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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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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觀復菴 金崇謙(1682~1700)의 차운시의 내용적・형식적 특성을 알아보고 더불어 관복암의 차운시의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관복암은 조선후기 시인으로 어렸을 때부터 부친 農巖과 숙부 三淵으로 부터 시를 배웠다. 농암과 삼연뿐만 아니라 杜甫・尤庵 宋時烈・揖翠軒 朴誾 등 당대의 학자들을 배우며 그들의 시를 차운하였다. 觀復菴詩稿 에 나오는 차운시는 총 17題로 오언율시, 칠언절구, 칠언율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을 각각 원운시와 차운시의 내용을 비교분석하고 평측의 법칙을 어떤 식으로 적용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오언율시는 三淵 金昌翕의 시, 칠언율시는 簡齋 陳與義의 시, 칠언절구는 農巖 金昌協, 柳下 洪世泰의 시를 들여다보았는데, 이들의 시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관복암은 어려운 시어는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풍경이나 감정을 자신만의 느낌으로 잘 묘사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시가 도치 없이 차례로 번역되어 시를 처음 읽는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초학자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그 속에서 그만의 의경을 잘 지켜나가려고 노력하였다. 또, 형식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관복암은 나름대로 평측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학자의 학시 과정에 있어서 차운시는 유용하다. 시를 쓰는 방법이나 부친과 숙부로부터 시를 배워 활용한 것을 관복암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길지 않은 생애동안 자신만의 시적세계를 가지고 그 속에서 배움을 활용하여 실질적인 차운시에 적용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가 부친과 숙부의 시어를 가져다 썼으나 같은 의경이라고 해도 맛을 달리할 수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본고는 관복암의 차운시를 통해 평측의 법칙과 관복암의 차운시의 특징을 알아보는 데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차운시를 분석하고 글자를 놓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본고는 『朱子性理吟』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訓蒙書의 양상과 가족 내 아동교육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주자 성리학의 학습은 유가 경전 이해의 첫걸음으로, 가문 내에서 아동을 유가 지식인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동몽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몽서들은 그러한 목적에 의해 수입, 유전되었고 가문 내에서 초학교재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문장학습서에 비해 詩학습서는 상대적으로 크게 주목된 바 없다. 특히 시를 통해 주자 성리학의 핵심 개념을 익히는 초학교재의 존재는 거의 알려진 게 없었는데, 필자는 근래에 관련 자료를 발굴, 수집하고 조사를 진행하면서 예상외로 다양한 텍스트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초학교재로서 시학습서의 존재를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본고에서 주목한 주자성리음 은 선초부터 『訓蒙絶句』로 불리던 것으로 주자 편찬서 진위여부가 핵심으로 지적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진위 여부와 별개로 주자성리음 은 조선후기에 가정 내에서 아동 교육을 위한 텍스트로 소환되어 광범위하게 읽혔다. 그 이유는 주자 성리학의 핵심 개념을 漢詩의 절구 형식을 활용하여 학습하는 텍스트의 성격에서 기인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유로 주자성리음 의 존재는 조선후기에 가문 내에서 성리학의 개념을 함축적 시의 형식으로 이해하는 교재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이것과 유사한 형식의 『訓蒙詩』, 『訓蒙排韻』, 『牖蒙吟』, 『牖蒙詩編』 등 훈몽서 편찬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주자성리음 과 영향관계 속에서 편찬된 것이나 내용 수준에 있어서는 개별 층차가 발견된다. 이를 통해 본다면 한시훈몽서라는 아동교육 교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훈몽에만 목적을 둔 게 아니라 성리학의 기본 개념에 대한 접근과 이해를 용이하게 하여 修身교육과 문학양식교육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텍스트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성리학의 기본 개념을 한시로 서술하여 텍스트로 편찬하고 이를 교재로 활용하여 아동을 교육시키는 과정 속에서 父子로 대표되는 家族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사상 학습과 결속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차원에서 주자성리음 을 비롯한 유사 훈몽서의 존재는 초학을 위한 한시학습서라는 의미와 함께 성리학 기본 개념을 가족 공동체가 공유하고 이를 통해 수신과 교화의 매개체로 그 중요성이 환기될 수 있다. 본고는 추후 개인이나 가문 내에서 생산, 편찬된 훈몽서의 자료 현황에 대한 기초적 문헌조사를 보충해야 될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개인이나 가문 내에서 한시 형식을 통해 훈몽서를 편찬한 목적을 통시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작업과 관련된다. 이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보충해 나가고자 한다.
본고는 車天輅의 <伯夷死名說>이 儒家 이데올로기 안에서 ‘正名論’을 정통으로 받아들이면서도 莊子의 백이관을 수용하여 논의를 전개한 점에 착안하여 내용과 형식의 그 중층적 구조를 밝히면서 문체나 서술방식을 위주로 분석하였다. 車天輅의 <伯夷死名說>이 총 905자 중에 16개의 의문문 문장을 사용한 것은 司馬遷의 <伯夷列傳>이 총 788자 중에 13개의 의문문 문장을 사용한 경우와 비슷한 구성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伯夷死名’에 대한 반론을 전개해 나가는 서술방식으로 주로 反語 의문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莊子』나 『史記』 <伯夷列傳> 등과 상당한 유사성으로 보인다. 특히 본고는 <伯夷死名說>이 논지를 전개하는 데 매우 복합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고찰하였다. 즉, 형식면에서 전반적으로 의문문 문장을 바탕으로 한 서술방식을 취하고, 그 형식 위에 ‘名實’의 대명제 아래 莊子의 ‘伯夷死名’에 대한 반론으로 ‘대 논지, 소 논지, 논지의 부연, 논거, 논지를 강조하는 결론’의 구성을 취하는 서술방식에 이어 소 논지를 부연하는 반론을 연결한 후 다시 『莊子』의 구체적 편명을 수용한 재반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문장구조를 갖고 있다. 아울러 ‘伯夷死名’에 대한 반론으로서 車天輅의 <伯夷死名說>을 비롯하여 조선 중후기 趙纘韓, 權諰 등의 문인들은 ‘伯夷死名’에 관한 論說類 작품에서 모두 名實觀의 입장에서 논의를 전개하였고, 莊子의 사상을 소재로 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학의 자율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인의 경향이 나타나는 동시에 복고적 미의식이 풍미한 시대적 배경 아래에서 車天輅는 주자학적 사고 안의 사대부 문인으로서 ‘道’와 ‘文’의 일치를 더욱 세련되게 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도 우의적 방식으로써 중국 문헌을 적극 활용한 데서 작가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車天輅의 <伯夷死名說>은 莊子의 백이관을 수용하여 성리학적 名實觀을 주장하는 반론의 소재로 가져다 쓸 뿐 莊子의 백이관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車天輅가 당시 유행한 莊子를 소재로 삼으면서 莊子가 주장하는 ‘伯夷死名’을 반박하고 자신의 正名論을 전개하는 데 활용한 사례로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중층적이고 우의적인 성격을 띠는 문장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본고는 병와 이형상이 제주목사 시기에 있었던 무속철폐의 논리를 살핀 글이다. 제주에서 이형상은 무속의례를 철폐하고 제주풍속을 바꾼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형상은 ‘어떻게 기존의 무속의례를 깨뜨리고, 교화시키려했을까?’하는 것이 본고의 시작점이다. 이어서 제주 관련 지리지를 통해서 조선시대 제주의례를 정리하고, 음사에 관한 이형상의 인식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제주에 음사가 적지 않았고, 이에 대한 당시 관점이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어 본격적으로 이형상이 올린 장계를 중심으로 제주의례에 관련한 사항을 정리하였다. 이는 무속철폐의 논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형상의 장계는 ‘풍운뇌우단, 산천제, 삼성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풍운뇌우단은 이형상 재임기에 철폐되었다. 이형상은 국왕이 지내는 의례를 제주에서 진행되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예조에 품의한 후에 이를 철폐하였다. 산천제는 한라산신제에 관련한 사항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정에 향과 축문을 청하여 공식의례로 전환하였다. 삼성묘 건립은 제주시조와 직접 관련된 장소이기에 신중하게 접근하였다. 이형상은 모흥혈이 있는 곳에 삼성묘를 세우지 않고, 제주성안 옛 제주향교 터 옆에 삼성묘를 세웠다. 이는 무속의례가 행해지던 광양당을 벗어나 이 곳을 유교화 하려던 의도였다. 이형상의 제주지역 의례에 대한 제반조치에는 많은 반발이 있었다. 풍운뇌우단은 이형상이 떠난 후에 다시 공식의례로 복원되었다. 제주무속철폐에 대해 이형상 자신은 제주의 민폐를 없애준 것에 대한 지역사람들의 고마움으로 표현했지만, 민중들은 강제적인 조치로 인식하였다. 제주설화에서는 이형상의 조치에 대해 결국은 그의 아들이 죽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형상의 제주지역 의례정비 방향은 먼저 기존의례에서 어긋난 사항을 정리하고, 철폐할 것은 철폐하고 남겨야할 것은 국가 공식의례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음사를 철폐할 수 있는 논리와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형상은 이런 과정을 통해 무속에 젖은 제주풍속을 유교화 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제주문화에 있어 많은 부분이 유교화 된 측면은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제주 무속의례는 사라지지 않고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이 글은 주담 김성운의 가계와 생애를 통해, 그의 학문적・당파적 정체성과 아울러 18세기 초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김성운은 ‘남명학파 남인’으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남명학파적인 성향을 진하게 지니고 있었던 동시에, 숙종조 집권 서인에 대응하여 뚜렷한 남인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고조부 김대명으로부터 이어진 학파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대 덕천서원을 이끄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이는 정인홍 계열의 남명학파가 배제된 학파 내 지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는 침체된 남명학파를 부흥시키기 위해 이만부와 같이 저명한 외부 인사를 초빙하는 등 지역 내외의 인물들과 적극적으로 교유하였다. 남인으로서 그의 뚜렷한 행적은 『주담집』 속 그의 여행 기록에서 드러나는데, 이를 통해 당시 경상우도 유림의 동향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과거시험장에서 벌어진 사건 기록이나 관련한 자신의 논평을 통해, 숙종 조에 발생한 첨예한 사안을 받아들이는 유림의 태도와 김성운의 인물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경종 즉위 이후의 정국 동향도 여정 중에 관심을 기울여 기록하였다.
본고는 지금까지 학계에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凝窩 李源祚(1792~ 1871)의 『耽羅錄』을 대상으로 하여 『탐라록』을 저술하게 된 배경에 대해 간단하게 검토하고, 여기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그의 내면 의식을 파악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응와 이원조는 1792년(정조 16)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809년(순조 9) 18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다음, 1871년(고종 8) 세상을 떠날 때까지 관직에 종사하였던 19세기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관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에서 비껴 있던 출신 성분 때문에 내직보다는 주로 외직을 전전하였던 바, 1841년 1월 1일에는 가파도 인근 해상에 정박한 영국 배가 소란을 일으킨 일이 계기가 되어 제주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탐라록』은 그가 강릉 부사로 재직하면서 제주 목사로 전직을 명령받은 1841년(헌종 6) 1월 9일부터 제주 목사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 집에 도착한 1843년(헌종 8) 8월 27일까지 약 32개월 동안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을 날짜별로 정리하여 기록한 일종의 일기체 형식의 기록으로 『凝窩全集』 제4권에 필사본으로 전한다. 응와는 환해풍파 속에서도 글쓰기를 삶의 중요한 한 영역으로 실천하며 날마다 겪은 일과 감상을 그날그날 창작한 시문과 함께 첨부하였는가 하면 관직을 수행하면서 겪은 근무 경험과 그 가운데 짓게 된 공문까지 총 망라하여 『탐라록』을 편찬하였다. 이렇게 편찬된 『탐라록』은 지금까지 소개된 여타 제주 관련 기록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내용과 형식면에서 다채롭기 비할 데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제주의 이국적인 풍물과 미개한 풍속, 그리고 제주민의 삶의 현장을 서술하는데 지면을 아낌없이 할애하여 내면화된 관료로서의 소명 의식을 가감 없이 표출하였다. 다시 말해 『탐라록』은 새로운 풍물에 대한 호기심과 백성의 삶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그의 타고난 작가적 기질과 결부되어 만들어 낸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이런 점에서 『탐라록』은 응와의 제주에서의 행적은 물론 그의 삶과 문학을 한층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또 다른 하나의 창구가 될 것이며, 아울러 최근 국내외의 관광 명소로 주목받고 있는 제주의 조선 후기 지방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기여할 것이다.
본고의 목적은 청대에 『맹자』에 대한 평점주석서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과 소설 평점비평방법론과의 관계를 밝히며, 나아가 청대에 간행된 16종의 수사학적 『맹자』 주석서들을 개관하고 그 비평적 특징을 究明하는 것이다. 청대 수사학적 『맹자』 주석서는 문학비평의 한 방법론인 評點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평점비평은 남송대부터 유행하였지만, 경전 주석서에서 평점이 활용된 것은 명대 중기 이후인데, 당시 소설 평점비평의 유행이 경전 주석에 영향을 미친 결과이다. 다만 청대 수사학적 『맹자』 주석서는 맹자를 ‘化工’이라 하며 그 글쓰기 역량을 극도로 존숭한 반면, 명・청대의 소설 평점비평에서 작품 원문을 거침없이 개작하는 등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본고에서 고찰한 청대 수사학적 『맹자』 주석서의 비평적 특징은 첫째, 圈(◦)과 點(⎖) 등 다양한 부호를 사용하였다는 점, 둘째, 蘇洵과 魏禧, 그리고 姚永概 등 이전 주석가들의 문학비평을 인용・집설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두 특징은 청대에 들어 평점비평이 소설 분야뿐만이 아니라 경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그만큼 안착하고 성숙하였음을 방증한다. 경전에 대한 평점비평과 그 성숙은 서구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중국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본고에서 밝힌 전근대 중국에서 평점을 활용한 다수의 『맹자』 주석서가 존재・발전하였다는 사실은 ‘과연 평점비평이 소설 등 순문학만이 갖는 전유물이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한문학에서 評點 등 문장 비평을 논할 때 소설과 시에만 국한하지 않고 경전으로 논의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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