흔과인화문토기를 참고하여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루어졌으며,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도성인 한성을 방어하고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유물은 삼국~통일신라 시대 토기편(단각고배편, 인화문 토기편 등), 기와편(선문 등), 고려시대 도기편, 청자편, 기와편, 조선시대 도기편, 분청사기편, 백자편, 옹기편 등이 출토되어 시기를 판단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조선시대 성벽과 관련된 문헌기록들이 다수 확인되고 있어 문헌기록과 고고학 자료의 만남이뜻깊게 이루어져 축조 및 수축시점을 파악하는데 그 객관성이 확보되었다는 점에서도 매우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관청 추정지로 추정되는 남문 평탄지 일대는 산성 내에 제한적인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축대를 쌓고, 그 상면에 건물지와 부대시설들을 축조하였으나, 유구들이 바닥만남아있어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관청으로서 기능을 했는지, 아니면 다른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조금 더 발굴조사가 필요한 실정이다. 다만 건물지 내에서 벼루편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관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으므로 추후 발굴조사결과가 기대된다. 독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남문 평탄지 일부, 세마대지, 그리고민가 추정지로 추정되는 서문 일대 등 계획적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될 예정이어서 앞으로 그결과가 주목된다. 이와 더불어 문지나 치성 등 성과 관련된 시설도 추가로 확인되고 있어독산성의 진정한 가치와 진정성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조선력사』(상)(1963)에서 대외관계사와 관련된 서술은 약 40.8%를 차지하여 그 비중이매우 높다. 대외관계사 가운데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는 반침략투쟁사 부분이 가장 많고, 대외무역과 문화적인 교류는 분량이 매우 적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고구려와 수나라‧당나라의 전쟁, 고려와 거란‧몽고와의 전쟁은 대외항쟁사로서 양적‧질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서술되었고, ‘침략자인 한나라, 수나라‧당나라, 거란‧몽고’와 이에 대항하는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애국적인 인민들의 투쟁’이라는 구도로 서술되었다. 고구려와 고려가 승리할 수 있었던원인으로는 ‘애국적인 인민들의 투쟁’과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강감찬 등의 활약’ 때문이라고 평가하였다. ‘애국주의’를 강조한 것은 역사교육을 위한 교과서로 편찬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몽고에 항복한 고려에 대해서 오히려애국적인 고려 인민들의 투쟁으로 몽고를 물리쳤다고 반대로 서술하기도 했다. 대외무역에대한 서술은 대체로 간략히 기술하였다. 문화 부분에서는 외래문화의 영향은 의도적으로 감추고, 독창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특히 일본 등에 끼친 영향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몇 가지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대외항쟁을 강조하려 했던 당시 북한 역사학계의 현실을고려할 때, 한계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논문은 북한의 체제 성립기 주요 역사교과서의 문화 항목 서술의 분석을 목적으로 하였다. 문화는 민족주의 또는 역사이론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문화의 대상과 서술양상은 특정시기의 역사인식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1950년대 전후 북학에서 문화유산들은 민족적 정체성과 연결되어 언급되었고, 계승 발전시켜야 할 가치 있는 존재로서 인식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역사교과서에도 반영되었다. 당시간행된 역사교과서들의 문화 항목은 긍정적 내용 위주로 서술되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분량이 증가하는 동시에 체계를 갖추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일단 『조선통사(상)』 (1956)에서 완비되었다. 역사교과서에서 문화에 포함하는 기준은 첫째로 과학적 지식이었다. 과학의 기준은 철저히 유럽의 근대 과학에 기반했을 뿐 아니라 유럽제국의 동아시아 침략을 비판하면서도 유럽과의접촉 및 이들을 통한 과학지식의 전래를 문화 발전의 중요한 요소로 서술하였다. 두 번째는인민의 자유와 행복에 이바지했는지 여부였다. 그런데 전근대 민중들의 지식 및 문화 향상은실증하기 매우 어려운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우가 빈번히나타났다. 1950년대 북한에서는 한국사의 성격 및 시기 구분을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논쟁과는 다른 층위에서 역사교과서의 문화 항목은 민족이 공유해야 할 가치 있는요소들을 제공함으로써 민족적 정체성과 긍정성을 뒷받침하였다.
식민지시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백남운은 해방 이후 조선학술원을 설립하고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조선교육심의회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학술과 교육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와 함께 좌익계열 정당(신민당‧사회노동당‧근로인민당)에서정치 활동을 벌이다가 월북하여 1948년 9월 북한의 교육상(교육성의 장관)이 되었다. 1956년1월 교육상을 물러난 백남운은 과학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여 북한 학술계의 지도적인 활동을이어간다. 『조선사회경제사』(1933)에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문제를 다루지 못했지만, 해방직후 「조선 역사학의 과학적 방법론」(1946)에서는 노예제사회(삼국) 이전에 ‘아시아적 단계(부여와 삼한)’를 설정하여 시대구분을 시도하였다. 이후 『조선력사』(1951)에서는 구체적으로‘아시아적 단계’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고대 노예제사회설에 기반한 고대사 인식을확장시켰다. 백남운의 한국사 체계와 인식은 한국전쟁 이후 간행된 역사교과서에 대부분 반영되어 서술되었지만, 고대와 중세의 시대구분 논쟁이 정리되는 1960년대 이후에는 삼국시대봉건사회설에 입각한 교과서 서술이 이루어진다.
본고에서는 통화 만발발자유적을 중심으로 통화지역의 역사지리적 환경과 고고학적 배경을일별하고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 관계를 살피는 토대를 마련해 보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고조선과 고구려를 직접 연결시켜 서술한 문헌 기록을 함께 살펴보았다. 통화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관계를 살피는 데 좋다. 고조선사의 입장에서는 핵심지역에서 떨어져 있지만 고구려사의 입장에서는 혼강으로 이어지는 거점지역에 해당되어 고구려 건국의 바탕이 됐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에 만발발자유적이 있으며 3기와 4기 문화층은고조선과 선고구려 문화 요소가 혼재돼 있다. 유적의 5기 문화층은 고구려 문화 일색이다. 이에 본문에서는 문헌자료와의 비교 검토를 통해 3기와 4기 문화층을 기반으로 한 주민이5기 문화층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했다. 즉 고조선을 중심으로 광역에 걸쳐 연결된 고조선(혹은예맥) 연맹체가 연ㆍ진ㆍ한과의 각축에서 점차 세력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외곽에 있던 지역집단이 정치적 격변기에 독자적 세력을 형성, 최종적으로 광역의 교역망은 고구려를중심으로 재편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중성리비는 의결집단과 집행집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왕이 분쟁해결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있는 점, 분쟁해결방식 체계가 다소 복잡하다는 점, 실제 집행은 현지인에게 독자적으로 맡긴점 등 통해 냉수리비와의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중성리비는 냉수리비와 시간적 격차가있었을 것이라 판단되며 441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았다. 냉수리비 단계에서는 왕이 직접공론에 참여하여 분쟁에 관여하고 있다. 또한 분쟁해결방식은 왕이 직접 참여한 교집단에서공론을 하고 바로 그 결과를 전달하여 보다 행정적으로 간결해졌지만, 왕이 참여했다는 점에서그 판결의 권위는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즉, 부체제 내에서도 국정운영의 변화양상을 확인할수 있는데, 그 변화 시점은 5세기 중반 이후일 것으로 보인다. 중성리비가 세워진 눌지마립간대는 고구려와의 관계가 소강상태 혹은 우호관계에 있었기때문에 흥해 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향력은 꽤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5세기 전반에는 지방관을 파견하는 직접 지배보다는 그 지역 유력자를 통한 간접지배로 지방을 관리했는데, 이 간접지배 방식은 6부에 의해 행해졌다. 즉, 6부 체제 동안에는 부별로 정복지역을 나눠서관리했을 것이고, 중성리비에 나오는 牟旦伐喙는 간거벌 이하 4개의 촌을 관리하면서 그 지역의 노동력을 소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牟旦伐喙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宮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무단으로 탈취한 것을 단독으로 해결하지 않고, 중앙에 있는 부들 간의 공론으로 해결한것을 보면 당시 6부 체제는 공론의 원칙 아래 중앙과 지방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국명(國名)은 한 국가나 왕조를 나타내는 상징성을 가진다. 따라서 국명을 정할 때 그 의미가분명해야 하며 한번 정해진 국호는 거의 바뀌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야율아보기(耶 律阿保機)가 세운 거란은 여러 차례 국명이 변동되었다고 보아 왔다. 거란은 원래 ‘거란(契丹)’을 국가의 명칭으로 삼았으나 이후 중국 북쪽의 연운16주를 차지한이후에는 ‘요(遼)’라는 한자 명칭을 병행하여 사용하였고 이후 거란 황제들의 재위 기간에따라 두 명칭을 번갈아 사용하였다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거란인들은 자신들의 국명을 거란문자로는 “[khitai]”와 “ [quli~quliʧi, xus]” 등으로 표기하고, 한문으로는 ‘契丹(Khtai or Khitan)’과 ‘遼(Liao)’라는한자로 표기하였다고 보았다. 이를 조합하여 “대(중앙)요거란국(大中央遼契丹國)” 혹은 “대(중앙)거란요국(大中央契丹遼國)”이라는 뜻을 가진 거란어 국명과 “大契丹” 혹은 “大遼”라는 한자 국명을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또한 ‘遼(Liao)’와 대응하는 거란어 는 [quli/qur]라고 발음되며 요하(遼河, Liao River)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해방을 전후한 공간 속의 한국인들 중에는 고구려나 낙랑무덤의 발굴조사에 종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중에는 채병서(蔡秉瑞: 일본명 大島(오오시마))라는 인물도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진파리고분군과 전 동명왕릉 및 석암리 제218호분, 정백리 제24호분의 조사에 참가했고, 해방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북한에서 행한 안악고분군의 발굴조사를담당했다. 한국전쟁 중에 월남한 채병서는 1959년부터 약 10년 동안 한국의 학계에서 고고학발굴조사 및 고구려의 무덤과 자연과학적 분석방법의 중요성을 논한 연구를 발표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채병서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역사의 격랑 속에서 제국주의 일본을시작으로 북한과 한국의 발굴현장에서 활약한 유일한 인물이다. 따라서 해방전후의 공간 속에서 있었던 초창기의 한국 고고학과 관련된 정황을 채병서를 통해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점에서 중요하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 해방 이후에는 북한과 한국의 주요 고고학 발굴조사에관여한 채병서라는 인물을 대상으로 삼고, 해방전후의 공간 속에서 그가 남긴 고고학 관련활동을 살펴봄으로 인해 초창기의 한국 고고학사에 관한 정확한 사실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고적조사를 비롯해 북한과 한국에서의 발굴조사를 두루 경험한한국고고학계에서 전무후무한 인물인 채병서는, 비록 북한에서 간행된 안악고분군의 발굴조사보고서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보고서의 간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점이 분명하다. 그는 안악고분군의 1차 발굴조사 당시에 작성된 원본 자료 중 일부를 가지고월남한 후 북한‧중국‧일본의 학계에 비해 안악고분군에 관한 관련정보를 얻기 힘들었던당시의 한국 학계에 최초로 보고한 인물이다. 또한 채병서를 동아시아 고고학 연구에서 편년의기준이 되고 있는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비정한 한국 학계 최초의 연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채병서는 한국 학계에서 처음으로 방사능을 이용한 연대측정법을 고고학조사에 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소개했고, 고구려왕릉 비정의 조건을 최초로 제시했으며, 고구려무덤에 관한 편년과 계통을 다룬 선구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채병서가한국 학계에서 주류로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그로 인해 한국 학계에서 초창기의 고구려 고고학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채병서의 업적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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