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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 역사학 (17,17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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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지역 청동기시대 중기 토기생산체계 일고찰
김은채(Kim, Eunchae)
한국고고학회 / [한국고고학보] 제2022권 제2호 / 2022 / 281-315 (35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역사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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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호서지역 청동기시대 중기의 토기생산체계를 살피기 위해 하나의 대푯값인 변동계수를 이용하여 주거지 평면형태별/시기별, 지역별로 토기의 유사도를 검토하고 그 양상을 고찰하였다. 주거지 평면형태는 크게 방형계 주거지와 원형계 주거지, 지역은 아산만, 충청 북부서해안, 충청 남부서해안, 금강중상류, 금강중하류역으로 구분하였다. 분석대상 기종은 호형, 발형, 적색마연원저호로 주거지 평면형태별/시기별, 지역별로 다양한 양상을 보이면서 전개되며, 이는 청동기시대 중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관련있다고 생각된다. 토기생산체계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요인들에 의해 조직과 성격이 결정되며 시기,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이게 된다. 청동기시대 중기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은 시기로 토기생산체계 또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였을 것이다. 본고는 호서지역 대규모 복합취락으로 토기가마군이 확인된 보령 관창리유적을 주목하였으며, 관련 유구·유물 분석을 통해 시기별 생산체계의 변화상을 파악하였다. 휴암리단계에는 분업 및 협업 형태의 소규모 생산체계로 운영되었으며, 송국리단계에 이르러 토기가마군이 이용되면서 보다 큰 규모로 집중적인 토기생산이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송국리단계에 높은 유사도를 보인 금강유역은 보령 관창리유적보다 체계적인 토기생산을 했다고 상정되며, 지역 내의 유통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기시대 중기 토기생산체계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보다 표준화된 토기생산체계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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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사행검(蛇行劍) 일고찰(一考察)
유영춘(Yu, Yeongchun)
한국고고학회 / [한국고고학보] 제2022권 제2호 / 2022 / 389-424 (36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역사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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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검(모)은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교류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이다. 본고에서는 국내에서 출토된 11점의 사행검과 1점의 사행모를 대상으로 용도와 형태적 변천·전개양상 등을 고찰하였다. 사행검(모)은 실제 전쟁에 사용된 무기(武器)라기보다 비실용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산해경』의 우사첩과 뱀의 상징성 등을 참고하면, 연안 및 내륙수로 항해 시 항해자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제사용 의기(義器) 및 신물(神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피장자의 영생과 부활을 기원하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서 출토된 사행검(모)의 시간적 변천을 보여줄 수 있는 속성으로는 신부의 형태가 있다. 초기에는 굴곡이 미미한 D형이 주로 등장하다가, 5세기 중반과 후반을 기점으로 굴곡이 많은 A~C·E형이 제작된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열도 사행검의 변화와 차이가 있다. 사행검(모)은 일본열도에서 기원한 후, 5세기 전반 무렵 왜와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연안항로를 따라 한반도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에는 왜계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다가, 5세기 중반~5세기 후반에 이르러 내륙 교통로와 가까운 재지(在地)의 고분에서 출토된다. 아마도 사행검 제작기술이 교통로를 따라 내륙으로 전파된 후, 고도의 철기 생산기술을 가진 집단을 중심으로 수용되면서 현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전반 이후에는 사행검(모)의 출토 사례를 찾을 수 없어 이 무렵 매장의례가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충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전곡리 석기들의 고찰
충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전곡리 석기들의 고찰
한국구석기학회 / 한국구석기학보 / 2022 / 5-37 (33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역사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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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중인 전곡리 수습 석기군의 입수 경위와 석기군 양상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동시기에 발굴 조사된 초창기 전곡리 발굴 성과를 다시 한번 검토하면서 향후 전곡리 구석기 연구에서 나아갈 바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석기 형식분류의 용어를 보다 명료하게 재정의할 수 있었으며, 전체 지표수습 석기군을 기존의 분석틀로 계량적 검토를 한 결과 지표수습품이라는 한계를 제외한다면 기존의 전곡리 석기군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현재까지 퇴적층 내에서 발견된 주먹도끼에 대한 다양한 입장 및 견해들을 다시 한번 짚어 보면서 전곡리의 주먹도끼 연대가 잘못 파악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지적할 수 있었고, 이러한 점을 극복할 수 있는 차후 방안을 모색해 보았다. 그리고 최근 발견된 전곡리 85-12 지점을 사례로 들며, 앞으로 다양하고 흥미로운 해석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지만 선행 연구가 감수해야 했던 시행착오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될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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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남강유역 적색마연토기의 생산과 유통
황재훈(Hwang, Jaehoon);이정은(Lee, Jeongeun)
한국고고학회 / [한국고고학보] 제2022권 제2호 / 2022 / 249-279 (31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역사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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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청동기시대 사회경제적 측면에 접근하기 위한 예비 작업의 일환으로, 남강유역의 특징적인 유물 중 하나인 적색마연토기의 생산-유통시스템과 그것의 변화양상을 살펴보았다. 먼저 민족지, 고고학적 연구를 검토하여 생산 규모와 전문화, 생산의 집중도, 노동 시간과 집약도에 따라 크게 5가지 유형의 토기 생산체계를 도출하였다. 토기의 유통체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생산지와 소비지, 소비단위, 물품 성격, 엘리트 통제 등 다양한 사회환경적 조건들을 검토하였다. 다음, 토기의 변동계수를 이용해 남강유역의 생산 수준이나 규모, 전문화 등 생산체계를 파악하였다. 변동계수 값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일상토기인 무문토기는 가내수공업자에 의해 생산되어 개별 가구 또는 취락 내에서 소비되었던 반면 적색마연토기는 가내수공업자 혹은 반전업 도공그룹에 의해 가내공작 또는 초보적 수준의 생산공방에서 제작되어 보다 넓은 범위에서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적색마연원저호 Ⅰ식은 진주 대평리 유적에서 생산되어 남강 일대 제 유적으로 활발히 유통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fall-off curve 분석을 이용하여 적색마연토기의 유통망을 살펴보았다. 생산지에서 소비지까지의 거리와 토기 수량 간 상관관계가 확인되었는데, 30km 정도의 유통범위를 보이는 생활유적에 비해 무덤유적의 경우 그 범위가 훨씬 넓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유적 성격에 따른 물품의 교환-유통체계의 차별성이 반영된 결과이다. 특히 단순선형회귀식에서 생활유적과 무덤유적에서 유의미한 편차가 관찰되었는데, 전자는 down-the-line trade, 후자는 directional trade와 no distance decay trade에 가까운 결과값을 나타냈다.
한국구석기학보 제45호 목차
한국구석기학보 제45호 목차
한국구석기학회 / 한국구석기학보 / 2022 / 1-1 (1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역사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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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신석기시대 흑요석제 석기의 출토양상과 의미
김은영(Kim, Eunyoung);장용준(Chang, Yongjoon)
한국고고학회 / [한국고고학보] 제2022권 제2호 / 2022 / 215-247 (33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역사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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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신석기시대 흑요석기의 출토양상과 지역별 특징을 검토하고, 최신 흑요석 산지분석 결과를 근거로 지역 간의 원거리 교류, 신석기시대의 사회 동태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흑요석 산지가 있는 동북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흑요석을 사용했다. 백두산 흑요석의 공급망이 체계화되는 신석기시대 후반에 흑요석을 가장 왕성하게 사용하였으며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까지 계속 활용했다. 주로 가공구와 수렵구를 제작했으며, 크기가 큰 기종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남부지역은 전기 융기문토기 단계에 가장 활발하게 흑요석을 반입했으며, 후기 이중구연토기 단계에도 흑요석을 널리 이용했다. 남부지역 신석기인은 가공구와 수렵구 외에도 어로구를 제작했으며, 일본 규슈지역으로부터 배로 흑요석을 운반해 왔기 때문에 소형 기종만 확인된다. 중서부지역은 후기, 중동부지역은 전기에만 흑요석을 사용했다. 흑요석기의 기종과 형태로 볼 때 중서부지역은 동북지역과 관련이 있으며, 중동부지역은 동북지역과 남부지역의 중간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흑요석 산지분석 결과에 따르면 백두산 흑요석은 신석기시대 전기에 중동부지역을 거쳐서 남부지역으로 이동했다. 특히 울산 처용리유적에서 확인된 백두산 흑요석의 이동 사례는 동해안을 따라서 형성된 교류네트 워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석기시대 후기에 중서부지역에 확산된 백두산 흑요석은 동북·연해주지역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서부지역에서의 흑요석으로 만든 타제 수렵구의 존재가능성을 제시했다. 한반도 남부지역의 일본 규슈산 흑요석과 한일 교류 관련 유물에 대한 검토를 통해 교류의 방향과 특징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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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갑주의 의례적 성격 - 고분 출토품을 중심으로
김혁중(Kim, Hyukjoong)
한국고고학회 / [한국고고학보] 제2022권 제2호 / 2022 / 371-388 (18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역사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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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의 갑주 연구는 정치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에만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고대 갑주 자료의 대부분은 무덤에서 출토되는 부장품이며 갑주의 용도인 방어적 기능과는 관련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갑주는 의례적 성격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려해 볼 목적에서 사례를 중심으로 초보적인 검토를 하였다. 본고는 먼저 갑주가 고분에 부장되는 물품 이외의 어떤 의례적 성격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종장판갑은 4세기대 대표적인 갑주이면서 방어적 기능과 상관없는 다양한 문양을 가지고 있다. 종장판갑은 다양한 문양과 더불어 조립이나 제작에 완성도가 낮은 부장품이 적지 않은데 이 점은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무구로 보기 어려우며 그중 와문과 털 장식 등은 벽사와 관련된 기복 신앙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다. 갑주는 고분 이외에도 사찰이나 주거지에서 찰갑이 출토되는 사례가 있다. 본고는 사찰의 경우 공양보다 의식과 관련된 성격으로 추정해 보았다. 주거지에서 찰갑이 출토되는 사례는 백제지역이 많다. 최근 함안에서 확인된 아라가야 궁성지로 추정되는 유적 출토 소찰도 병기고로 보았으나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무덤에서 출토된 갑주에서 나타나는 의례적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서 복천동고분군의 사례를 검토해 보았다. 갑주 부장의 일정한 경향성은 찾기 어려웠지만 고분을 축조하면서 행해진 의례나 공헌을 목적으로 한 부장품이 확인되며 이외에도 벽사와 관련하여 부장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고대인에게 갑주는 본고가 살펴본 바와 같이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기에 향후 다양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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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기 횡혈식석실의 매장 프로세스 검토
김동균(Kim, Donggyun)
한국고고학회 / [한국고고학보] 제2022권 제2호 / 2022 / 505-525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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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기 횡혈식석실 연구는 지금까지 많은 분야에서 진행되었지만, 전체적인 매장 프로세스를 파악하기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럼에 따라, 본 논문은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익산, 완주, 예산, 보령지역에서 조사된 사비기 횡혈식석실 자료를 바탕으로 매장 프로세스를 분석하고 복원하였다. 매장 프로세스 분석 결과 횡혈식석실의 축조과정은 총 3단계로 나누어진다. Ⅰ단계는 석실 축조 전 단계로 묘역 선정과 묘광 굴착, 배수로를 설치한다. Ⅱ단계는 석실이 축조되는 단계로 석재형태의 선택, 석실 조립이 이루어진다. 석실 조립이 완료되면 석실 상부에 1차 성토가 이루어진다. Ⅲ단계는 현실 안으로 피장자안치와 부장품을 매납하고 석실이 폐쇄되며, 이후 2차 성토인 묘도부 성토가 이루어진다. 동시에 호석을 설치하면서 봉분의 경계를 확정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 후 3차 성토로 마무리하면서 주구가 설치된다. 복원한 축조과정을 토대로 상장의례와 함께 사비기 횡혈식석실의 매장 프로세스를 부여 왕릉원 서고분군을 중심으로 복원하였다. Ⅰ단계에서는 피장자가 사망 직후 횡혈식석실의 축조가 시작되고 피장자는 빈전에 안치되었으며, 빈전으로 이동되기까지 의례가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Ⅱ단계에서는 피장자가 빈전에 안치되는 기간에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 기간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Ⅲ단계는 피장자가 빈전에서 석실로 이동하며, 이 단계 의례는 시신을 운구하는 과정과 횡혈식석실 축조과정이 마무리된 이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비기 횡혈식석실은 부여, 익산, 완주, 예산, 보령지역에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기왕의 연구를 통해 석실을 축조하기 위해 설계도라는 하나의 계획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석실 축조과정의 매장 프로세스 공유도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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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본 5-6세기 영산강 고분사회의 구슬 교역·유통·소비
허진아(Heo, Jina);송원근(Song, Wongeun)
한국고고학회 / [한국고고학보] 제2022권 제2호 / 2022 / 451-478 (28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역사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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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5-6세기 영산강유역 고분 출토 구슬의 교역·유통·소비 맥락을 검토하여 영산강 고분사회와 백제 중앙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지역 고유의 정치경제적 위계질서 즉 위신재 경제가 작동되었는지 여부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먼저 권력 창출의 재원으로서 영산강 고분 축조집단들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상교역 네트워크의 범위와 수준을 추정하고, 구슬이 유통된 엘리트 네트워크의 구조와 특징을 파악한 후, 유구별 부장품 양상을 검토해 영산강 지배층에서 구슬이 소비된 맥락을 살펴보았다. 분석 결과를 토대로, 필자는 영산강 고분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 5-6세기 엘리트 네트워크의 다양성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4세기 중후반 이후 백제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어 감에 따라 영산강유역에는 외부로부터 다양한 세력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며 새로운 관계망이 형성된다. 백제에 의해 사회질서가 재편되어가는 과정에서 마한 재지세력은 해상교역품 구슬을 위신재로 공유하며 기존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함과 동시에 외부세력을 네트워크 안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교류 관계를 창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관계망의 형성은 궁극적으로 영산강유역의 다양한 세력이 상호의존적 관계 혹은 동맹 구축의 토대를 마련했음을 의미하며, 나아가 백제 중앙과의 관계가 상호보완적 협력에 기초하였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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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2세기~서기 2세기 사로권역의 철기 부장 시스템과 유통망 구조
장기명(Jang, kimyeong)
한국고고학회 / [한국고고학보] 제2022권 제2호 / 2022 / 339-369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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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분묘 부장 철기의 검토, 제철 유적의 특징, 금속학적 분석을 상호 비교하여 생산-유통-분배-소비의 연결고리를 탐색함으로써, 사로국이 실질적으로 분묘에 반영하고자 했던 철기 소비 방식과 유통망 구조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서기전 2세기대부터 분묘에 부장된 초기 철기는 서북지방/호서·호남지방/중국 계통의 일부 기종 유입과 자체 생산에 의해 복합적으로 구성되었다. 그 배경에는 다양한 경로·유입 방식에 의거한 새로운 ‘철 물품’ 입수 능력과 급속도로 발전한 철기 생산력을 표출하고자 했던 부장 맥락이 깔려 있었다. 서기전 2세기 말 이후, 사로권역의 철기 부장체계는 서북지방의 기종 구성을 기본 구조로 하되 일부 기종과 생산 기술이 추가되는 형태로 단기간에 완비됨으로써, 위만조선 유이민 영향에 의한 철기 생산체계의 이식과 적극적 수용이 상정된다. 서기전 1세기~서기 1세기에 걸쳐 금호강~형산강 유역(달천광산 일대 포함)에 입지한 수장묘에서는 철 소재를 양적으로 과시하는 매장의례(판상철부 시대, 목관 내부 장식 등)가 공유된다. 이런 현상은 분묘가 본격적으로 철기 소비처로 변모하는 변화 획기로서 진, 변한 특유의 위세적 철기 소비라는 부장 전통을 형성, 전개한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중간 소재인 판상철부만이 대량 부장되고 배타적 매장의례로 소비된 배경에는 불균등한 철광석 산지와 초보적 제련 공정 수준에 의해 철 소재의 유통과 확보가 매우 중요시되었고, 진한 유력 국 사이에서 일부 수장들이 철 생산 및 유통망 개입, 분배 관할력을 표출하기 위해 경제적, 이념적 유대 전략을 고안해 낸 것이었다. 2세기 전후의 상황으로 볼 때, 노동집약적 철(기) 생산, 유통의 당시 조건 속에서 사로국은 철광석 산지 확보, 사회적 조직력, 안정적 대외 교역망 등이 충족된 상태였다. 그러한 조건에 기반하여 사라리 130호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철 소재 부장량 및 매장의례가 극대화된 형태로 표출되었고, 사로국의 철 생산 및철기 유통과 직결된 경제적, 문화적 기반이 독보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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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지역 적석목곽묘의 전개양상과 의미
길가은(Geel, Gaeun)
한국고고학회 / [한국고고학보] 제2022권 제2호 / 2022 / 425-450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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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지방에서 나타나는 소위 사방적석식 적석목곽묘를 넓은 의미의 적석목곽묘 범주에 포함하여 그 전개와 의미를 검토한 것이다. 경산지역에서 적석목곽묘가 조사된 유적으로는 임당동·조영동·부적리고분군(임당유적), 신상리고분군, 선화리 1111번지 유적 등이 있다. 임당유적에서는 약 2세기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상위 위계와 중하위 위계에 해당하는 적석목곽묘가 확인된다. 반면, 신상리고분군과 선화리유적은 착장위세품과 부장유물로 보아 중하위 위계에 해당하는 적석목곽묘가 5세기 말엽부터 6세기 전중엽까지 조영되는 양상이다. 이러한 지방의 적석목곽묘는 신라 중앙과의 관련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 지역 집단 간의 위계에 따라 규모와 축조단위 등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지방 적석목곽묘의 축조 양태에 따라 마립간기에 신라와 지방 내 각 세력의 관계성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신라가 중하위 위계의 정치체에게 이주를 장려했을 가능성, 지증왕대 신라에서 지방관을 파견했던 정책 등의 정치적 맥락이 작용했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부적리 BⅥ호분은 신라 중앙의 적석목곽묘 구조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주목되는데, 이것은 신라가 마립간기에서 본격적인 중앙집권 국가로 이행하기 위해 토대를 마련하고 왕권을 강화하던 과정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제10회 아시아 구석기학회(APA) 참관기
제10회 아시아 구석기학회(APA) 참관기
한국구석기학회 / 한국구석기학보 / 2022 / 39-46 (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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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국가형성기 농업 전략의 특징과 채택 맥락
이희경(Lee, Huikyung)
한국고고학회 / [한국고고학보] 제2022권 제2호 / 2022 / 479-503 (25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역사 / KCI : 인문학 > 역사학
초록보기
원삼국-백제 한성기의 중부지방 유적에서 출토되는 작물유존체의 종류와 수량, 철제 농기구의 수량 분석 결과 작물 재배 방식과 농기구의 이용 양상에서 시간에 따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파악하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백제 국가형성기의 농업 전략과 그 특징을 검토하여 지역적 차이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 경기지역에서는 경기 남부를 중심으로 수전 농경의 확대에 따른 전문화의 가능성이, 백제 도성 주변의 유적들에서 주조괭이의 이용도가 급증하는 혁신으로 볼 수 있는 변화가 나타나, 높은 비용이나 노동력의 투입이 필요하여 위험도가 높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생산 과정이 질적으로 개선되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전략들이 채택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반면에 영서지역에서는 대체로 철제 농기구가 제한적으로 사용되면서 쌀, 보리, 피가 추가되는 노동집약적인 다양화 전략이 강화되는 양상이 나타나, 초기에 높은 비용이나집중적 노동력의 투입은 필요하지 않고 위험도도 낮지만 효율성 또한 낮은 전략들이 채택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와 같은 차이는 농업 전략이 채택된 지역적 맥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두 지역의 전통적인 농업 방식, 환경적 조건, 경제적 기반과 같은 요인들이 농업 전략의 채택 과정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되었다.
이기길 약력
이기길 약력
한국구석기학회 / 한국구석기학보 / 2022 / 47-52 (6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역사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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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리 방어취락의 성립과 해체
배덕환(Bae, Duckhwan)
한국고고학회 / [한국고고학보] 제2022권 제2호 / 2022 / 317-338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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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후기의 진주 대평리유적은 직선거리로 약 1km 이격된 거리의 동·서 2개소 환호취락(環濠聚落)이 대규모 경작지 경영, 옥 등 수공업 생산 등에서 분업화가 진전된 우호적인 쌍체취락(雙體聚落)이다. 이렇게 한정된 공간에 2개소의 환호취락이 동시공존하는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현상으로서 취락의 공간구성 및 생활사 파악에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평리취락은 외곽을 두르는 가시적인 시설물로서의 환호에 대한 관심만 집중되었을 뿐 환호, 목책(木柵)에 대한 실질적 연구는 아직 이루어진 바 없다. 본 글에서는 이 점에 주목하여 환호, 목책, 토루(土壘)의 양상과 구조, 효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방어시설로서의 기능이 주목적이었음을 부각하였다. 이는 남강유역을 따라 분포하는 동시기 대규모 취락 간 전쟁과 같은 갈등상황이 빈번하였음을 의미하는데, 단수인골(斷首人骨), 무덤에서 출토된 무구류의 출토양상을 통해 전쟁희생자를 상정하였다. 또한 동·서취락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구성 및 수량분석을 통해 근접무기인 석검, 석창보다는 원거리 무기인 활이 주무기로서 선호되었으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 환호와 부가되어 목책, 토루 등 입체적인 시설물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러나 강변 충적지에 설치된 대평리취락은 방어시설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아닌 홍수(洪水)와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해체된다. 이는 대평리취락뿐만 아니라 남강유역 동시기 취락들의 공통된 현상으로서 자연재해 앞에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시사하며 다음 단계가 되면 평지취락은 소규모로 축소되거나 점차 구릉으로 이동하다 남강유역 청동기문화는 종말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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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國定 歷史敎科書 『中外歷史綱要』의 導入과 그 性格
임상훈(LIM, Sang Hun)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 역사문화연구 / 2022 / 223-24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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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중국은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확정하였고, 역사교육과정을 필수·선택적 필수·선택 과목의 3단계로 구분하였다. 국정 역사교과서 『중외역사강요』는 2022년 이후부터 중국 전역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유일한 역사 교재로서 활용될 계획이다. 본고는 한중 간 역사갈등의 원인 중 역사교육에 대하여 주목하며, 『강요』의 출현 배경과 영향, 문제 등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강요가 미중패권경쟁의 가속화와 함께 국제적으로 더욱 고립되어가는 상황에서 등장했다는 점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중국은 애국심 강화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를 통해 내부의 일치단결을 도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등장한 『강요』는 이와 같은 중국의 정치적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중국의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투영된 강요는 지나치게 유물사관에 입각한 서술방식, 통일다민족국가론의 강변, 자국중심의 역사서술 등의 여러 문제를 지니고 있다. 향후 전국의 모든 일반계 고등학생이 이를 통해 교육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의 입장을 적극 표현해야 한다다. 중국의 역사교과서 속 우리와 관련된 내용을 보다 세밀하게 관찰·분석하며, 한중 민관학계의 적극적인 교류와 소통을 통해 지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그 내용을 조율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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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 고려의 保州 영유권 분쟁
나영남(Na Young Nam)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 역사문화연구 / 2022 / 3-2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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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중원에서는 宋, 만주에서는 契丹, 한반도에서는 高麗가 각각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세 나라가 거란을 중심으로 국경이 접하면서 영토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요동에서는 발해영토였던 압록강 유역을 둘러싸고 거란과 고려가 전쟁과 외교전을 지루하게 펼쳤다. 거란의 聖宗이 즉위하면서 그의 동방 경략과 고려의 북방정책이 충돌했다. 마침내 거란은 고려를 침략했으며 이를 계기로 양국은 압록강을 경계 삼아 그 이남 지역은 고려의 영토로, 그 이북 지역은 거란의 영토로 하는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거란은 외교적 명분을 저버리고 이미 할양했던 保州에 대해 계속 실효적 지배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강동 6주를 전부 돌려달라고 재차 침략했다. 보주는 압록강 하류에 있는 지역으로 요동과 한반도를 잇는 咽喉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군사적 요충지이자 중요한 교통 및 교역의 거점이기 때문에 고려도 양보할 수 없었다. 고려는 보주에 세운 거란의 각종 시설을 여러 차례 파기하라고 항의했고 더 나아가 그곳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보주를 꼭 쟁취해야만 했으나 군사력이 미약하여 보주를 강제로 탈환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진이 발흥하여 금을 건국하였고, 금군의 맹렬한 공세로 거란이 위급하게 되었으므로 고려는 보주를 다시 찾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고려는 물리적인 수단보다는 외교적 수단을 이용하여 거란과 금에 타협하였다. 거란이 군사를 철수하면서 내원성과 보주를 고려에 인도하였고 금군에 앞서 입성하였다. 고려는 자신들의 소유권을 금이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금은 사대의 대가로 고려의 소유권을 인정하였고 마침내 보주를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처럼 고려는 거란과 여진에 칭신함으로써 강동 6주와 보주를 얻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 외교는 당시의 국제적 관례였다. 그들이 동북아의 패권국이 된 이상 고려의 실리적인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다. 고려는 영토를 획득하고 양국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전쟁을 최소화했으며 이는 고려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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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미국인이 바라본 서울에 대한 인식
이수기(Lee Su Ki)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 역사문화연구 / 2022 / 159-18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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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미국인들은 자신의 견문기에 서울에 대한 관심을 기록하였다. 미국인 견문기에서 수도인 서울에 대한 인상과 인식은 대부분 빠지지 않고 기록하였다. 미국인들이 서울에 관심을 갖고 서울을 다른 지역에 비해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개항기 서양인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외국공사관이 있는 서울에 먼저 들어갔어야 했고, 지방을 여행하더라도 서울을 거쳐 지방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로 서울은 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방문한 지역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 글에서는 미국인의 견문기를 통해 견문기에 나타난 서울에 대한 인식을 분석하고, 나아가 국가별 서울인식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1880년대부터 1910년대에 한국을 방문하여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분석하려고 한다. 대표적으로 로웰, 길모어, 다니엘 기포드, 언더우드 부인, 헐버트, 알렌, 언더우드, 제이콥 로버트 무스, 샌즈, 노블 등 10명의 기록을 중심으로 하겠다. 미국인들이 서울에 대해 가진 공통관심사로는 지도상 표기의 수도와 서울의 위치, 서울 가는 길, 서울의 인구, 서울의 경치와 주위환경, 남산과 북한산, 성벽과 성문, 왕궁, 도로, 유적 유물, 봉화와 통금, 하수처리와 위생, 시장과 상점, 순찰체계, 왕궁, 한강, 운송수단, 의식주, 선교사업(병원과 교회 및 학교 설립), 서울의 교육, 외국공사관, 서울의 유적, 서울의 변화와 근대화 등으로 분석할 수 있다. 미국인들이 인식한 서울에 대해 첫인상과 서울의 낮과 밤 풍경에 중점을 두어 분석하였다. 첫인상에 대한 부분은 지도상 서울의 표기 방식,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두 큰 산인 남산과 북산, 이 두 산 사이의 성벽과 성문, 왕궁, 도로, 유물, 서울의 인구 등에 대해 공통적 관심을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변화상은 도로에 대한 것뿐이었다. 서울의 낮에 대한 부분은 교통에 해당하는 운송수단, 경제상황을 엿볼 수 있는 상점과 상인, 교육에 해당하는 서당과 근대식 학교, 전염병과 관련 있는 하수처리와 위생 등에 대해 공통적 관심을 보였다. 여기에서 변화상은 운송수단의 변화로 전차, 기차, 증기선 등을 지적하였고, 학교의 변화로 전통적인 방식의 서당에서 근대식 학교 교육과 방법 등을 언급하였다. 서울의 밤에 대한 부분은 통신에 해당하는 봉화, 보신각종과 통금, 순찰체계 등에 대해 공통적 관심을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변화상은 통신의 변화로 봉화 대신 전신과 전보를 들었고, 통금에 대해 통금 폐지를 들었다. 이러한 변화상은 주로 갑오개혁 이후 나타난 변화로 시기별 변화를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대다수 미국인들이 강조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의 근대화 발전 속도가 다른 수도에 비해 빠르다는 점이다. 시도는 늦었지만 속도는 빠르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끝으로 이후에 미국 이외의 다른 국가별 서울에 대한 인식을 분석하여 국가별 인식의 차이 또는 변화 등을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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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 康熙 연간 알바진 원정과 黑龍江 지방의 교통로 개척
고석현(Koh Suk-Hyun)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 역사문화연구 / 2022 / 87-124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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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포함하는 만추리아 전체가 入關 이전부터 청조의 영토였을 것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만추리아라는 근대적 지리 개념을 청조의 지배집단인 만주의 고향과 연결한 데에서 온 착시이다. 실제로 누르하치의 출신 집단인 建州女眞 숙수후부의 거점은 長白山 이북, 명의 遼東邊墻 이동 지역이었다. 건주여진을 포함한 여진계 집단의 근거지를 모두 합한다 하여도 그 지역은 만추리아의 남부에 국한되었다. 아무르강-눈강 유역에 ‘黑龍江將軍 관할구’가 설치되고 청의 직할지로서의 지배가 시작된 것은 1680년대 러시아와의 충돌 과정에서였다. ‘흑룡강장군 관할구’가 형성되기 이전 청조가 장악하고 있던 만추리아의 지역은 요동을 중심으로 하였다. 1670년대까지도 청조의 군사 거점·교통로 설치는 柳條邊 안을 중심으로 하였고, 닝구타와 같은 임시 거점이 유조변 밖에 일부 존재하였을 뿐이었다. 1670년대 길림 개발과 유조변 신변의 설치로 청의 직할지가 확장되었으나 여전히 성경-길림-닝구타를 잇는 선 북쪽의 광활한 아무르강-눈강 유역은 청의 직접 통치가 미치지 않는 ‘外藩’으로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680년대에 러시아 세력이 아무르강 중상류 유역 알바진(Albazin)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변화하였다. 알바진이 자급자족이 가능한 거점으로 성장하자 강희제는 러시아 세력을 아무르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한 원정을 진행하였다. 신설 흑룡강장군을 중심으로 전개된 두 차례의 알바진 원정은 강희 28년(1689) 네르친스크 조약의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이 조약에서 흑룡강장군 관할구는 명실상부 청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다만 흑룡강장군 관할구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전쟁의 수행이나 국경의 획정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전후한 시기 진행된 해당 지역에 대한 청의 통치권 확대 과정이었다. 1670년대 러시아 세력과의 격돌이 있었던 아무르강 중하류 및 송화강 유역과는 달리, 아무르강 중상류 유역은 당시 청군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기반이 충분히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대군을 동원하여 알바진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청군의 주둔지를 설치하고, 군량을 운반하기 위한 보급로와 인력·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역참로를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강희제는 우선 관원을 파견해 아무르강 중상류 유역에 대한 지리 조사를 진행한 뒤 그 결과를 종합하여 아이훈에 駐防 설치를 명하였다. 또한 성경·길림 등 기존에 청조가 장악하고 있던 지역과 아이훈을 연결하는 보급로와 역참로를 개척하였다. 역참로 개척 과정에서 중요성을 확인한 머르건에도 주방을 설치하면서 아무르강-눈강 유역에 대한 청조의 지리적 이해는 점차 심화되었다. 군사 주둔지의 설치와 교통로 개척을 배경으로 청조의 해당 지역에 대한 이해는 심화되었고, 이를 계기로 아무르강-눈강 유역은 청조와 느슨한 관계만을 맺고 있던 ‘外藩’에서 청조의 주방 장군이 직접 통치하는 ‘直轄地’인 ‘黑龍江將軍 관할구’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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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代 滿洲지역의 주요 교통로와 중심 거점
윤은숙(Yoon Eun-Sook)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 역사문화연구 / 2022 / 29-56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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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전역을 지배권 아래 둔 첫 번째 제국 元은 遼·金 시기의 부분적 교통로를 5대 주요 교통로로 정비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만주 전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만주에 대한 통제와 개발이 원에 의해 본격화 되었다. 원은 만주 지역 역참을 통해 東方王家의 남하를 상당 부분 저지하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크게 강화할 수 있었다. 만주 중심로에 위치한 咸平은 원과 반란군 모두의 전략적 거점으로 작용했다. 치열한 교전 끝에 함평을 수중에 넣은 원은 증대한 주둔군을 위한 군수물품 조달과 여진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를 목적으로 1289년에 이곳으로부터 순차적으로 역참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원대 祥州는 4대 노선을 연결하는 중심축으로 만주지역 최대 교통 요지이다. 상주에서 출발한 만주 서북로의 일부 구간은 일종의 水站으로, 일종의 원대 만주 급행 노선으로 기능했다. 이로써 상주에 집결한 만주의 물산들은 몽골리아와 대도로 보내졌으므로 상주 역참은 물류 이동의 기점이 되었다. 원대 역참의 개설과 운행은 大都와 몽골리아 그리고 만주지역 사이의 경제·문화적 교류가 활성화됨으로써 만주 개발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