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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눌 노상직의 서당교육과 서당교육자료
소눌 노상직의 서당교육과 서당교육자료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207-267 (61 pages)
어문학>한국어와문학 / KDC : 문학 > 한국문학 / KCI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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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相稷은 紫巖草廬(紫巖書堂)에서 강학하던 1899년(광무3, 45세) 3월 이후로 서당에서 생활하는 主丈인 자신을 포함한 제생들의 일상과 서당생활을 제생 중 1인을 直日로 삼아 날마다 빠짐없이 기록하게 하였으며, 또 매해 봄가을 3월과 9월 上甲日을 會講日字로 정하여 서당에서 생활하는 제생만이 아니라 서당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제생들을 함께 모아서 그들의 학업과 조행을 점검하는 대규모 講會를 개최하고 그에 대한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해두게 하였다. 서당의 직일이 기록한 書堂日錄(書堂日記)은 현재 전하는 『紫巖日錄』을 기준으로 하자면 1개월을 단위로 1권씩 묶어놓았으므로, 그것을 처음 작성하기 시작한 1899년(광무3, 45세) 3월부터 노상직이 서거한 1931년(77세) 1월 전까지 중간에 서당에 상주하여 강학하기 어려웠던 기간 5~6년 정도를 제외한 26년에 윤달 포함 320개월의 320권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 시기 강회기록인 講會時到記는 강회가 매해 봄가을로 2회씩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그것이 각 강회 단위로 묶어놓았으므로 대략 52권 이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노상직의 서당일록(서당일기)은 한 책자로 번역 소개된 자암초려(자암서당) 강학시기 서당일록(서당일기) 『자암일록』 중 5책 19개월 19권 이외에도 『紫巖日錄』, 『紫巖日記』, 『紫巖書堂日記』, 『方齋日記』, 『方齋日錄』, 『泗南日錄』, 『泗南書庄日記』 등 22건 86개월 86권 분량이 부산대학교도서관 소장 小訥文庫로 더 전하고 있다. 햇수로는 3년에 기간으로는 2년이 채 안 되는 19개월 19권의 자암초려(자암서당) 강학시기 서당일록(서당일기) 『자암일록』만으로도 “서당에 관한 최대 교육인류학적 보고서”라면 그것의 4배가 넘는 86개월 86권 분량을 합한 총 105개월 105권 분량의 노상직의 서당일록(서당일기)은 서당에 관한 한 국내 유일의 최대 교육인류학적 자료(보고서)라고 단정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노상직의 서당교육에 대한 자료는 그의 서당일록(서당일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書堂學規 『訓蒙帖』, 講會時到記와 同講錄, 紫巖書堂學契 契金 관리장부 등이 소눌문고로 또 전하고 있다. 서당학규 『훈몽첩』은 1888년(고종25, 34세) 그가 극기재에서 강학할 때 『克己齋訓蒙帖』으로 엮은 이후 錦山書堂, 紫巖草廬(紫巖書堂), 紫巖書堂, 泗南書庄(方齋) 등에서의 강학에 일관되게 활용되었다. 강회시도기는 1899년(광무3, 45세) 3월 이후 매해 봄가을 3월과 9월 상갑일을 회강일자에 참여한 제생들의 명부 講會時到記와 그때 지은 시를 기록한 講會詩帖을 합한 것이다. 현재 『時到記』, 『講會時到記』, 『紫巖書堂時到記』, 『紫巖書堂講會時到記』, 『紫巖書堂落成時到記』 등 17건이 소눌문고로 전하고 있다. 동강록은 자암초려(자암서당), 자암서당, 사남서장(방재) 등 노상직의 서당에서 함께 수학한 제생들의 명부[同講契帖]이다. 『紫巖契帖』, ?錦山書堂同苦錄?, ?紫巖書堂春夏同講錄?, ?紫巖書堂秋冬同講錄?, ?方齋同講錄? 등 20건이 소눌문고로 전하고 있다. 이외에도 자암서당학계의 계금 관리장부인 『重講契名錢捧上冊』, 『紫巖重講契錢出入簿』 등 여러 건이 소눌문고로 전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노상직의 서당교육자료가 이처럼 방대함에도 그의 서당교육에 대한 연구,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자료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가 근대전환의 격변기와 일제강점기에 교육구국과 독립투쟁의 일환으로, 新學이 대대적으로 보급되면서 舊學으로서 전래의 儒學이 위축되는 시점에 교육구국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전래의 유학을 지키는 보루이자 일제강점기의 현실에 저항하는 인재교육 거점으로서의 서당교육을 행하였다면, 그에 대한 연구를 단순히 서당교육에 대한 연구로만 국한할 수 없는 것이다. 시대상과 결부된 거시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노상직에 대한 연구는 그의 방대한 서당교육자료에다 근대전환의 격변기와 일제강점기에 서당교육에 바쳐진 그의 일생을 더하여 그의 학문을 ‘小訥學’ 또는 ‘紫巖學’으로 정립시키는 길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地域學(慶南儒學) 연구가 극히 빈약한 지금 학계 현실에서 특히 노상직에 대한 이와 같은 연구는 새로운 활로를 열어줄 것이다.
다와라 마고이치(俵孫一)의 『한국교육의 현상』과 대한제국기 논설
다와라 마고이치(俵孫一)의 『한국교육의 현상』과 대한제국기 논설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71-92 (22 pages)
어문학>한국어와문학 / KDC : 문학 > 한국문학 / KCI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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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통감부 학부 차관 다와라 마고이치가 총독부 설립 직전에 발간한 『한국교육의 현상』과 『한국교육의 기왕 및 현재』를 대한제국기 한국인의 논설과 비교하여 한국 계몽운동에 대한 일제 교육정책의 대응양상을 파악해 보았다. 다와라는 일제 교육정책을 입안했으며 총독부 설립 이후 토지조사 정책까지 담당해 일제강점의 근간을 구축했다. 그가 가장 불온한 것으로 간주한 상무교육 강조, 의무교육 청원 및 정치 활동과 교육의 결합은 당대의 한국 언론과 학교에서 두루 나타나는 현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사례로 ?20세기 신국민?을 비교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의 다섯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 다와라의 주장에 따르면 1909년과 1910년의 짧은 기간 동안 통감부의 제도권 교육의 성과가 비약적으로 증대했고 이는 총독부 설립에 한 배경이 된다. 둘째, 일제 교육정책은 조직적 통계 조사를 광범위하게 실시하고 이를 설득의 논거로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기왕 및 현재』가 일인 교원과 관료의 내부단속 성격이라면 『현상』은 한국인 고위 관료 및 일제 부역인사들에 대한 홍보의 성격도 가진다. 셋째, 학교와 언론에서 적극적으로 진행된 한국의 계몽운동을 면밀하게 조사하였으며, 권위주의적인 외면 아래 피보호국의 계몽운동에 대해 관료조직을 동원해 능동적이고 치밀하게 대응하고 있다. 넷째, 학부 차관 다와라가 토지조사원 과정을 학교에 위탁 과정으로 설치하고 총독부 설치의 직후 직접 토지조사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점은 통감부 교육의 식민적 성격을 집약한 사례이다. 다섯째, 통감부 시대 일제 교육정책은 국민교육을 내세우면서도 국가와 애국을 회피할 수밖에 없는 이율배반의 성격이다. 『현상』은 한국 계몽운동이 극복하거나 적응해야 하는 가장 큰 현실적 조건이 집약적으로 나타난다는 점과 자본주의의 생리와 현실을 전파한다는 점에서 한국 계몽을 파악하기 위한 주요한 자료이다.
?蓬山溫泉浴行日記?에 나타난 盧相稷의 동래온천 여행과 그 의미
?蓬山溫泉浴行日記?에 나타난 盧相稷의 동래온천 여행과 그 의미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269-321 (53 pages)
어문학>한국어와문학 / KDC : 문학 > 한국문학 / KCI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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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蓬山溫泉浴行日記?는 盧相稷(1855―1931)이 1925년 8월에 형 盧相益을 비롯한 지인들과 동래온천에 가서 온천욕을 한 일을 기록한 여행일기이다. 이 일기는 출발부터 닷새간의 일정만 기록한 짤막한 글이지만, 이 여행이 寒岡 鄭逑의 행적과 학문을 추모하고 계승하려는 행사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가치가 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은 동래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景賢契를 결성하는 것이었다. 목욕은 정구가 만년인 1617년에 제자들과 함께 동래를 찾아 온천욕을 하였던 일을 본받은 행사였고, 경현계는 당시 정구를 배종하였던 제자들의 후손들과 함께 寒岡學派의 후손으로서 친목과 결속을 도모하는 사업이었다. 정구의 동래온천 여행은 ?蓬山浴行錄?으로 기록되었으나 널리 언급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노상직은 젊은 시절부터 정구의 봉산욕행을 ‘南土美事’로 기렸으며, 여러 편의 글에서 중요하게 언급한 바도 있다. 노상직은 학문의 연원이 정구에 닿아 있었고, 특히 만년인 1920년대에 정구의 행적과 학문을 추모하고 계승하려는 일련의 사업을 펼쳤다. 그의 동래온천 여행은 이러한 사업들 중 하나였다. 한편, 1925년 동래는 전통적인 모습이 사라져가고 일본에서 들어온 근대 문명과 일본식 문화가 활개를 치고 있었다. 이러한 속에서 노상직은 서양의 신문물을 이용하고 긍정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것은 일부였고, 대체의 일상적인 행위에서는 유가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일상적인 행동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 ?봉산온천욕행일기?의 또 다른 가치일 것이다.
조선후기 『소학』 해석의 시대적 추이에 따른 특징
조선후기 『소학』 해석의 시대적 추이에 따른 특징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123-172 (50 pages)
어문학>한국어와문학 / KDC : 문학 > 한국문학 / KCI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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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에 대한 학술적 논의는 『소학』이 학문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던 16세기 중반 이후로부터 조선 말기까지 시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그 결산물이 ‘講錄’, ‘問答’, ‘講義’, ‘疑義’, ‘箚記’ 등의 형식으로 집약되었다. 이들 저술서는 『소학』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시대의 추이에 따라 당대 학문의 체계 속에서 새로이 점검되면서 『소학』 해석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16세기 중기에 『소학』은 『대학』과 축을 이루는 성리학의 중요한 학문 분과로 위상이 정립되면서, 『소학』을 본질로 다룬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강록?, ?문답? 등의 『소학』 관련 저술물들이 등장하면서 『소학』 본문의 해석에 대한 일정한 준거를 마련하기 위해 자구의 자의 및 명물에 대한 고증, 그리고 주석의 同異 등이 점검되었다. 17~8세기에 이르러서는 『소학』의 편제 및 내용 체계, 분절 논의, 그리고 『소학』 본문과 주석의 정합성, 채록된 인물과 사건에 대한 변증 등 『소학』 전반에 대해 다각적인 논의가 형성되면서 『소학』 해석에 대한 진전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18세기 이후 『소학』에 채록된 인물과 사건에 대한 심도 깊은 해석은 동현의 인물을 채록한 조선의 소학서류가 만들어진 타당성을 제공하였다. 19세기는 『소학』 본문을 분절로 이해한 선행 연구의 성과를 정리하여 『소학』의 분절체계가 새롭게 정립되고, 동국 제현의 학설이 주요 논거로 채록되거나 반영되면서 주석의 내용이 전면적으로 재정비되었다. 조선조 학술사에서 『소학』은 3종의 주석서를 모본으로 한 언해본이 4차례에 걸쳐 수정 간행되었고, 3종의 완결된 형태의 주석서가 경서에 준하는 체계를 갖추고 저술되었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동현의 가언 선행을 채록한 소학서류가 간행되는 의미 있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다른 경서의 연구에서도 보기 드문 것으로 주자의 『소학』에서 조선의 독자적인 『소학』의 정본을 만들고자 하였던 그 노력이 동력이 된 것이다.
중종 26년 智異山 鐵窟에서 조성된 불교의례집의 성격
중종 26년 智異山 鐵窟에서 조성된 불교의례집의 성격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397-431 (35 pages)
어문학>한국어와문학 / KDC : 문학 > 한국문학 / KCI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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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6세기 중엽 지리산 철굴에서 조성된 불교경판의 종류를 새롭게 분류한 다음, 특히 중종 26년 철굴에서 조성된 현존 불교의례집의 기본정보를 정리하고, 해당 불교의례집에 담긴 불교 문화적인 성격을 집중적으로 진단하였다. 16세기 중엽 지리산 철굴에서 조성된 불교경판은 기존 연구에서 정리ㆍ소개된 7종류보다 많은 최소 12종류로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들 불교경판 가운데 불교의례집으로 분류되는 『오대진언』ㆍ『영험약초』의 합부와 『승가일용식시묵언작법』ㆍ『영혼문』ㆍ『증수선교시식의문』ㆍ『구병시식의문』의 인출본에 담긴 외형적 형태ㆍ구성체계ㆍ간행정보 등과 같은 기본정보를 주목하여 정밀하게 정리하였다. 이들 불교의례집에 표기된 원천정보는 현존하는 관찬 사서ㆍ지리지 및 개인 문집 등에서도 거의 확인할 수 없으므로, 중종 26년 당시 지리산 철굴의 존재 실체와 불교경판 조성사례, 현실ㆍ대외인식, 사상적 성격, 조직체계 및 연계망 등 다양한 역사ㆍ문화적인 실체를 진단할 수 있는 핵심적인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우선, 중종 26년 철굴에서는 불교의례집을 왕실 주도로 조성된 판본과 원나라의 승려지식인 蒙山 ?異의 주석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새롭게 조성하였다. 『증수선교시식의문』은 몽산 덕이가 주석한 판본을 저본으로 활용하였으며, 『오대진언』ㆍ『영험약초』는 성종 16년 인수대비의 주도로 조성된 해당 판본을 원천텍스트로 삼아 동일한 글자 형태로 모사하는 동시에, 후기ㆍ간행정보 등 제한적인 부분에서 새롭게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다음으로, 간행정보에서는 중종 26년 철굴의 역사적인 기본정보와 함께 연계된 사원 및 인적 연계망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의 철굴은 중종 26년 당시 지리산의 신흥사와 긴밀한 인적 연계망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해당 불교의례집의 조성과정에서는 사회적 연계망도 구축하여 승려ㆍ세속인으로 구성된 敎俗 이원적인 협조체제로 조직체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중종 26년 철굴에서 조성된 불교의례집에는 조선 왕실 및 부처ㆍ불교의 전통적인 권위ㆍ위상을 수용하였으며, 명나라 중심의 대외 인식관도 반영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종 26년 당시 철굴에서는 진언의 수지ㆍ독송으로 탈윤회ㆍ해탈ㆍ극락왕생 및 복ㆍ장수ㆍ안녕 등을 기원ㆍ성취할 수 있다는 밀교적인 공덕ㆍ영험신앙도 가지고 있었다. 승려들의 일상적인 의례와 함께 선대ㆍ가족 등의 영혼을 위로ㆍ공양하는 불교적인 제례의식도 주목하고 있었으며, 몽산 덕이의 불교적인 제례를 계승하는 의식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불교적인 제례의식은 성리학적 지배이념이 확산된 조선사회에서도 조상숭배의 제사의례와 연결될 수 있으므로, 사회적인 확장을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하 윤순 문집 검토
백하 윤순 문집 검토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173-205 (33 pages)
어문학>한국어와문학 / KDC : 문학 > 한국문학 / KCI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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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 윤순은 조선후기 소론계열을 대표하는 관료이자 문인의 한 사람이지만, 현재 서예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윤순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고 있지만, 그는 젊어서부터 시문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은 문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 그의 문집 검토가 필요하다. 현재 전하는 윤순의 문집은 2종류로 낙질의 필사본 『백하선생유고』와 석인본 『백하집』인데, 이 중 『백하선생유고』가 『백하집』에 앞서지만 아직까지 『백하선생유고』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두 책을 비교해보면 중복된 작품이 상당하지만 한 책에만 수록된 작품도 적지 않다. 그런데 두 책에 중복된 작품은 동일한 작품으로, 『백하선생유고』의 작품을 『백하집』에 옮겨 실은 것으로 보이지만, 『백하집』에만 수록된 작품은 출처를 확인할 수 없다. 『백하선생유고』와 『백하집』은 수록된 작품과 편집 체계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백하선생유고』가 낙질이어서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 시와 상소문, 묘표와 묘지명뿐이지만, 이 작품들을 『백하집』에 수록된 작품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적지 않다. 『백하선생유고』에는 시 468제 698수, 상소문 122편, 묘표 9편, 묘지명 10편이 수록되어 있고, 『백하집』에는 시 126제 149수, 상소문 61편, 묘표 10편, 묘지명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 80제 90수, 상소문 37편, 묘표 9편, 묘지명 4편이 중복되어 묘표를 제외하고는 중복되는 작품이 얼마 되지 않는다. 중복된 작품을 제외하면 현재 윤순의 시는 514제 757수, 상소문은 146편, 묘표와 묘지명은 각각 10편이 전한다. 두 책의 비교를 통해 『백하선생유고』가 『백하집』 편찬의 저본이 되지만, 『백하집』 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게 된다.
『朝鮮新報』 한문기사의 계몽적 역할과 의미
『朝鮮新報』 한문기사의 계몽적 역할과 의미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5-3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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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보』는 1881년 12월 10일, 부산에서 간행된 최초의 근대식 신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이라 불리는 『한성순보』보다 1년 10개월 정도 먼저 창간되었지만, 일본인에 의해 간행되었기에 한국 최초의 신문이라 불리는 것에는 여전히 유보적이다. 메이지 시대 일본인은 해외로 이주하는 경우가 빈번하였고, 거주하는 곳곳에서 일본어로 된 신문을 발간하였다. 조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876년 한일수호조약으로 부산항이 개항되었고, 일본인들이 부산에 대거 이주하자 일본인에 의해 신문이 발간되었다. 일본인 상인이 중심이 된 재부산항 상법회의소에서 旬間으로 간행한 『조선신보』가 그것이다. 『조선신보』는 1건의 한글 기사를 제외하고는 일본어 기사와 한문 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해외 거주 일본인이 일본어로 신문을 발간하였고, 재조선 일본인이 발간한 초기 신문의 대부분이 일본어 신문이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결국 일본인에 의해 발간된 『조선신보』에 한문 기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뚜렷한 목적성을 전제한 것인데, 한문 기사는 조선인 식자층을 계몽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겠다. 『조선신보』의 지면은 ‘<표지>-<예언>-<목차>-<영사관록사>-<조선신보>-<잡보>-<부산상황>-<원산통신>-<기서>-<물가표>-<광고>’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한문 기사는 전체 기사의 약 36% 정도를 차지하며, <조선신보>와 <기서>에 집중적으로 실려 있다. <조선신보>와 <기서>는 오늘날 사설과 독자투고란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시사적이고 논리적 주장의 글이 대부분이다. 한문 기사의 실제 내용 역시 부국강병과 국민 계몽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미개하고 야만적인 존재로 인식하였기에, 계몽이 필요한 대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조선신보』라는 신문 매체를 통해 조선인을 계몽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신보』는 일본인에 의해 창간되었지만, 조선에서 간행된 최초의 신문이다. 조선에 신문이라는 근대 매체가 全無한 시기에 간행된 것이기에, 여러 역할과 성격을 포괄적으로 담을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서 간행되었지만 전국을 포괄하는 전국지의 역할을 했고, 상법회의소에서 발간되었지만 경제 기사는 물론 정치 문화 사회의 잡사도 실렸다. 일본인이 발간했지만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도 독자 대상으로 삼았으며, 정보와 오락거리 제공의 역할도 했지만 계몽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한문 기사는 조선인 지식층을 독자 대상으로 삼아 ‘계몽’하고자 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조선신보』는 조선에서 간행된 최초의 신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일본이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게 된 청일전쟁 이전의 대조선 일본인의 인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특히 본고에서는 『조선신보』의 한문 기사가 조선인을 독자 대상으로 삼아 계몽하고자 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몽의 노력은 조선 침략을 위한 일본의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星湖集發刊顚末』을 통해 본 『星湖文集』간행 과정과 小訥 盧相稷의 활동
『星湖集發刊顚末』을 통해 본 『星湖文集』간행 과정과 小訥 盧相稷의 활동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369-39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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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訥 盧相稷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김해를 중심으로 활동한 학자로, 스승인 性齋 許傳으로부터 전해 받은 星湖學을 계승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학문을 탐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친 시기는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커다란 격변기를 관통하고 있었다. 노상직의 학문 활동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면모는 한 개인이 이루어낼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서적을 저술ㆍ편찬하고 출간한 일이었다. 노상직이 이처럼 엄청난 물적ㆍ인적 경비가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서적의 편찬과 간행에 일생의 정력을 쏟은 까닭은 자기 시대의 학문적 사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물음을 품게 되었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던 중에 부산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星湖集發刊顚末』이라는 필사본 1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성호 문집의 편찬과 간행 과정은 貞山 李秉休가 『성호문집』의 원고를 정리한 제1기, 修堂 李南珪가 『성호문집』의 교정본을 편집한 제2기, 밀양 退老里에서 『성호문집』을 간행한 제3기, 밀양 沙浦里에서 『성호전집』을 간행한 제4기 등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성호집발간전말』은 1827년 黃德吉이 李載南에게 보낸 편지로부터 1917년 노상직이 밀양 蓮桂所에 보낸 편지에 이르기까지 100년 가까운 기간의 내용이다. 따라서 성호 문집의 편찬과 간행 과정 가운데 제2기와 제3기에 관련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3기에 해당하는 자료가 총 39편 가운데 32편이나 되어 대부분을 차지한다. 『성호문집』이 퇴로리에서 간행된 계기와 과정을 『성호집발간전말』을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이전에는 자세하게 알지 못한 몇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이남규 교정본이 27책으로 편정된 까닭, 호서지역 사림이 밀양 퇴로리로 가져온 성호의 유고는 이남규 교정본이었다는 사실, 퇴로리 간행소에서 45책 전집이 아니라 27책 교정본을 간행하려 한 근본적인 이유 등을 자료에 근거해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노상직과 省軒 李炳熹 등 퇴로본 『성호문집』의 간행을 이끌어간 주체들이 가진 지향과 노력의 의미를 상고하는 기회가 되었다. 황덕길은 성호의 유고를 편정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 유가의 百世不朽之資’로 삼기 위해서라고 말했으며, 호서지역 사림은 퇴로리 간소에서 성호 문집 간행을 발의한 것은 ‘百代不朽之文’을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라고 칭송했다. 이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일제강점기라는 매우 어렵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노상직을 비롯한 밀양 사림이 막대한 물력과 인력을 쏟아 성호 문집을 간행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급변하는 근대전환기 속에서 전통 학문이 단절될 것이라는 절박한 위기 의식을 가졌으며, 자신들의 시대적 사명을 ‘서적 간행을 통한 불후화’로 받아들인 것이다.
?蓬山溫泉浴行日記?에 나타난 盧相稷의 동래온천 여행과 그 의미
?蓬山溫泉浴行日記?에 나타난 盧相稷의 동래온천 여행과 그 의미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269-321 (5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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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蓬山溫泉浴行日記?는 盧相稷(1855―1931)이 1925년 8월에 형 盧相益을 비롯한 지인들과 동래온천에 가서 온천욕을 한 일을 기록한 여행일기이다. 이 일기는 출발부터 닷새간의 일정만 기록한 짤막한 글이지만, 이 여행이 寒岡 鄭逑의 행적과 학문을 추모하고 계승하려는 행사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가치가 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은 동래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景賢契를 결성하는 것이었다. 목욕은 정구가 만년인 1617년에 제자들과 함께 동래를 찾아 온천욕을 하였던 일을 본받은 행사였고, 경현계는 당시 정구를 배종하였던 제자들의 후손들과 함께 寒岡學派의 후손으로서 친목과 결속을 도모하는 사업이었다. 정구의 동래온천 여행은 ?蓬山浴行錄?으로 기록되었으나 널리 언급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노상직은 젊은 시절부터 정구의 봉산욕행을 ‘南土美事’로 기렸으며, 여러 편의 글에서 중요하게 언급한 바도 있다. 노상직은 학문의 연원이 정구에 닿아 있었고, 특히 만년인 1920년대에 정구의 행적과 학문을 추모하고 계승하려는 일련의 사업을 펼쳤다. 그의 동래온천 여행은 이러한 사업들 중 하나였다. 한편, 1925년 동래는 전통적인 모습이 사라져가고 일본에서 들어온 근대 문명과 일본식 문화가 활개를 치고 있었다. 이러한 속에서 노상직은 서양의 신문물을 이용하고 긍정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것은 일부였고, 대체의 일상적인 행위에서는 유가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일상적인 행동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 ?봉산온천욕행일기?의 또 다른 가치일 것이다.
東洋漢文學硏究 第62輯 목차
東洋漢文學硏究 第62輯 목차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1-1 (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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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漢詩의 모험
20세기 漢詩의 모험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323-368 (4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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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시기에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 한문학이 사양길로 접어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한문학의 여파는 20세기 들어서도 상당이 이어졌다. 백일장과 模擬 科擧 大會가 심심치 않게 개최되었고, 출판사가 중심이 되어 독자 투고를 받아 회비를 낸 회원들에게 동인지를 발간하여 배포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까지도 한시협회가 존재하며 동인지를 발간하는 실정이다. 다만, 21세기의 한시 창작은 단순한 好古 취미라고 단정지을 수 있어도, 20세기 중반까지는 그 양상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대목에 등장한 한시 작품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上海 虹口公園 義擧의 주인공인 梅軒 尹奉吉,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다가 일제의 날조로 만들어낸, 이른바 ‘조선어 학회 사건’의 한가운데 있었던 고루 李克魯,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虞南 李承晩이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장면에서 지었던 한시 작품들을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려 한다. 세 분 모두 현대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분들로, 뒤의 두 분에 대해서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褒貶이 극명하게 갈릴 수 있어도, 그 역사적 비중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매헌은 의거 이틀 전 현장을 답사하고 돌아와 白凡 金九에게 자신의 이력서와 가족에게 보내는 유서와 함께 백범의 義氣를 찬양하는 한시를 올렸다. 고루는 한글 운동에 헌신한 것이 빌미가 되어 감옥에 갇혔어도 자신의 심정을 읊은 작품을 지을 때는 한시를 선택했다. 또 우남은 소년 시절을 온통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보냈었다.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재빨리 신학문을 배웠고, 영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出仕할 수 있었다. 그 뒤에 모종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상당 기간 수감생활을 하였는데, 옥중에서 다수의 한시 작품을 남긴 바 있다. 4·19로 하야하고 하와이에 망명한 뒤에는 젊은 시절에 지은 이 작품들을 한학자에게 국역시켜 자신의 순결한 젊은 시절을 증명하려 하였다. 세 분 모두 한문학 전통의 주류에서는 한발 비껴 있던 분들임에도,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매체로 한시를 선택한 것은 한시가 그때까지 일종의 ‘문화자본’으로서 기능하고 있기에 가능했었던 일로 생각된다. 이 점을 조금 더 보충하기 위해, 본론의 뒷부분에서 6·25가 한창일 때 간행된 『地方行政』이라는 잡지에 실린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가 지은 한시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하였다.
대한제국기 ‘노동(자)’에 대한 상상력
대한제국기 ‘노동(자)’에 대한 상상력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93-12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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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노동(자)’은 대한제국기에 본격적으로 형성된 개념이다. 한국의 20세기 동안 이 개념은 계속해서 변화했고, 지금도 이전과 다른 노동에 대한 생각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되어가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당대의 ‘노동(자)’ 개념을 총체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없다. 오히려 ‘노동(자)’을 둘러싼 상상력에 부분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태극학보』의 노동 이해를 통해 대한제국기 ‘노동(자)’ 개념의 의미망을 추적했다. 먼저 1899년에서 1904년까지 『황성신문』에 등장하는 ‘노동(자)’ 개념은 ‘국경’ 혹은 경계의 문제와 결합한다. ‘노동’은 일차적으로 일본어 신문이 다룬 일본인 ‘노동자’에 대한 기사에서 등장했다. 『황성신문』은 일본인 노동자들의 이주에 발발해 노동자들을 비판하는데 『황성신문』의 노동자상은 ‘실제’의 일본인 노동자가 아니라 상상된 노동자에 가까웠다. 물론 일본인 노동자의 이주를 옹호하는 일본어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노동(자)’ 개념은 일본에서 유래해서 대한제국으로 유입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대한제국, 일본어와 조선어의 접촉면 혹은 경계면에서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의 유래는 국가의 경계, 즉 국경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둘째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대다수 인민을 노동자로 호명하고 헌신을 요구했는데 이는 체제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이다. 인민을 노동자로 호명했는데 이에 호응하는 노동자-인민은 희생을 논리를 내면화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의 이름 아래 이루어진 호명은 새로운 주체의 출현을 상기시키는데 그것은 바로 의식화된 노동자를 통해서이다. 방대한 지식이 아니라 초보적인 지식을 통해서도 의식화가 이루어지는데, 노동자의 의식화는 주체화 이전, 주체를 형성하는 각성의 영역을 떠오르게 한다. 셋째 『태극학보』에서는 유학생들의 일본 체험에 근거한 ‘노동(자)’ 이해가 드러난다. 이들의 노동관은 자본가들의 입장에 근거한다. 부를 증대시킬 중요한 원천의 하나로 노동을 설정하고, 이러한 노동의 생산성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헌신적 노동 더 나아가 노동신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들의 노동관은 대한제국의 ‘실제 노동(자)’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노동이해에 근거한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자본가의 노동 윤리를 관철한다. 요컨대 대한제국기 신문과 잡지 속에서 ‘노동(자)’은 국경·의식화·헌신·노동신성·추상화와 같은 단어들과 연결되어 있다. ‘노동(자)’을 중심으로 연결된 이 개념들의 영향 속에서 당대 노동에 대한 상상력이 형성되었다. 이 상상력 속에서 ‘인간’의 의미와 가치가 규정되는 동시에, 이런 이해에 기반해 인간에 대한 지식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大東學會 경전 강연 연구
大東學會 경전 강연 연구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동양한문학연구 / 2022 / 35-70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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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學會는 대한제국기 유림 관료 집단을 주축으로 결성된 보수 학술단체이다. 그들은 당대 집권층의 입장에서 서구문명에 대응하기 위한 부국강병의 개화 정책 시행과 권력 유지를 위한 유교문명의 정치 체제 유지 등이 동시에 필요한 과제로 주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의 유교 정책을 東道西器論의 관점에서 성공적인 모범사례로 인식하고 일제 정치 집단과 협력하면서 대동학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강연회는 대동학회의 핵심 활동 중 하나이다. 대동학회는 주 1회 유교 지식인을 대상으로 유가 경전과 서구 신서적을 텍스트로 삼아 강연회를 실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대개 政治ㆍ法律의 正德ㆍ利用에 관한 東西ㆍ新舊 학문의 절충 방안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강연의 유형과 주제에 주목한 결과 유가 경전을 대상으로 修己治人 실현과 東道西器 절충에 관한 내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修己治人 실현의 경우, 유교적 도덕 정치의 당위성을 해명하고 그 실현의 단서를 제시하며 그 과정을 설명 권장한 것이다. 이는 율곡 聖學의 과정과 實心의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도덕 정치의 출처인 유교 체제의 확립을 위한 활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東道西器 절충의 경우, 반유교주의에 대응하여 유교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畿湖學派의 理氣論的 세계관을 근거로 서학 수용 상의 유학의 유용성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반유교주의에 맞서 권력 기반인 유교 체제를 수호하자는 기득권 유림의 정치적 통합의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동학회 강연을 통해 일제강점기 전후 유림 집권층의 친일화 과정을 확인한 점에서 사적 의의가 있다.
<만화본춘향가>의 서술방식과 주제의식 고찰
<만화본춘향가>의 서술방식과 주제의식 고찰
이지영(YI, Ji-youung)
국문학회 / 국문학연구 제45호 / 2022 / 155-18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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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만화본춘향가>의 서술방식을 분석하고 주제의식을 고찰하였다. <만화본춘향가>에서는 서술자가 다양한 시점으로 서술하는 가운데, 이도령의 시점과 목소리로 서술하는 대목이 우세하게 나타난다. 이도령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경우 서술자의 목소리가 이도령의 목소리로 전이되면서 이도령의 목소리가 서술자의 목소리와 섞이는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이도령의 목소리로 서술되는 몇몇 대목에서는 서술자의 존재가 크게 약화되면서 이도령의 1인칭 서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경우 이도령이 춘향을 ‘너’로 지칭하지만 춘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마치 연극의 방백이나 독백처럼 보인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서상기>의 창(唱) 부분과 유사하여 판소리를 통해 굴절된 <서상기>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만화본춘향가>에서 이도령의 시점과 목소리가 우세하게 나타나는 것은 유진한이 춘향가를 ‘이도령의 이야기’로 전유하였기 때문이다. 이도령이 춘향과 혼인하여 행복하게 사는 후일담이 확장된 것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이도령의 시점과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서술방식과 후일담 확장은 텍스트에 투사된 애정에 대한 작자의 관심과 기대의 결과로 보인다. 애정담에 대한 작자의 관심은 남휘의 <송여승가>에 대한 비판을 반박한 <만화본춘향가>의 구절에서도 확인되는데, 유진한은 <만화본춘향가>를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유복한 삶을 상상한 것으로 보인다.
유만주(兪晩柱)의 마지막 일기와 이상적 공간의 기획
유만주(兪晩柱)의 마지막 일기와 이상적 공간의 기획
김하라(Kim, Ha-ra)
국문학회 / 국문학연구 제45호 / 2022 / 275-322 (4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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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서울에 거주한 사대부 지식인 유만주(1755~1788)는 1775년 1월 1일부터 일기를 썼다. 12년간 정성스레 일기를 이어 오던 그는 1787년 5월 장남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일기쓰기를 중단했다. 다만 죽은 아들의 애도 기간으로 규정된 7개월간 아들을 기억하기 위한 일기를 더 쓰고 완전히 그만두기로 스스로 약속했다. 그는 약속대로 1787년 12월 14일에 “달 그림(月畵)을 제어해 끊고 마음의 붉은 눈송이(丹雪: 연지분)가 그치도록”이라는 모호한 문장을 써 일기를 맺었다. 본고에서는 그가 절필을 앞둔 1787년 12월 1일에 작성한 ‘원서(園墅) 제편(題楄)’을 분석해 이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읽어내고자 했다. ‘원서 제편’은 ‘임화동천’(臨華洞天)이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21가지 건축물과 조경시설, 자연환경의 범주와, 각각의 범주에 속한 개별 항목의 이름 213개로 구성된 목록이다. 유만주가 사랑하고 꿈꾼 풍경과 공간을 수렴한 이 목록은 1775년부터 그가 지속적으로 시도한 ‘임화동천’이라는 이상향의 기획을 계승하여 결산한 것이었으며, 심미적 몽상가이자 소설의 작가로 나아가던 유만주의 자아를 그려낸 마음 속 그림이자 일종의 자기서사다.
상사뱀 설화의 업(業) 설화적 고찰
상사뱀 설화의 업(業) 설화적 고찰
김순재(Gim, Sun-jae)
국문학회 / 국문학연구 제45호 / 2022 / 39-60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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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뱀은 윤회와 업(業)의 상징으로서 전생에서 악업을 많이 쌓은 인간이 주로 환생하는 짐승이다. 이에 불교의 수행자인 중이 죽어 상사뱀이 되는 설화는, 중이 색욕으로 악업을 쌓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불교의 업(業) 설화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내용의 중이 주인공인 불교 상사뱀 설화는 민간에 전파되어 등장인물의 범위가 확장됨에 따라, 불교와 관련 없는 일반인이 주인공인 민간 상사뱀 설화를 생성시킬 수 있다. 이렇게 생성된 상사뱀 설화는 불교의 포교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이를 자세히 서술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수도승들이 불계를 어기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고취하고자 상사뱀 설화가 생성․활용되었을 수 있다. 상사뱀 설화는 수도승들에게 윤회전생을 주지시켜 색욕과 관련한 악업을 쌓지 않게 하고, 불도를 닦아 선업을 쌓는 수행에 정진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둘째, 대중에게 불교의 교리와 사상을 쉽게 이해시켜 포교를 쉽게 하고자, 또한 재미있게 포교하고자 상사뱀 설화가 생성․활용되었을 수 있다. 승려들은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불교의 업(業) 사상과 윤회 사상을, 색욕이란 악업으로 상사뱀이 되는 설화를 통해 쉽게 풀어 전달함으로써 포교를 쉽게 할 수 있다. 또한, 재미있고 신이한 내용의 설화를 통해 흥미를 유발함으로써 대중들이 불교에 관심 갖도록 상사뱀 설화를 이용했을 수 있다. 셋째, 신이한 내용의 설화를 통해 부처의 영험성을 드높여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신도를 확보하고자 상사뱀 설화가 생성․활용되었을 수 있다. 승려들은 청평사 전설을 구연하며 불가능했던 상사뱀 퇴치를 부처의 영험함을 통해 해결했으므로, 공주의 공덕 행위와 같이 대중들도 불교를 믿고 공덕을 쌓으면 기원하는 일이 해결될 것이라고 포교할 수 있다. 이상으로 상사뱀은 불교의 오욕(五慾) 중 색욕으로 악업을 쌓아 환생하는 존재이며, 이로 인해 상사뱀 설화를 불교의 업(業) 설화로도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학사 김응조의 연시조 <학사삼곡>
학사 김응조의 연시조 <학사삼곡>
정기선(Jung, Ki-sun)
국문학회 / 국문학연구 제45호 / 2022 / 133-154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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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학사 김응조의 연시조 <학사삼곡>을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하기 위해서 작성되었다. 그의 문집인 󰡔학사집󰡕에 수록된 「학사삼곡서」를 통해 그가 창작한 시조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해당 작품이 발견되지 않아 더 이상의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근래 학사 종택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자료에서 김응조가 창작한 연시조 <학사삼곡>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가문과 생애를 검토한 결과, 김응조는 17세기 전반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관료와 학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학사삼곡>이 수록된 이상언의 󰡔학사행장초기󰡕와 김시행의 󰡔학사소차󰡕를 검토한 결과, <학사삼곡>은 김응조가 56세가 되던 해인 1642년에 창작되었다. 「학사삼곡서」와의 연관성 속에서 <학사삼곡>을 분석한 결과, <학사삼곡>이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추구하던 학문과 연군과 우국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사대부 일반의 생애를 고려하여 각 편마다 개별 주제를 배치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롭게 발견된 연시조 <학사삼곡>을 통해 17세기 시조 문학사를 보다 다채롭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 나주 출자 뱀 신앙 연원 일고찰 - 조선조 나주목 일대 용신 신앙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
제주도 나주 출자 뱀 신앙 연원 일고찰 - 조선조 나주목 일대 용신 신앙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
이현정(Lee, Hyun-jeong)
국문학회 / 국문학연구 제45호 / 2022 / 5-38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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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뱀 신앙을 대표하는 <나주기민창조상본풀이>와 <토산ᄋᆢ드렛당본풀이>의 신격인 천구아구데멩이는 단적인 뱀 그 자체는 아니며, 본디 용신에 가까운 존재다. 그 까닭을 이 글에서는 두 신앙의 공간적 연원과 나주목 일대의 용신 신앙을 연계하여 살피는 과정으로 풀었다. 각 신앙 형성에 관여한 용신 신앙의 실재와 전모는 신격의 출자 공간, 독특한 신앙적 속성과 연관된 역사적․민속적․문헌적 자료들을 견주는 선에서 재구하였다. 먼저 <나주기민창조상본풀이>와 관련 신앙의 연원 기반은 조상신․당신(堂神)․해신의 면모를 아우르는 신격 특성과 실제 나주 제민창의 소재지였던 안창동 제창마을 신앙 간의 접점을 살피는 것으로 톺았다. 안창동 제창마을은 고려조 이래 앙암과 용진단을 구심점으로 한 용신 신앙이 매우 성행하였던 곳이다. 이 같은 전통적․토착적 용신 신앙은 후대에 제민창과 관창(官倉), 교역(交易), 수운(水運), 해로(海路) 등의 문제와 결부하며 신앙적인 파생과 분화를 이루어 <나주기민창조상본풀이>와 관련 신앙의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제주로 이진곡(移賑穀)을 실어 나르는 배의 입․출항 시 치러졌던 해신제 역시 신앙적 기반이 되어 본풀이 서사에 흔적을 남겼다. <토산ᄋᆢ드렛당본풀이>와 관련 신앙의 연원 기반은 본풀이 상에서 확인되는 신의 변모, 즉 천구아구데멩이와 바둑돌, 용신 신앙 간의 연결 고리를 짚는 과정으로 풀었다. 본풀이 이본에 전하는 특별한 전반부 서사와 󰡔어우야담󰡕에 수록된 대망(大蟒) 이야기, 야담집에 널리 수록되었던 신숙주와 청의동자 이야기, 신숙주의 출생지인 나주 금안마을의 민간 신앙과 용신 신앙의 관계 등을 살필 때, 이 같은 토산ᄋᆢ드렛당신의 변모는 물론 나주 금성산 일대의 신앙적 저변들이 용신 신앙에 가닿는 한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두 신앙은 나주목 일대의 토착적․전통적 용신 신앙을 저류로 두되, 연원 지역과 제주사람들과의 신앙적․역사적 교류를 거치며 제주도 뱀 신앙 체계로 편승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두 신앙의 연원을 단적인 가신신앙 또는 뱀 신앙으로 한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두 신앙은 각 출자 지역에서 비롯된 용신 신앙이 제주도로 유입된 뒤, 토착적 뱀 신앙 혹은 선주민들의 뱀 신앙과 교섭하며 지금의 구색을 갖추었을 여지가 크다.
<채생기우(蔡生奇遇)>와 <장수과전(張守果傳)>의 비교 -인물과 작가의식을 중심으로-
<채생기우(蔡生奇遇)>와 <장수과전(張守果傳)>의 비교 -인물과 작가의식을 중심으로-
강혜규(Kang, Hye-kyu)
국문학회 / 국문학연구 제45호 / 2022 / 257-274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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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생기우>의 김령과 <장수과전>의 류순정이 비상한 두뇌로 단계적인 설득 전략을 통해 몰락 양반을 좌지우지하는 양상은, 중세시대에 중시되었던 체면과 윤리가 더 이상 그 힘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적합한 생존 능력으로 합리성과 설득력이 대두했음을 보여준다. 김령의 경우 딸의 안위를 위해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고, 류순정의 경우 공권력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며 그의 사기에 많은 이들이 공조하게 한다. 이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완고하게 과거의 규범을 고수하거나 욕망을 비이성적으로 추구하는 자들을 비판하는 주체로서 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선악과 하늘의 규범을 넘어 변화하는 자본과 욕망의 시대에 적응한 새로운 주인공으로 형상화된다.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작가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는 신분제가 흔들리고 자본과 욕망이 중세의 체면과 윤리 가치를 흔드는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된 시기에 작가 이현기는 여러 전형적 인물상을 통해 욕망의 긍정과 이성적 사고를 강조하고 자유와 행복을 제약하는 규범을 비판하며 상호교환으로 변화된 인간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가사 <운림처사가(雲林處士謌)>에 나타난  강호 인식의 양상과 도선(道仙) 지향
가사 <운림처사가(雲林處士謌)>에 나타난 강호 인식의 양상과 도선(道仙) 지향
송재연(Song, Jae-yeon)
국문학회 / 국문학연구 제45호 / 2022 / 101-132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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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문학적 생애 가운데 광해(光海) 혼정기(昏政期) 안동(安東) 풍산(豐山)에서의 은거 양상을 재구하고, 이를 토대로 󰡔해동유요(海東遺謠)󰡕 소재 가사 <운림처사가(雲林處士謌)>에 나타난 강호 인식의 양상과 도선(道仙) 지향 의식을 고찰하고자 작성된 것이다. 당쟁과 전란이 연속되었던 혼란기를 보냈던 김상헌은 의리와 절의를 중시하는 도학자적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환로(宦路)에 들어선 후부터 광해군을 비롯한 대북파 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부침(浮沈)을 거듭했던 그는, 1618년 사회의 혼란과 집권 세력의 박해를 피해 안동의 풍산으로 내려가 3년 동안 이곳에서 은거하였다. 풍산으로 낙향한 김상헌은 청원루(淸遠樓)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청원루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는 삼귀정(三龜亭)이 있었는데, 삼귀정 주변의 아름다운 산수자연의 경치를 완상하며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피세(避世)를 위한 은일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지인들과 교유하며 회포를 푸는 풍류의 장(場)으로 심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안동 풍산 은거기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사 <운림처사가>는 광해 혼정기의 현실에 대한 실망으로 산수자연에 은거한 처사의 삶을 노래한 작품으로, 풍산 삼귀정 일대의 자연경관을 완상하며 풍류를 즐기는 삶을 통해 속세의 번민에서 벗어나려는 피세적(避世的) 위안과 주어진 분수에 만족하며 천명(天命)에 순응하려는 삶의 태도가 구현되어 있었다. 또한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당대 현실을 부정(否定)함으로써 삼귀정 일대의 승경을 ‘선계(仙界)’라는 대리 만족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현실에서 불우(不遇)한 자아가 신선이 된 것처럼 선계를 즐기며 안식과 위로를 얻고자 하는 선취적(仙趣的)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아울러 가사 <운림처사가>의 작품 양상은 창작연대와 작자 미상의 상태로 전해지는 처사가 계열의 작품군과는 차이를 보였다. 처사가 계열의 작품군에서는 운림처사로 은거하게 된 상황에서 자연경관의 아름다움과 그곳에서 느끼는 흥취를 추상적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 은거의 계기나 당대 현실에 대한 인식,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이나 이념적 지향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에 󰡔해동유요󰡕 소재 <운림처사가>에서는 광해 혼정기 현실에 대해 부정함으로써 야기된 천명에 순응하는 운명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선계’라는 이상적 공간을 설정하여 불우(不遇)한 자아가 유선적(遊仙的) 삶을 지향함으로써 위안을 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