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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연구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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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임진왜란 수군사 연구는 이순신의 판단과 능력에 의존하여 수군이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한 나라의 무력단체인 수군을 운용하는 것은 조정의 수군정책에 따라 운용되었다. 본고에서는 임진왜란 중 조선의 수군정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 이라한 조정의 방침에 대해 이순신은 어떻게 반응하면서 수군을 운용했는지 알아보았다. 임진왜란 초기 남쪽의 수사들은 나름의 대적 수군활동을 전개하여 성과를 보았다. 조선 조정에서도 수시로 공문을 시달하여 행동지침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의 주도하에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 4차례의 출전으로 전승을 거두어 해상에서의 일본군의 보급지원을 철저히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다. 초기의 불리했던 전황은 명나라 군의 참전에 의해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조선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조정에서는 일본군이 남하하는 것을 기회로 수군으로 하여금 해상 퇴로를 차단하여 복수하도록 지사하였다. 이에 따라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부산 쪽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593년 9월부터 삼도수군이 한산도에 주둔한 가운데 일본군의 견내량 침입을 막는 형태로 수군이 운용되었다. 이 시기 이순신은 전력증강 계획을 세워 추진해 나갔지만, 1593년 하반가부터 시작된 흉년과 전염병으로 수군병력의 손실이 극심해져 계획 달성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 강화교섭시기 내내 조선은 수군을 거제도 쪽에 진출시키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지 않아서 모든 방책들이 무산되었다. 일본군들이 강화 교섭 시기에 철수를 신속하게 단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난관에도 이순신은 나름의 수군전력 재정비를 위한 노력을 힘겹게 추진해 나갔다. 결국 강화교섭은 결렬됨으로써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였다. 먼저 수군진에 대한 통폐합을 단행하였다. 거북선을 많이 만들도록 하였다. 수군병력을 확충하기 위해 천민들도 수군에 전속시키도록 하였다. 일본군의 전술이 야간 기습작전임을 알고 이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한편으로 조선 수군을 거제도에 전진 배치하고자 했지만, 수군 병력의 부족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결국 강화교섭 시기 초반에 입은 자연재해로 인한 수군 병력의 손실은 이후의 수군 운용의 발목을 잡는 근본 요인이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정유재란이 벌어질 때까지도 복원되지 못했다. 이는 당시 조선 조정과 수군이 처한 한계였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해전에서 차지했던 위상이 컸던만큼, 이순산 위주로 임진왜란 해전 전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해전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디까지가 조선 수군의 일반적 전술이고, 어디부터가 이순신 개인의 전술인지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접촉식 충격 전술 혹은 충돌(Ramming) 전술을 적극적으로 운용했다고 볼만한 사료적 근거는 없다. 또한 현존 사료만으로 보자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이나 판옥선에 충각 혹은 그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장치가 장비되어 있었다고 분명하게 결론 내릴만한 사료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임진장초(壬辰狀草) 』 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당파(撞破)’의 경우, 전체 문장의 맥락을 보면 화약무기를 이용하여 적선을 격파했다는 포괄적 의미의 용어로 보인다. 다시 말해 당파는 충돌 전술과는 관련이 없다. 조선 수군이 등선백병전에 적극적이었다고 볼만한 사료적 근거도 없다. 조선 수군이 당포와 한산도 등에서 왜장이나 왜병의 목을 벤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구체적인 상황 묘사가 나오는 사례를 보면 활이나 화약무기로 제압한 후 바다에 떨어진 왜적의 목을 베었디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적의 수급 획득과 등선백병전은 무관한 것이 분명하다. 수급획득, 아국 피로인 구출, 노획품 획득 등을 목적으로 적선에 올라간 경우는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적을 완전 제압한 후 전장 정리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등선백병전과 연계해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물론 왜군들이 등선백병전을 시도했을 때 조선 수군이 장창 등으로 방어한 사례는 있으나 하나의 공세적 운용방식으로 적선을 상대로 등선백병전을 시도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에는 활 운용, 화약무기 운용과 관련된 직책은 있으나 칼이나 창 같은 단병무기를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병력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육상의 적을 추적할 때도 원래는 활을 운용하는 사부 등을 운용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손으로 들고 쏘는 승자총통류부터 바닥에 거치하고 쏘는 천·지·현·황지총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총통을 운용했다. 여기에 육상의 적을 상대할 때는 완구에서 비격진천뢰를 운용한 사례도 있다. 상대적으로 적과 근접했을 때는 질려포, 대발화 등 투척식 화약무기도 사용했다. 거북선의 경우 총통을 6∼10m(3∼5間) 거리에서 사격했다. 이 같은 초근거리 근접사격은 당시 화약무기의 낮은 명중률을 보완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수군은 이와 함께 총통에 여러 발의 철환을 장전하여 사격하는 다발식(多發式) 장방법(裝放法)을 사용했다. 총통의 명문을 통해서 볼 때 승자총통의 경우 늦어도 1580년대부터 이 같은 다발식장을 사용했으며, 「임란첩보서목(壬亂捷報書目)」을 통해서 볼 때 현자총통처럼 바닥에 거치하고 쏘는 중·대형 총통의 경우에도 늦어도 임진왜란 중에는 이 같은 다발식 장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다발식 장방법을 이용한 화약무기 운용 전술은 소형탄환을 여러 발 사용한다는 점에서 대인(對人) 공격에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동시에 점표적인 아니라 일정 면적에 소형 탄환을 산포한다든 점에서 일종의 탄막사격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당시 화약무기의 낮은 명중률을 보완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 수군은 대체로 폭발력이 없는 고체탄(solid projectile)을 주로 사용했다. 이 같은 제한사항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은 화전(火箭)을 이용한 화공술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전체적으로 당시 총통은 장전에 많은 시간이 소모되고, 해상 운용에서는 선체의 흔들림 등으로 명중률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 같은 제한사항을 극복하기 위해 사부(射夫)를 판옥선에 탑승시켜 지속적으로 활을 화약무기와 함께 병행 운용하였다. 이 같은 임진왜란시기 수군 무기 운용 전술의 상당 부분은 이미 임진왜란 이전에 출현하였다. 이순신의 전술 중 무기 운용상의 주요 특징은 그 같은 조선 수군 전술발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후기 무반들은 가계를 세습하면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해 간다. 가문 내에서는 물론 혼인관계를 통해서도 무반직을 세습하면서 후기로 갈수록 특정 정파와 밀접하게 연계되면서 하나의 정권기반이 되어 갔는데 이러한 변화는 무반을 더욱 성장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후기 무반가문의 세습에 관해서는 연이은 과거 급제, 혼맥, 전란과 변란을 통한 공신책봉 등 여러 형태로 계승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다양하게 나타나는 무반가문 세습의 사례 중에서 특정인물 배출 이후에 후손들이 무반을 계승하여 성장 발전한 성씨로써 가장 대표적인 모습을 보이는 덕수이씨 충무공파의가계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현재까지도 조선시대 최고의 명장으로 알려진 인물인 충무공 이순신 이후 후손들이 무반직을 계승하여 지속적으로 관직에 나아감은 물론 공신의 후예라는 점에서 끊임없는 비호와 예우를 받으면서 조선말기까지 가문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여러 사료를 통해 확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사당과 정려 건립, 문집 발간 등을 통해 선조 추숭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향촌세력에서 기반을 다지고 있는지 살펴 보고자 하였다. 이에 덕수이씨 충무공파 가문이 조선후기에 점차 확고한 기반을 다지면서 명실상부한 무반 가문으로 자리잡게 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18세기 말부터 빈번해진 서양 선박의 출몰과 개항요구, 그리고 러시아와의 충돌 등으로 일본의 대외적인 위기의식은 한껏 고조된다. 이 시기 일본에서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집팔·간행된 두 권의 한문서적, 가와구치 조주(川口長孺)의 『정한위략(征韓偉略) 』과 라이 산요(頼山陽)의 『일본외사(日本外史)』는, 이순신(李舜臣)에 대한 평가 측면에서 이전까지 일본에 존재하던 임진왜란 관련 문헌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보인다. 에도 시대의 상업출판물들이 이순신의 활약상을 서술함에 있어 과장의 방법을 사용하였다면, 이들은 이순신을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다만 저명(著名)에서도 드러나 듯이 임진왜란을 ‘정한위업’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정한위략』의 경우 명백히 의도적으로 조선군의 공적은 물론 이순신의 활약도 축소시키고, 일본군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19세기의 역사서로서 『정한위략』보다 통속적인 이야기를 비교적 많이 수록하고 있는 『일본외사』의 경우, 『정한위략』보다 그 사료 검토의 엄밀성은 떨어진다고 할 수 있으나, 이순신을 기록하는 데에 있어 비교적 객관적이었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이 거둔 육·해상 최초의 승전이다.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에서 일본의 함선 30여 척 가운데 26척을 격파하였으며, 수많은 인원을 살상하였다. 반면에 조선의 함선은 단 한 척도 격파되지 않았으며, 사상자도 경미한 부상자 1명뿐이었다. 완전한 승리였다. 옥포해전의 승리의 요인은 무엇일까? 그 첫째는 조선 수군의 질적인 전투력이 일본 수군을 압도하였다는 것이요. 둘째는 함선의 척수 측면에서도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운 탁월한 리더 이순신의 역량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이순신 장군이 치른 거의 모든 해전의 공통된 승리 요인이다. 아울러 옥포해전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육전(陸戰)과 해전(海戰)을 통틀은 최초의 승리였다는 점에서 조선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해전이었다. 둘째, 질적 전투력 측면에서 <조선수군이 일본 수군을 압도하였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준 해전이다. 셋째, 임진왜란 발발 이래 최초로 함대(艦隊) 급(級) 규모 이상의 통합 함대가 치른 해전으로 이후 조선 수군의 함대 운용의 표준을 제공한 해전이다. 넷째, 먼저 적을 발견하고 추격 -> 격파하는 이순신의 ‘공세의 원칙’ 이 처음으로 선을 보인 해전이다. 다섯째, 첨단 화약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결합시킨 조선 수군의 당파(撞破)·분멸(焚滅) 전술을 처음으로 정형화된 형태로 선 보인 해전이다. 여섯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수군의 존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조선 침략 전략을 수립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해 준 최초의 해전이다. 일곱째, <바다로 쳐들어오는 적은 해전[水戰]으로 막아야 한다>는 이순신의 ‘어적수전(禦敵水戰)’의 전략적 사고가 확고하게 정립되는 계기가 된 해전이다. 결론적으로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육전과 해전을 통틀은 최초의 승리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조선 수군의 경쟁력의 실체와 탁월한 리더 이순신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역사적 해전이었다.
임진왜란 시기 수군은 1592년 전쟁 첫 해에 4회의 출전과 10여 차례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하며 조선이 국란을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부산포해전은 그 마지막 해전으로서 일본의 수군 근거지를 직접 공략하며 큰 승리 를 거두었다. 앞서 펼쳐진 1∼3차 해전은 부산포해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1592년 5월 4일부터 9일까지 진행된 제1차 출전에서 조선수군은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을 통해 일본 군선 44척을 격파하며 시작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이어서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이어진 제2차 출전에서도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 등에서 모두 승리하며 72척의 일본 군션을 격파하였다. 제3차 출전은 일본의 중앙(주력) 수군과 조선 통합함대간의 대결이었다. 7월 6일 펼쳐진 한산대첩은 이순선 등이 이끈 조선 통합함대가 유인작전과 학익진 전술을 통해 대소 73척 중에 59척을 격파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장악했고, 일본은 해전을 회피하는 소극적인 전술로 바뀌었다. 제4차 출전의 부산포해전은 일본 수군의 근거지를 직접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때문에 기존 세 차례 출전 때보다 크게 증강된 전선 85척 내외의 전력을 준비해서 해전에 임했다. 그리고 전라우도 수군은 출전 20여 일전에 좌수영에 모여 합동 훈련을 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갖추었다. 8월 29일과 9월 1일 해전 당일 장림포와 화준구미부터 절영도를 통과해 부산포에 도착할 때까지 5곳에서 30여 척을 격파했고, 오후 늦게 시작된 부산포의 해전에서도 1백여 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글에서는 지도를 통해 대략적인 일본 수군의 정박처를 추정해 보았고, 해전 당일 조류가 조선 수군이 정박한 일본 수군을 공격하기에 알맞은 상태였음을 확인하였다.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 세력을 모두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첫 해 해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과 일본의 병참 근거지를 직접 공격해서 타격을 입힌 것은 부산포해전의 중요한 역사적 의의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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