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기관 내 간행물

  • 간행물 내 검색 검색
  • 간행물 또는 권/호를 "-전체-" 선택하시면 통합 검색이 가능합니다

동양한문학연구

검색결과 :
6
전체선택 Endnote Refworks
이 논문은 李建昌의 「秋水子傳」에 주목하여 작품의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고자 시도한 글이다. 그동안 이 작품 안에 인용된 李根洙의 秋水詩 詩句 중 오해되어왔던 대목들을 바로잡고, 작품 중에 나오는 趙大夫가 趙成夏임을 실증하였다. 이를 통해 이건창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작품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한 걸음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鄭萬朝가 증언하였듯이 이근수는 고종 시대의 명망 높았던 문학가로 인정받을 만한 인물이다. 이는 그가 교유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아도 그러하다. 「추수자전」과 이근수는 앞으로 더욱 고구할 만한 여지가 많은 연구대상으로 본고의 논의가 그 단초를 여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연행록 자료를 통해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을 살피려는 목적 아래 그 일부인 이슬람 세계를 다룬 것이다. 16세기 이후 세계관 변화와 중국의 이슬람 세계 통치 상황 등의 이유로 이슬람 세계를 기술한 시기는 조선 후기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전기의 사례로는 성현의 연행시를 살폈는데, 여기서 성현은 이미 무슬림 이국인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중화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중기의 사례로는 이수광의 『芝峰類說』·이민성의 『燕槎唱酬集』·김중청의 『朝天詩』를 살폈다. 이수광은 중국 문헌 속 이슬람 세계의 정보를 가져와 기록해두어 이전보다 세계 지리적 인식이 확대되었음을 예상하게 해주었고 이민성과 김중청의 기록에서도 이슬람 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의 연행록 자료들을 취합하여 살핀 결과, 조선 지식인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관심과 기록이 훨씬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문화나 인물에 대한 부정적 서술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지식네트워크가 협소하고, 이에 따라 편협해져버린 세계인식과 청의 이슬람 세계 인식 영향이 그 원인으로 생각된다. 이슬람 세계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화이관과 중화주의적 시각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화사상은 외국에 대한 시각을 편견에 멈추게 하였을 것이고, 이는 오늘날 한국인들의 이슬람포비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부였지만 서호수의 경우처럼 다양성을 인정하고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태도가 지금과 같은 국제화 시대에 필요해 보인다.
서울 한강에서 출발한 십이경은 서울이 아닌, 서울 한강이 아닌 밀양의 응천강에서 월연 이태의 월연대십이경에서 금시당 이광진의 금시당십이경을 거치면서 활짝 꽃피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응천강의 제일 승지 두 곳에 이미 영남루와 월연정이 위치한 그 사이의 좁은 공간에다 금시당을 절묘하게 앉히고, 영남루와 월연정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경관을 열어낸 금시당 이광진의 높은 안목을 통해, 밀양에 터 잡은 여주이씨 일문이 임진왜란 이전까지 향유하던 세련된 문화수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서울 한강에서 출발한 십이경은 조선전기 밀양의 응천강에서 이태의 월연대십이경과 이광진의 금시당십이경을 낳고, 조선후기로 가서는 밀양 전역으로 퍼져서 밀양의 낙동강에서는 낙강십이경[남수정십이경] 등을 낳으면서 화려하게 꽃피웠다고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최고의 누정문화가 서울, 서울의 한강이 아닌, 서울에서 천 리 멀리 떨어진 밀양, 밀양의 응천강과 낙동강에서 화려하게 꽃피웠다고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조 밀양 여주이씨 일문의 주도로 한양 도성의 최고 문화수준에 육박해갔을 밀양의 옛 모습을, 아름다웠을 그 옛 모습을 다시 한 번 그려보게 된다.
본고에서 다룰 『朝鮮通信總錄』은 일본의 문형을 담당했던 린케(林家)가 1607년 1차 정미사행부터 1763년 11차 계미사행까지 약 150년간 조선 통신사 파견에 관여하며 그간의 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자료집으로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正德辛卯聘使一件」은 1711년에 신묘사행이 파견되었을 당시 현장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무사들에게 전달된 에도 막부의 행정 지시서와 임시 법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시서에 따르면 에도 막부의 하급 무사들은 통신사를 비롯한 일반 백성들의 안전 및 질서 확보에 투입되는데, 혼잡한 현장에서 원활한 지위 체계를 구축하는 한편, 武家를 비롯한 상인과 백성들을 도와 통신사 행렬에 필요한 시설과 물자를 준비하고 백성들의 시민의식 배양에도 힘써야 했다. 지역의 정치 경제를 이끄는 武家 및 상인들 역시 이러한 노력에 발 맞춰 치안 안정과 도시 재생에 사재를 투입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은 광범위한 도시 환경 정비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거리 질서 유지에 필요한 수많은 규제 사항을 숙지하는 것으로 국가적인 행사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에도 사회의 노력은 당시 신묘사행 응대를 주도하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정돈되고 다듬어진 에도 사회, 즉 문명국으로서의 일면을 보여줌으로서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식 개선을 꾀하였던 것이다. 비록 의미있는 성과를 이끌어 내지는 못하였지만 신묘사행 응대라는 국가적인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이 18세기 에도 사회에 보다 성숙한 시민의식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본고는 16세기 관료 문인 成世昌의 文翰 활동에 대해 논한 글이다. 성세창은 15세기 말의 문장가 成俔의 아들로서, 특히 중종대에 각종 문한 요직을 역임하고 대제학에 임명되는 등 문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한 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6세기 문학에 대한 연구사적 무관심, 문집 不傳 등의 이유로 그간 학계에 존재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아 왔다. 이에 본고에서는 곳곳에 산재해 있는 그의 시문을 수습하고 여러 관련 기록을 살핌으로써, 당대 그가 전개하였던 문한 활동의 특징적인 국면을 짚어내고 그 문학사적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성세창의 문한 활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무엇보다도 당대의 유력 관료 문인으로서 보여주었던 그의 행보이다. 그는 홍문관·사가독서 등 젊은 시절부터 문한 관련 주요 경력을 두루 거치며 文才를 널리 인정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당시 이루어진 각종 관찬서 편찬 사업에 관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明 사신 접반, 『皇華集』 편찬 등 외교 국면에서 詞章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文章華國’의 가치를 스스로 실현하였으며, 인재 양성책 개진과 관료 문화의 확산 등을 통해 시대적 과업이었던 ‘文治 계승’의 기조를 이어 나가고자 하였다. 한편, 성세창은 儒風 진작을 위해 노력한 ‘士林’의 일원으로도 기억되었다. 이는 그가 金宏弼·李深源 등의 學人으로부터 수학하였으며, 趙光祖·金湜·金淨·李耔 같은 신진 사류들과 돈독한 교우 관계를 유지하며 학문·정치적 견해를 깊이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儒者’로서의 성세창의 면모는 鄭夢周 墓碣 陰記나 安珦 사당에 대한 記文, 李耔를 위한 추도시 등 실제 작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세창은 평생에 걸쳐 부친 성현의 시문 수습을 위해 노력한 ‘편찬자’로서의 면모 또한 보였다. 行狀 찬술, 『續東文選』 편찬 참여 등을 통해 士禍로 인해 묻힌 ‘文士’로서의 성현의 명성을 다시금 드러내고자 하였던 그는, 1525년에 『慵齋叢話』를 간행하고 1540년에 『虛白堂集』을 수습·편찬해 냄으로써 그 바람대로 부친의 이름을 문학사에 뚜렷이 새겨둘 수 있었다. 16세기 전반기에 펼쳐진 역동적인 정치·학문의 場 속에서, 성세창은 시대를 대표하는 官僚이자 儒者로서 다양한 방면의 문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남긴 문인으로서의 삶의 행적과 여러 작품들은 특정 어느 한 지점으로 수렴하여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점에서 중층적이고 입체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비단 성세창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에 활약했던 여러 관료 문인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중요한 특질이다. 이러한 본고의 논의를 통해 성세창이 차지하는 문학사적 비중에 대한 재인식은 물론, 16세기 문학 지형의 再構와 관련해서도 유의미한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영남의 관료이자 문인인 木齋 洪汝河(1621-1678)의 교유시를 중심으로 그의 교유 양상을 살피고자 하였다. 일생동안 많은 인물들과 교유하였는데 그 중 관료 문인들과 향리 사족들과의 교유시를 중심으로 고찰하였으며, 이를 통해 17세기 중·후반 목재와 동시대에 활동한 인물들을 드러내고 정치적으로, 지역적으로 당면한 현실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집중하였다. 이는 목재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된다. 목재는 문과에 급제해 정계에 진출했지만 당시 정계는 서인과의 정쟁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남인에 있던 그는 외직을 거치며 끝내 유배를 경험하였다. 그 과정에서 부침을 겪는 동료들과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동료들을 통해 자신도 위로받으며 현직 관료들과 꾸준히 관계를 맺으면서 현실참여의 의지를 보였다. 또한 지역에서 유력한 가문들과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는 스스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었고, 선대로부터 내려온 교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부친인 홍호의 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학파적 사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목재의 교유에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향리 사족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퇴계학 전수라는 큰 목표에 함께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목재의 한시 속 교유는 시의 창작 시기, 길지 않은 생애와 열악한 시대적 상황 때문인지 교유 범위는 그렇게 다채롭다고 할 수 없다. 주로 영남지역의 사족들이라는 사실은 그의 교유관계에도 나름의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는 당시의 정치 상황과 사회현실이 긴밀히 관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연적 사실도 그냥 넘기기에는 어려운 점이지만 목재가 교유한 인물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위상이 있는 인물들이며, 당색이나 학파적 사승을 뛰어넘어 교유한 사실 또한 분명하다. 소략하나마 이 글은 목재와 동시대 활동한 사족들과의 관계를 일정 부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목재의 삶을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