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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현실주의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라는 점에서 역설적 이면서 변증법적이다. 아마 그래서 패터슨 (Patterson) 이 니버에게 “현실 적인 낙관주의자” (realistic optimist) 라는 새로운 호칭을 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니버를 현실주의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니버가 인간의 본성을 죄를 짓기 쉬운 존재로서 현실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낙관주의적이었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와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으로서 창의성을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교리는 아니다. 인간 본성이 지닌 죄와 창의성을 동시에 중요시하면서 정치와 윤리 (도덕) 문제를 현실적으로 파악하려는 기독교적, 신학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 사상은 일찍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싹트기 시작하면서 기독 교적 시각에서 사회 전반의 문제들을 다루려는 운동으로 발전했다고 할수 있다. 그것이 더 깊은 내용을 지닌 것으로 진전하게 된 배경에는 유럽 에서 벌어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 미친 영향도 한몫했다. 두 번의 전쟁을 겪은 유럽과 미국에서, 신학자들의 국제 정치 문제와 전쟁에 대한 기독교 현실주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더해 갔다.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와 정치를 다룬 두 권의 책이,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략한 얼마 후, 1940 년대 초에 출판된 것은 단지 우연은 아니다. 니버는 미국의 국내 정치와 윤리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썼지만, 특히 독일, 이탈리아, 소련에 등장한 전체주의 세력의 팽창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미국만이 그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국가라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후에 미국의 유럽 전쟁 참전을 위해 교회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노력했다. 이 글에서는, 기독교 현실주의 사상에서 논의되는 몇 가지 논점들, 도덕 이원론, 기독교 시각에서의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비판, 구조에 대한 강조, 정의와 사랑, 전쟁과 평화, 죄와 타락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또 기독교 현실주의에 대한 중요한 비판으로 국제 정치학자들과 해방신 학의 비판을 간략히 다루었다.
이 글에서는 예수의 비유에 나타나는 개성화의 동기들을 찾아보고, 그것들이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 관점에서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보려고 하였다. 예수의 비유가 갖고 있는 역설적이고 힘 있는 차원이 어떻게 현실적, 정치적으로 설명되는지 보려고 하였다. 특히 예수의 비유에 나타나는 역설과 파격성의 요소들을 카를 융 (Carl Jung) 의 관점에서 통합적 으로 보고,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 의 기독교 현실주의 관점에서 비평해보려고 하였다. 전통적인 비유 해석은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비유에서 도덕적 메시지를 끌어내는 데 주력하였다. 예수는 선의 화신이 되고 비유의 메시지는 선악의 이원론 틀에 갇히게 되었다. 사회학적 해석들은 비유의 역설적이고 무의식적인 면을 무시하여 힘의 차원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새로운 해석은 선악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인간의 무의식, 그림자 속에서 역사 하는 은총을 드러내는 쪽에 중점을 둔다. 예수의 비유는 하나님의 자유와 은총을 드러낸다. 카를 융은 상징과 비유가 바로 이러한 역설, 비합리성, 초도덕성을 드러내며 인간의 모순을 통합하고 개성화하게 만든다고 본다. 라인홀드 니버도 상징과 비유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과 자유가 합리주의와 낙관적 역사관의 환상을 무너뜨린다고 본다. 비유의 역설과 종말론은 어떤 인간의 권력도 선한 것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요즘 기독교세가 약화되고 있다는 염려 속에서 여러 가지 처방들이 수없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이러한 것들 중에 본질적인 이슈인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과의 대화, 소통, 관계를 말하는 기도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근원적인 주제다. 기도와 행동에 대해 대표적 발언을 한 인물이 20세기의 최고의 영성 가로 인정받고 있는 토마스 머튼이다. 그는 수도원에서, 원자력이 힘을 얻는 과학 기술 시대의 정황 속에서, 기도 생활, 명상, 관상, 관상 생활 등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행동 세계 속에서의 관상” 이란 소논문 속에서 논의하였다. 이러한 머튼의 관상 사상은 그가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발전해갔다. 머튼은 수도원 생활과 저술을 통해 세상과 접촉하면서 관상가는 세상과 단절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점점 절감 했다. 머튼에게 있어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관상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신의 욕망이 반영된 환상 (illusion) 을 실재라고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된 실재에 대해 기도, 명상, 관상을 통한 관상 생활은 내재적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인격 성숙을 가져오게 한다. 이런 자신과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 하면서 세계관의 새로운 전망을 직면하면서 변화로 나아가게 된다. 이를 통해 나, 이웃, 만물,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호 연결된다. 그래서 머튼은 수도원이나 혼자서 기도 생활을 깊이 하는 사람들은 혼자만의 세계에서도 이타성을 유지하고 행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현대 인간의 하나님과의 합일에 대한 이런 영성적 욕구가 영혼 속에 깊이 뿌리 내려있음을 밝힌다.
창세기 37장 28절의 번역은 단어나 표현의 번역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문제다. 즉, 좁게는 창세기 37:18-36의 맥락 속에서, 넓게는 창세기 37-50장 전체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 본문들에 대한 해석의 방향에 따라서 28절의 번역도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7:28의 주어를 ‘그들이’로 한다면, 미디안 사람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이스마엘 사람들이 그를 애굽에 데려가서 보디발에게 팔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렇지만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에서처럼 주어를 ‘형들이’로 한다면, 르우벤이 구덩이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을 때 형제들이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MT에도 ‘형들이’라는 표현이 없다는 사실은, 주어를 ‘그들이’로 해야 한다는 것을 지지해 주고 있다. 요셉이 팔려간 사건을 기록한 창세기 37장 속에 두 가지의 자료층이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으며, 28절의 번역은 ‘형제들이’ 아니라, ‘그들 이’ (미디안 사람들) 이 요셉을 저수조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 마엘 사람들에게 판 것으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세분화된 주제에 대한 심오한 탐구는 아니다.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2017년에 국내에서 발간된 많은 글들과 학술 대회 에서 논의된 주제들 가운데 성서신학적인 논술이 의외로 많지 않아, ‘오직 믿음’으로 대변되는 칭의론의 문제를 일반적으로 다루고 문제점들만 나열하였다. 글의 첫 부분은 칭의론에 대한 연구사를 요약하였는데, 소위 ‘새 관점’으로 불리는 관점을 중점적으로 소개했고 한국 학자들의 관점도 덧붙 였다. 이어서 갈 2:11-21; 롬 3:21-4:25을 기본으로 하여 이방인 선교를 위한 칭의론의 콘텍스트, 유대 종교에 대한 바울의 관점, ‘디카이오스’ 의 용어적 문제, 칭의론의 주체, ‘피스티스 크리스투’, 그리고 하박국서 2 장 4절에 대한 적절한 해석의 문제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문제점을 제시 했다. 글의 성격상 결론은 새로운 대안이나 제시를 하지 않고 기존에 있는 기독교 신학의 전통들이 새로운 성서 해석과 주석을 근거로 새롭게 정리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것으로 그쳤다. 여기에 제기된 세분화된 문제들에 대한 학자들의 좋은 논문을 기대한다.
이 논문은 독일의 평화 통일을 위해 큰 기여를 함으로써 “평화 혁명” 이라 평가되는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 기도회와 평화 시위에 관한 것이다. 특히 성 니콜라이 교회에 시무하며 평화 기도회를 인도 했던 퓌러 목사의 자서전을 중심으로 한다. 필자는 그의 평화 기도회와 시위에서 중요한 신학적 성찰인 “평화” 모티브의 근거를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에게 평화와 생명의 영감을 준 성 니콜라이 교회 자체, 예수의 산상수훈 (마 5-7장) 과 구약 예언자 전통에 나타난 평화 사상을 살펴본다. 뿐만 아니라 분단된 동서독의 통일을 위해 서독의 정치가들과 교회의 노력들은 무엇이 있었는지도 고려해본다. 끝으로 이 연구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의 평화 기도회에 방법론적 으로, 신학적으로 기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평화 기도회의 과정과 제시된 기도 제목에 나타난 신학을 탐색해본다. 라이프치히의 퓌러 목사가 이끌어온 평화 기도회와 비교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실시하는 평화 기도회가 좀 더 보안할 점을 찾고,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 해야 할 한국 교회의 과제를 모색해본다.
본 연구는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Q복음서에 있는 가버나움 백부장의 이야기를 해석하여 그의 πίστις가 무엇이었는가를 규명하려고 했다. 일반적으로 백부장 이야기는 백부장이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졌 고, 그 믿음을 예수가 놀랍게 여기고 칭찬했다는 이야기로 파악된다. 심지어 백부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조차도 가지지 못한 예수의 권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예수 말씀에 대한 믿음의 본 혹은 “제자들의 믿음의 본”이 되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필자는 본 논문에서 이러한 통상 적인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안했다. 백부장의 진술은 로마-헤롯 안티파스 군대의 명령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예수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되고 왜곡된 이해이며, 심지어는 일종의 시험에 해당된다. 백부장의 잘못되고 왜곡된 고백에 대한 예수의 반응을 이해할때 예수의 국가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통상적으로 주님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해석되는 πίστις를 예수에 대한 ‘신앙’이라는 의미보다는 로마 제국의 군사적 권위 시스템에 대한 ‘충성’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백부장의 예수 ‘이해’나 ‘고백’에는 문제가 많았지만, 그의 ‘충성’은 예수의 국가관에 부합했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이 새겨들을 만했다. Q복음서의 백부장 이야기의 결말을 고려해야 한다. Q복음서의 백부장 이야기는 Q7:9에 있는 예수의 감탄으로 끝나고 예수가 치료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이는 일종의 열린 결말로서 Q의 백부장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할 단초를 준다.
이 논문의 목적은 요안네스 카시아누스의 인간 이해 속에 나타난 부와 탐욕에 대한 이해를 밝히는 것이다. 카시아누스의 수도 문헌인 『제도 집』과 『담화집』에 나타난 인간 이해는 주로 타락한 인간의 상황, 욕망의 기원과 유혹, 그리고 내적 욕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유 의지의 역할과 한계, 금욕적 수행 방식에 많은 관심을 둔다. 이러한 카시아누스의 인간 이해는 그의 스승들인 오리게네스와 에바그리오스 그리고 동시대 유명 교부들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유 의지의 지속성을 강조하면서도 욕망의 끈질긴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병든 인간 영혼’ 의 나약성을 깊이 고려한다. 따라서 그가 설명하는 여덟 가지 악 (욕망 혹은 내적 충동, concupiscentia) 중 하나인 탐욕에 관해서도 인간 영혼의 연약성으로 인해 온전히 극복 가능하기보다는 수도사들이 평생을 두고 싸워야 할 욕망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탐욕은 커다란 부뿐만 아니라 사소한 물건에도 항상 도사리고 있어서 ‘철저한 가난’을 통해서 모든 물건을 소유하는 일을 경계할 것을 갈리아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러한 이해는 그에게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4-5세기 동·서 로마 기독교 사상가들의 부, 탐욕 그리고 인간 이해에 비교되는 카시아누스 사상의 독특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강희남 목사의 민중 통일론에 관한 이 논문은 그의 관한 책 『한 목사의 삶과 사상』과 『민중주의』에 등장하는 강희남 목사의 통일론을 통해서 오늘의 분단된 한반도의 민족 모순과 기본 모순을 살펴보고 일제와 한국 전후사를 통한 분단의 원인과 지금까지의 통일 운동을 돌아보고자 하였 다. 강희남 목사는 역사와 통일의 주체는 민중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족이 고통과 고난을 당할 때마다 그 중심에 민중이 있었다. 일제 치하와 분단 이후의 독재 상황에서 생산의 주체인 민중이 사회의 중심에서 변두리와 주변으로 소외되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민중은 항상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새 역사의 거름과 새로운 씨앗이 되어 삶의 맥을 이어왔 다. 강희남 목사는 자신의 몸을 삶과 역사의 한복판에 던지며 민족의 분단과 그 속에서 울부짖는 민중의 삶과 동행하며 살았다. 심지어는 하나 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종교와 교회로부터 버려진 민중들의 삶을 보듬고 존재의 존재됨을 회복하기 위한 삶을 사신 것이다. 이러한 분단 모순과 사회의 계급 모순을 조장하고 지지하는 세력 중의 하나가 교회다. 교회는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기업과의 결탁을 통해서 자기의 탐욕을 채워간다. 이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과 역사적 예수의 삶과는 배치되는 비굴한 처사이며 그들과의 공생 하는 삶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본질이지만 사랑보다 정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과 정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심층 심리학자 카를 쿠스타프 융은 현대에 와서 신학과 심리학이 더이상 방법론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보며 기독교의 교리들에 대한 심리 학적 개정을 수행한다. 고전적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과도하게 영성화하고, 과도하게 남성화하고, 과도하게 단순화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악에 대한 물음을 발생시킨다. 특히 융이 그린 악의 구체적 얼굴은 삼중적이다: 물질, 여성, 악마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융의 신정론의 핵심은 고전적 삼위일체론에서 생략된 물질, 여성, 혹은 악마라는 넷째를 포함시켜 새로운 사위일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중세 연금술에서처럼 철학적 황금으로 상징되는 철학자들의 돌이 넷째로 포함될 때에, 우리는 성부-성자-성령-물질의 ‘연금술적 사위일체’를 가지게 된다. 성모승천설 교리에서처럼 여성성을 상징하는 마리아가 포함될 때에, 우리는 성부-성자-성령-성모의 ‘여성적 사위일체’를 가지게 된다. 심층 심리학에 서처럼 무의식의 그림자 혹은 어두운 하나님을 상징하는 악마가 포함될 때에, 우리는 성부-성자-성령-악마의 ‘심리적 사위일체’를 직면하게 된다. 이처럼 융의 사위일체 신정론은 선악미분의 성부, 그리스도와 악마로 분열된 이중적 인격, 그리고 더 발전된 통합으로서의 성령이라는 사위일체의 전개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지막 결론에서 우리는 신학과 형이상학을 심리학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인 융의 이른바 심리주의의 위험을 사제로서의 심리학자, 정신 건강법으로서의 신정론, 그리고 건강으 로서의 구원이라는 세 주제를 통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기독교인들이 성부-성자-성령 삼위 하나님을 향해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예배가 사회-정치-경제적 갈등과 억압의 관계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어떤 공동체적 관계를 실행 (performance) 하도록 하는가에 관해 탐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존재론적 관계 이해, 정치-사회학에서 제시하는 자유 평등주의와 대비되는 평등 공동체적 관계, 그리고 예배 언어 실행의 특징을 살펴 본다. 그리고 두 관계의 패러다임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 레시스 (perichoresis) 를 통한 공동체적 관계와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근본 적인 관계 개념인 음양 상징주의가 제시하는 두 공동체적 관계의 특징을 상호 비교를 통해 비평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의 관계 이해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음양 상징이 실행하는 관계 개념이 억압과 지배의 관계 이념으로 오용되었다는 역사 비평적 사유를 하도록 하고,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형성된 전통적 음양 상징이 제시하는 관계 이해를 더 창의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신학적 관점과 이를 통해 공동체의 관계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할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두 관계의 상호 비평적 이해를 통해 열리는 새로운 관계 이해의 지평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예배 안에서 조화로운 공동체적 관계로 자신의 신비를 드러내시며, 신앙-예배 공동체를 자신의 신비에 대응하는 조화 로운 공동체로 세워 가심을 밝히고자 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찬양이 라는 것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그 수단 중의 하나로서, 움직임 하나하 나에 의미가 내포된 “예수 찬양 댄스”를 실천함으로써 생활 가운데 연계 되어 추구되는 현장 교육의 한 모델이 됨과 동시에 기독교 문화 예술 발전에도 기여하고자 하였다. 기독교의 양적 증대와 문화 예술 분야의 질적인 성장에 필수불가결한 예수 찬양 활동을 통하여 여호와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에 정통 맥락을 부여한, 예수 찬양 댄스의 이론적 지식 시스템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기존에 필자가 개발하여 발표한 연구 이론들을 중심으로 예수 찬양 댄스에 대한 기독교 문화 예술 독창성에 의한 분석들을 기초로 하여 더 구체적이고도 심층적인 행태로 표출하였 다. 기독교 문화 예술에 있어서 예수 찬양 댄스 교육의 전문성, 맥락적 표준성, 교육자의 자질, 치유적 요소,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등의 측면에서 예수 찬양 댄스 교육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예수 찬양 댄스 교육’을 통한 기독교 문화 예술 활성화의 전략 및 효과는 교육적 훈련및 세미나, 상호 협력 기관 양성화, 교회 내에서의 활성화 효과 등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교회 밖에서의 활성화 효과, 지도자 모임 및 운영 방안, 선교 활성화 등을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분석·기술하였다. 국내 기독교 문화 활성화의 선결 과제에 있어서 주요 요소인 “예수 찬양 부흥”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하 면서 이 연구에 임한 결과 예수 찬양 댄스 교육은 기독교 문화와 예술의 실현이며 밝은 미래 지표로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살아계셔서 역사하 시는 주님의 사상들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에 생명의 근원이요, 이 땅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의 뜻과 사랑이 삶의 여러 측면에서, 우리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자리매김함은 물론 깊은 감동의 물결과 충만하신 은혜로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하나의 지표가 되어 더욱 진한 감동으로, 불신자들에게는 전도의 통로로 연계되어 지기를 희망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약 학자들은 마가복음 결말의 주제를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이러한 생각은 여자들의 침묵과 두려움으로 마무리되는 마가복음의 종결이 문법적으로 특이하며, 문체적·내용적으로는 갑작스럽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수백년간 많은 논쟁을 생산해 왔다. 그리고 결말의 핵심 인물인 세 여자는 예수의 부활 소식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전하지 않은 부정적인 인물로 해석 되어 왔다. 그러나 마가복음 결말에 해당하는 15장 40절에서 16장 8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세 여자이고 주요 사건과 서사 또한 세 여자를 중심 으로 전개되고 마무리 된다. 즉 마가복음 결말의 주제는 세 여자 이야기 이다. 마가복음 결말의 주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말의 사건과 메시지는 다르게 수용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마가복음의 결말에서 예수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부활 소식의 최초 전승자로 묘사되는 세 여자 들이 개인이 아닌 다른 여자들의 ‘집단’과 함께 소개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세 여자의 집단성에 대한 강조는 사복음서 중 마가복음에서만 두드러진다. 즉 마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세 여자 이야기’라는 주제를 통해 여자 제자 집단의 존재와 상황을 드러내고 마지막에 이르러 어떠한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본고는 이 여자 제자 집단이 처했던 상황과 행동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는 마가복음 15:40-16:4 를 연구의 범위로 삼는다. 그리고 이들의 핵심 인물인 세 여자에 대한 서술을 나머지 세 복음서의 병행 구절과 비교함으로써 이들이 처했던 상황과 여자 제자 집단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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