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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2018년 종교개혁 500주년 행사를 치른 한국 개신교회는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원리를 마음 깊숙이 새겨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자들, 특히 제1세대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개혁적인 설교자로서 중세 교회에서 평가절하 된 설교를 초대교회 예배전통에 따른 설교의 위치로 되돌려놓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설교의 위치를 격상시켰기 때문이다. 루터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이 물음에 루터의 개혁적인 설교와 그의 ‘탁상담화’에 나타난 ‘설교방법론’을 설교학의 3대 요소인 설교자의 인격, 성서 해석 그리고 커뮤니케이션과 연관해서 제시했다. 이와 같은 루터의 개혁적인 설교와 방법론은 시간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회의 설교자에게 매우 유익한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한국 개신교회의 ‘설교 갱신’을 위해 설교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설교 방향’을 추구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 ‘소명과 사명’에 투철한 설교자로서 생생한 복음(viva vox evangelii)을 전하라! 둘째, ‘그리스도 중심적-복음적인 말씀’을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영감’이 넘치도록 선포하라!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1:7)이 되는 세상, 바로 종말론적 기대가 현실이 되는 세상을 지혜의 목적이요 목표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선포는 바로 하나님의 질서와 원칙이 현실이 되는 사회를 향한 갈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잠언은 한편으로 권력과 억압, 주인과 노예라는 차가운 정치적, 경제적, 계급적 ‘현실’을 묘사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과율이 적용되는 세상을 ‘이상’이라고 가르친다. 잠언의 가장 중요한 논제 중 하나인 ‘가난과 부’는 ‘청빈’한 그리스도인이나 ‘깨끗한 부자’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과율이 적용되는 ‘종말론적 희망’을 설파하고 있음을 밝혀보고자 한다. 본 논문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가난과 부’라는 주제는 잠언에서 하나의 통일된, 일관성 있는 가르침으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 본 논문은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가난과 부’에 대한 잠언들을 ‘잠언-반잠언-종말론적 잠언’이라는 구조로 설명한다. 이 구조를 통하여 잠언은 일상의 현실이 이상적 가치관과 모순되는 것에 좌절하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라는 종말론적 희망 안에서 구현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문명의 관점에서 신의 지식을 탐구하는 전통적 사유는 근대의 여명에서 인간 지식의 본성과 그 가능성에 대한 질문으로 전환되었다. 근대는 신의 지식에 대한 관심을 넘어 인간의 지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조명하였다. 신의 지식은 지혜로 변모되고 인간의 지식은 세계를 조명하는 중요한 빛으로 격상된다. 포스트 휴먼 시대는 기계와 사물의 지능과 지성의 본성을 질문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이 연구는 인공지능의 도전 앞에서 신의 지혜와 인간 지능의 역사적 경로와 의미를 헤아린다. 전통적인 신학적 유산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인공, 인간, 지능, 지성, 영성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재해석을 가한다. 특히 앞으로 전개될 신의 지능과 사물의 지능의 관계, 그리고 미래 과제를 ‘자연의 신학’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포스트-휴먼’의 특성을 개괄하며 4차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제기되는 ‘과학 기술’과 ‘인간성’에 관한 문제를 윤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적 생체 진화가 아닌 기계화로 진화한 인간의 미래상에 대한 양가적 관점이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본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과학 기술에 대한 거시적 담론으로 ‘포스트-휴먼’에서 ‘포스트’(post)에 대한 찬반의 비판적 시각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강조하고자 한다. 둘째, 미시적 담론으로 ‘포스트-휴먼’을 4차 산업혁명과 연관지을 때 제기되는 과학 기술의 윤리적 사안들에 대하여 살펴보고, 셋째, ‘포스트-휴먼’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과제에 대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소위 포스트휴먼 시대, 인공지능 시대 혹은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소식이 우리 주변에 범람하고 있다. ‘포스트-휴먼’시대란 ‘인간-이후’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는 생물학적 인간의 ‘종말’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 기제에 기반한 인간이 인공지능과 네트워크 그리고 가상현실 증강 기술 등의 도움으로 새로운 디지털적 존재로 변모하고 있다는 자각을 의미한다. 이런 시대에 생물학적 개체로서의 인간 이해에 근거한 교육 과정, 그리고 그것에 근거한 지금의 교육 체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을 규정해 왔던 정의와 개념들이 ‘기계와 공생’하며, ‘연장된 정신’(extended mind)의 형태로 살아가는 포스트휴먼 시대에는 더 이상 인간에 대한 적절한 정의가 아닐 때, 우리의 교육은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따라서 다가오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가장 긴급하고 혁신적인 과제는 교육 혁명이 될 것이다. 근대적 주체의 해체 및 종말과 함께 등장한 포스트휴머니즘이 인간 중심적, 계몽주의적 휴머니즘 전통을 극복하려는 시도 중 하나라면,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간은 무엇이며,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우리가 여전히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은 무엇일까? 포스트휴머니즘이 ‘휴먼의 종말’이 아니라, ‘특정한 휴먼 개념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포스트휴먼 시대에 새롭게 주목받게 될 휴먼 개념은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 제기와 함께 본 논문에서는 근대적 휴머니즘을 넘어선 포스트휴먼의 현상들 속에서 주체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며, ‘타자(他者)의 주체성’과 ‘혼종성’을 계몽주의적 이원론과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을 넘어서는 포스트휴먼의 새로운 인간 조건으로서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디지털 데이터 사회에서 포스트휴먼을 위한 교육과 그 교육의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데이터 리터러시’(data literacy)와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를 제안하고자 한다. 포스트휴먼에게 필요한 것은 스마트 기기를 통해 생성되고 공유되는 데이터를 적절하게 활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생체리듬을 과도하게 폭로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한 마디로 ‘데이터 리터러시’를 기르고, 동시에 이 데이터 리터러시를 바탕으로 주어진 기술을 자신에게 맞게 ‘역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AI의 인식론적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그러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AI가 사회의 가치관과 세계관, 교육과 교육 현장을 지배하게 되는 AI 시대를 예측하며, 이 시대 기독교 교육의 의미 및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논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 데, 첫째, ‘AI 발달사’, 둘째, ‘AI 인식과 인간 인식론의 비교’, 셋째, ‘AI 시대의 기독교 교육’이다. AI는 세 가지의 물결이라고 칭해지는 발달사를 거쳐 왔는데, 현재는 두 번째 물결에서 세 번째 물결로 넘어가는 시점에 있다. “세 번째 물결 AI”의 완성은 ‘강 인공 지능’(Strong AI)이요 ‘일반적 인공 지능’(AGI)인데 이것은 인간과 똑같은 사고를 하고, 인간처럼 마음(mind)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는 인간의 인식과 AI의 인식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뇌 이론’, ‘몸을 통한 인식’, 그리고 ‘상황성’이라고 하는 세 가지의 관점에서 비교하였다. 그리고 본고는 인간의 사고를 모방하며 시작한 AI가 인간과 같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그대로 AI 인식론의 한계요 문제점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비통전적 사고”, “비인격적 사고”, 그리고 “비상황적 사고”로서, 극간의 “객관주의”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본고는 이러한 AI 인식론이 사회와 교육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통전성’, ‘인격성’, ‘관계성’을 지향하는 기독교 교육이 대안이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 논문은 아타나시오스의 두 저작들을 분석하여 360년대 전후에 교회 정치적-교리사적 상황을 파악하고 성령론의 정립 과정과 당면한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되짚어보며, “역설적 긴장 관계”라는 개념을 통해서 성령론의 한계 극복을 위한 새로운 해석의 틀을 마련하고자 한다. 첫번째 문헌은 359년에 작성된 Epistulae ad Serapionem 로서 트무이스의 감독 세라피온(Serapion von Thmuis)이 성령이 피조물이거나 기껏해야 천사에 불과하다는 성령의 신성 부정론자들(Pneumatomachen)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 총대 감독 아타나시오스에게 자문을 구한 것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되어있다. 두 번째 자료는 Tomus ad Antiochenos인데, 아타나시오스가 362년 2월 유배지에서 귀환한 후에 일련의 교회 회의가 열렸고, 특히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서 의결된 사항을 당시에 안티오케이아에 가 있던 5명의 감독들에게 안티오키아의 갈등을 다루는 일종의 지침서 역할을 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때 안티오케이아에서는 감독 파울리노스(Paulinos)는 휘포스타시스(hypostasis)가 하나라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보전하려 했고, 감독 멜레티오스(Meletios)는 성자는 아무래도 성부와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다르다는 논리적 귀결에 따라서 세 개의 휘포스타시스를 주장하고 있었다. 결국 하나님 단일성만 강조했던 사벨리오스주의가 아니라면, “호모우시오스”(본질적으로 같은)를 사용해도 되고, 삼위의 차별성에 집중했던 아리오스주의가 아니라면, “호모이우시오스”(본질적으로 유사한)도 허용된다고 결정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중립이나 양자 포용이 아니라, “역설적 긴장 관계”라는 개념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논지이다.
해석학적 놀이로서의 목회상담
해석학적 놀이로서의 목회상담
강진아(Jin A Kang),정연득(Youn Deuk Jeong)
신학사상 183집(2018년 겨울호)/ 2018
229-258 (30 pages)
인문학>기독교신학
초록보기
이 논문은 삶의 가치를 경제적 능력과 동일시하는 담론이 개인의 삶을 구성해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놀이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놀이마저 성과의 한 부분이 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몰두가 일어나는 참여로서의 놀이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목회상담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서 생기 있게 하나님의 형상을 살아낼 수 있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목회상담은 문제 해결이나 증상의 제거보다 놀 수 있는 상담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해석학적 놀이로서의 목회상담’을 통해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을 위해 먼저 놀이가 어떻게 해석의 과정이 되는지 가다머의 해석학적 놀이 이론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어서 해석학적 놀이가 이끌어가는 목회상담의 실천 방안을 가다머의 철학적 이해와 위니캇의 심리학적 이해를 통해 모색하였다. 목회상담의 공간에서 이해의 순환과 재창조가 일어나는 관계성은 놀이하는 사람처럼 자발적인 참여가 일어나 놀이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게 할 것이다. 따라서 해석학적 놀이로서의 목회상담은 해석의 공간에서 내담자들에게 노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위기 속에서 발생되는 해석의 과정에 열린 자세로 참여하는 것이 놀이하는 것이라는 제안을 시도하였다. 목회상담자들이 이러한 잠재적 공간을 이해하고 그 공간에 자신을 개방시키는 것은 내담자와 상담자 모두의 자아의 확장과 존재론적 변화, 즉 치유와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이 논문은 기독교 신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고찰한다. 통상 특정한 주제들을 다루는 예술 작품들만이 기독교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본고는 일군의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을 토대로 예술 자체에 내재한 신앙적 함의와 가능성을 조명한다. 즉, 물질을 매개로 감각에 작용하는 예술 작품들은 그 자체로 감상자에게 성육신과 창조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고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나아가 본고는, 기독교에서 이해하는 성령의 역할에 입각하여, 추상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시각 미술들이 가질 수 있는 신앙적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서예적 추상이라는 기법으로 그려진 서세옥의 그림들을 사례 삼아 추상적 예술이 성육신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강화하고 고취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전반적으로 본고는 진리를 비담화적인 방식으로 담아낼 수 있는 예술이 담화를 넘어 결국 존재와 양상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야 할 기독교 신자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세월호를 통과한 주체는 부재하는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그들이 세월호에서 만난 하나님은 전능하고 절대적 진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소외와 분열의 하나님이었다. 기표의 그물망에 의지하여 자신을 표상할 수밖에 없는 세월호의 주체는 소외되고 분열된 신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자 욕망하는 이 시대의 주체들이다. 그들은 그들을 둘러싼 지배 담론의 기표의 그물망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 치열한 담론투쟁을 벌임으로써 지배 담론이었던 안전, 죽음 담론을 저항 담론으로 변형, 재생산한다. 그 과정에서 세월호 유가족은 자신이 만난 대상 a로서의 신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새롭게 환상을 만들어가며 기나긴 투쟁의 삶을 지탱하고자 한다. 환상은 주체가 현실을 변형시켜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환상조차 철저히 깨어짐을 경험하면서 아들을 잃은 하나님의 환원할 수 없는 고통에 접근한다. 하나님의 고통과 철저히 버려짐의 고통 속의 예수, 자기 비움의 예수에 대한 동일시를 경험한다. 그리고 이들은 고통 속에서 위안을 만나며 신 자체이기도 한 사랑의 동질성으로서의 접점을 찾는다. 이 사랑의 접점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환원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끊임없는 질문과 절규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흔들리지 않게 버텨내는 향유의 길을 가게 만들었다. 이로써 주체와 신은 자기 비움의 공간을 채우고 또 비우는 연속선 위에서 끊임없이 변화되는 관계를 모색하게 된다.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사회적인 갈등이 나타나고 있는 우리 한국 사회가 한국의 신학에 가장 긴급하게 요청하는 것이 바로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사회를 조화롭게 통일시킬 대화적 합리성이다. 횡단적인 합리성으로서의 후기 토대주의는 바로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대화적 합리성을 장려하기에 보편적인 근대성과 상대적인 탈근대성의 감성을 비판적으로 중재해야만 하는 시대의 과제에 직면한 우리 한국의 기독교 신학이 반드시 적극적으로 수용해만 하는 합리성의 형식이다. 이 논문은 토대주의와 반토대주의를 비판적으로 중재하여 횡단적인 합리성을 구축하려는 웬츨 반 후이스틴(J. Wentzel van Huyssteen)의 후기 토대주의적 신학 방법론을 다각도로 분석함으로써 후기 토대주의적인 합리성이 우리 한국의 신학에 뿌리내리는 데 기여할 것이다.
미가 6장 4절은 전형적인 출애굽의 지도자 명단인 ‘모세와 아론’에 미리암을 포함시키는 유일한 성서 본문이다. 그러나 미리암의 리더십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증거가 되는 미가 6장 4절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고는 이례적으로 미리암을 부상시킨 본문에 대해 문헌비평을 통해 편집의 시대적 배경을 확인하고 미리암이 재부상 된 의미를 파악하고 그녀의 지도력에 대한 재구성을 시도한 연구이다. 미리암 본문이 속해 있는 6-7장은 주제, 문헌 구성과 형태를 볼 때 포로기 이후에 편집된 것이다. 포로기에 편집된 미가 6장 4절 이전에 미리암을 언급한 성서의 주요 본문으로는 출애굽기 15장 20-21절과 민수기 12장 1-15절이 있다. 전자는 고대의 시문으로서 미리암이 출애굽 당시여 선지자로서 지도력을 발휘했으며, 본래의 출애굽 전승을 담고 있음을 말해준다. 후자는 후대의 편집에 의해 미리암의 상(figure)이 왜곡되고 터부시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미리암이 공동체 안에서 충분한 권위를 지녔고 인정받는 지도자였음을 간파할 수 있다. 미가 6장 4절은 민수기의 편집 의도가 아닌 출애굽기의 고대 전승을 따라 미리암을 출애굽의 지도자 대열이 끼워 넣었다. 이는 왕권이 무너진 포로기 이후의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미가 6장 4절의 미리암은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제시한다. 먼저는 야훼가 행한 구원을 상기시키고 해방과 승리를 허락한 야훼를 신앙으로 고백하게 하는 차원에서였다. 미리암은 바로 구원자 야훼가 보낸 선지자이며 승리의 찬양을 인도한 자였다. 미가서의 포로기 편집 본문은 과거 신앙 고백의 차원을 넘어서 미래의 희망으로 출애굽을 재해석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리암의 춤과 노래는 새 출애굽의 소망을 더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리암의 재부상은 고통받는 포로기의 여성 공동체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백성들의 편에서 정의를 외치는 민중 선지자의 정신을 대변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미가서의 한 절을 단초로 미리암의 강력한 전승을 부각시키고 지도력을 재구성하는 데 통찰력을 제공했다.
갈라디아서 2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안디옥 사건-바울의 칭의론은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보여주는 훌륭한 자료들로서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어 왔다. 개별 단락의 중요성은 물론이거니와 연이어 배치된 세 개의 사건들이 주는 의미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켜왔다. 하지만 각 사건들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다소 부족했다고 판단된다. 이에 본 소고의 목적은 안디옥 사건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회의 그리고 바울의 칭의론이 갖는 의미상의 연관성을 주석 작업을 통하여 분석해 봄으로써, 이를 통해 바울이 자신의 논리를 어떻게 강화하고자 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두 개의 상반된 분위기가 예루살렘 회의와 안디옥 사건에서 각각 등장하게 되는데, 그 핵심 축은 갈라디아서 2장 5절과 14절에 등장하는 “복음의 진리”에 관한 문제였다. 2장 11-14절에 기록된 안디옥 사건에서 게바를 포함한 일행들이 ‘외식 행위’를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못한 일은 바울의 단호한 책망을 받게 되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모순된 행동은 곧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유대화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2장 1-10절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들은 바울과 그 일행들이 “복음의 진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는데, 이는 바울과 동행한 헬라인 디도에게도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바울에게 어떠한 의무도 부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드러나게 된다. 이는 바울 자신에게 있어서 매우 유용한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곧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 침투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 곧 적대자들의 선전 행위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동시에 갈라디아 교인들의 ‘배교 행위’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결과물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상의 배경에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더욱더 확고히 하기 위해, 예루살렘 회의와 안디옥 사건에 등장한 “복음의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자신의 칭의론(2:15-21)을 통해 응답하고자 하였다. 이는 곧 적대자들이 강요하는 율법의 행위가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됨의 새로운 공동체를 추구해야 한다는 바울의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었다(갈 3:28). 이러한 바울의 주장은 여전히 인종적인, 신분적인, 성별적인 경계 등으로 인한 수많은 차별과 배제 속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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