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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연구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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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明實錄에 언급된 노량해전 전황 기록의 제반 사항을 분석한 것이다. 노량해전은 1598년(선조 31)에 조선 李舜臣과 명 陳璘이 거느린 조명연합수군이 노량 앞바다에서 대규모 일본함대와 맞이하여 대첩을 거둔 전투이다. 명실록은 명 조정이 국가차원에서 작성된 중대한 역사 사료이다. 이 책자에 언급된 노량해전 기록은 명 조정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아보는데 사료 가치가 높다. 명실록 중 군문 邢玠가 올린 첩문에 적힌 노량해전에 참전한 일본함대의 규모는 6~700척이다. 經略御倭奏議 「獻俘疏」에서 선봉대로 나선 島津義弘, 鴨南臬, 宗義智 등 함대의 척수가 440척이고, 또뒤따르던 후발대가 부지기수이라고 했다. 선발대의 소속과 척수를 구체적으로 열거한 점으로 보아 명실록 기록은 최소한 형개가 명군의 전공을 드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시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또 명실록 기록에 참획한 일본군의 수급이 300급이라고 했다. 이 숫자는 타 문헌에 기술된 참획 숫자와 얼추 비슷하게 들어맞는다. 또 명실록에 일본장수 島津義弘을 살해했거나 豊臣正成을 생포 했다고 한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일본장수 살해설과 생포설은 전장 일선에 있던 명 진린이 자신의 전공을 드높이고자 한 심리 작용이 주효했다. 노량해전에서 거둔 전과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사실인양 둔갑시켜 명 군부에 보고했다. 당시 조선에 파병된 명 장수들은 자신들의 전공을 높여 보고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형개는 전장 일선에서 올린 보고를 제대로 된 검증 없이 보고 그대로 명 조정에다 상주했다. 이후 명 조정은 계속 잘못된 내용을 사실로 믿고 있었다. 비록 형개가 자신의 전공을 위해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니지만, 부하들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해 실상이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시기 전투 중 가장 큰 전과를 거둔 전투이며 이순신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치른 다른 해전과 전장 환경이 크게 다른 해전임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검토를 하였다. 아울러 노량해전의 결과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며, 당대 조정에서는 어떻게 평가했는가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우선 노량해전의 승리 요인을 크게 4가지 관점에서 분석해 보았 다. 첫째는 전선과 무기체계의 우수성이다. 특히 조선의 전선이 우수한 점은 재론할 여지가 없지만 노량해전에서는 명 수군의 전선도 크게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는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이다. 노량수로 좌단의 풍상 쪽에 위치하여 바람을 등진 채 화공전을 수행한 것은 해전 승리의 단초가 되었다. 이어서 전투 중반 이후 관음포에 적선을 몰아넣은 것도 조선 수군이 보유한 화포의 명중률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는 조명연합작전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4개월간 이순 신과 함께 지낸 명 수군 도독 진린과 휘하 장졸들도 이순신의 뛰어난 인품과 능력에 매료되어 작전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넷째는 수군 장졸들의 적극적인 참전이다. 장졸들 개개인의 사생 관과 능력에 기인한 전투의지가 실제 전투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노량해전의 승리는 여러 가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노량해전은 조명연합작전 중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해전이었으며, 명나라 수군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아울러 조선 수군의 막강한 전력이 해외에 전파되는 효과를 주었으며, 무엇보다도이 해전의 승리로 전쟁의 상흔에 망연자실해 있던 조선 백성들에게 큰위안을 주었을 것이다. 노량해전의 승리와 이순신의 전사는 당대 조선 조정과 명군 지휘 부에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능력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크게 기여하였다. 노량해전의 결과는 수군이 전란 극복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이끌어 내었다.
유교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이순신은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有生必有死] 운명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은 하늘이 좌우한다는 운명관의 소유자였다. 그는 유교의 가르침대로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거나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로운 삶 그리고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현실 중심적 삶이야말로 사람에게 가장 가치있는 삶이라고 여겼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순국 이후, 그의 죽음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그 중 하나가 이순신의 자살설이다. 그런데 이순신의 자살설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이순신의 평소의 사생관과 행적에 기초한 비판이다. 이순신의 자살 설은 대부분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역모에 희생될 것을 두려워 한 이순신 장군이 고의로 전사를 가장하여 자살함으로써 무장 으로서의 영예를 지키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는 운명관을 지니고, 정의로운 삶을 살았던 이순 신의 평소 행적에 비추어 보면 전혀 앞 뒤가 맞지 않는다. 또한 이순신의 평소 사생관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는 결코 죽음이 두려워 전사를 가장한 자살을 택할 사람이 아니다. 이순신 자살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 결함이다. 둘째는 <이순신은 전사하였다>고 기록한 자료와 <이순신은 자살 하였다>라고 기록한 자료의 신뢰도 비교에 기초한 비판이다. <이순신이 전사하였다>고 언급한 대표적인 자료는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 정유재란 시기를 보냈던 안방준의 「노량기사(露梁記事)」(1645)이다. 이 글은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전사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쓴 것으로 이순신 장군이 조총을 맞는 과정, 갑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이 자살하였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자료는 이순신 사후 35년 뒤에 태어난 이민서의 「김장군전(金將軍傳)」이다. 이민서는 이 글에서 “이순신은 전투가 벌어지자 갑주(甲冑)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다(李舜臣, 方戰免冑, 自中丸以死)”라고 하여 이순신 장군이 일부러 투구와 갑옷을 벗고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서술 하였다. 이른바 이순신 자살설의 원조이다. 그러나 이민서는 이를 뒷받침할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또한 「김장군전(金將軍傳)」은 개인의 전기물이므로 역사적 사실 문제를 다루는 사료로 채택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이순신의 전사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안방준의 「노량기사」가 신뢰가 가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의 순국은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첫째는 무장 이순신의 무한 책임의식의 발로요, 둘째는 개인적인 희망사항이 었으며, 셋째는 하늘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순국은 일본군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죄책감을 지니고 살았던 무장 이순신의 ① 무한 책임의식과 마지막 전투에서 순국할 수 있기를 바랐던 ② 개인적 희망 사항 그리고 더 이상 그를 보호해 주지 않은 ③ 하늘의 뜻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의 순국은 무장 이순신 스스로에게는 가장 영광스런 죽음이요, 우리 후손 들에게는 가장 교훈적인 죽음이었다. 더 이상 이순신의 죽음을 자살이 라고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 글은 임진왜란기 이원익과 이순신의 인연과 우의를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이원익의 생애와 이순신과의 인연, 어전회 의·상소를 통한 이원익의 이순신 옹호, 이순신 백의종군기 이원익의 충언과 제의를 살펴본 후 결론을 도출해 본 것이다. 이원익은 유성룡 못지않게 임진왜란 기간을 통해 이순신을 지지·옹호한 사람이었다. 이순신은 해전사적으로 승전기록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함은 물론 문무덕을 겸전한 숭고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조국에 대한 지극한 충성심과 탁월한 통솔력·리더십을 발휘한 점에서 우리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이순신은 일생동안 구국정신으로 국가에 몸과 마음을 바친 위대한 군인이자 성웅이었다. 이원익은 그의 뛰어난 실무적 경륜과 위기관리능력, 강직한 원칙과 포용성을 겸전한 리더십으로 임진왜란 등 국난극복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나라사랑을 항상 먼저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이원익은 그러한 인물이었기에 이순신을 알아보았고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적극 옹호할 수 있었다. 이순신과 이원익의 돈독한 신뢰와 우의와 탁월한 능력들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특히 정유재란이후 해전에서의 승리로 전란을 마무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임진왜란 시기 무장으로 활동한 신여량의 행적을 문헌과 유품을 토대로 재구성한 글이다. 그간 신여량은 임진왜란 시기 삼도수 군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경상우수영 수군 우후로 활동하였고, 임진년 초기 해전에서 거북선장으로 전공을 세운 것으로 소개되었다. 그가 남긴 유품도 이순신과 함께 싸운 전투에서 승리하여 받은 교서, 유서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난중잡록과 여지도서, 호남 절의록에서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헌에 기록된 신여량의 행적은 그가 남긴 유품 4점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상이한 부분이 있음을 알 수있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이러한 신여량에 관한 기록을 추적하였고, 임진왜란 시기 해전에 관한 당대의 기록물인 『임진장초, 『난중일기와 비교·검토하였다. 그의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지만, 그가 남긴 유품의 상관성을 정리하여 행적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그의 유품이 행적을 고증해 주는 학술적 자료였음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연구로 임란시기 무장으로 활동한 신여량의 행적을 재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그가 남긴 유품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임란기 인물사 연구의 문제점은 전란기에 남겨진 1차 문헌으로는 개인의 행적을 제대로 추적할 수 없다는 점과 임란 이후 공신책봉 과정과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후대에 과장되게 기술된 자료 때문에 실재적인 사실에 접근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호남지역 인물사 기술은 특히 호남절의록의 발간 이후 왜곡과 과장된 흔적이 강한데 신여량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호남절의록 기록의 근원을 추적하여 보니, 난중잡록에 서는 신여량의 생전의 활동상을 기록하였고, 여지도서와 호남절의 록은 그가 남긴 유품을 바탕으로 그의 행적을 추가로 정리하였으며, 사후의 추증까지 기록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기존 자료들에서 역사적 사실과 다른 면이 심각하고 기술하는 자료들마다 내용도 또한 다르므로 신여량 행적을 정확하게 드러내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전남 완도군이 ‘묘당도 이충무공유적 기념사업 추진’ 계획을 2016 년에 수립하여 2020년 완공 목표로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에는 고금도 충무사를 중심으로 이순신 동상과 기념관을 건립하는 동시에 70년 전에 없어진 ‘관왕묘(關王廟)’ 복원도 포함되어있다. 한반도의 관왕묘 역사는 1598년 정유재란 때 명(明) 장수들이 서울과 지방에 사당을 짓고 배향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관우 숭배에 대한 인식이 소극적이었으나, 숙종(r.1674-1720) 이후 임금들이 자발적으로 제향하면서 중국의 역대 왕조처럼 정치적인 목적으로 관우신앙이 수용되었다. 고금도 관왕묘는 1598년에 도독 진린(陳璘)이 설립하여 1940년대 초까지 약 340년간 존속해 오다가 일제에 의해 철폐되고 옥천사로 사용되었다. 이 사찰은 1953년에 이순신을 배향하는 충무사(忠武祠)로 개편되어 ‘고금도관왕묘비(古今島關王廟碑,1723)’만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있다. 완도군이 추진하고 있는 고금도 관왕묘를 복원하기 전에, 관왕묘와 관우신앙의 연원(淵源)이 포괄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약 1700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관우신앙과 정유재란 때 유입된 한반도 관왕묘의 역사, 그리고 고금도 관왕묘의 연혁을 요약해 보는 것이 선행 작업 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고금도 관왕묘를 복원하는 의의와 전망을 검토해 볼 것이다. 고금도 관왕묘의 복원은 정확한 고증과 면밀한 계획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완공 후 원만하게 운용할 방안이 수립되어야 한다.
고려 말 이래 왜구의 침략이 잦아지자 조선 초기부터 왜구토벌을 위한 수군체제의 정비가 한층 강화되었다. 수군조직을 재편하는 등 수군에 대한 제반 국방책의 추진과 함께 군수품과 병선을 점고하고, 바다에서 진치고 전투하는 법을 조련하는 군사점고 및 수군조련 또한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육군의 지역방어전략인 진관체제를 수군에 적용시킴으로써 각 지역별로 왜적에 대응하는 연해안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수군 승리는 이러한 진관체제 및 주사도 분군제도와 성진법에 의한 오랜 수군훈련의 바탕과 이를 기동성 있게 적절히 운용한 이충무공의 탁월한 지휘력에서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 다. 그 후 삼도수군통제사의 통합지휘체제와 함께, 임란 직후 통제영을 현 통영시 지역으로 이진함으로서 영문의 번영과 함께 군점수조 또한 보다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조선후기 통제영의 군점수조는 통제사의 가장 대표적 군무 가운데 하나로서 수군운영의 핵심을 이루었 으며, 남해안 관방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 및 군영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군점수조 때에는 예하 장령들의 전투능력 평가와 이를 심사하여 포상과 죄를 내리는 사공죄(査功罪)를 시행했다. 그리고 수조 후에는 시사(試射)를 행하여 군사들의 사기진작과 연무를 장려하고 인재를 뽑았으며, 군사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호궤(犒饋)를 거행하여 위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 수군의 군점수조는 봄에 통제영의 본영 앞바 다에서 합조로 거행하는 춘조와 그리고 가을에 각 수영별로 그 앞바다 에서 거행하는 추조로 나누어 매년 봄가을 2회 시행되었다. 이러한 통제영 군점수조는 앞으로 이순신을 주제로 하는 각 지역 축제에서 보다 현장성 있는 문화콘텐츠로 활용되는 방안이 모색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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