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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연구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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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 조선의 군사체제 정비에 많은 역할을 한 李雲龍의 전쟁 전후 활약과 국방체제 정비 노력에 대해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운룡은 임진왜란 전 여진과의 전투에서도 전공을 세웠고 임진왜란 초기에는 옥포만호로서 이순신 함대와 함께 옥포해전, 한산해전 등 주요 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유재란기에는 도산성 포위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전쟁 이후에는 경상좌수사로서 부산 일대의 방어체계를 정비하고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 수군의 군사력 강화 및 방어체제 정비 등에 많은 공을 세웠다. 삼도 수군통제사 이후에는 북방의 여진족의 위협이 가중되던 함경도의 남병사로 임명되어 군사력 증강 및 방어시설 강화에도 기여하였다. 이운룡의 남방과 북방 군사력 강화 노력으로 이 지역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에도 기여를 하였다. 향후 임진왜란 연구에서는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던 인물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하고 전쟁의 전체 상황에서 사건과 인물 등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된다.
임진왜란 시기에 전라도 흥양현감으로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동했던 일옹 최희량(崔希亮)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최희량은 1560년(명종 15)에 태어나 1651년(효종 3)에 죽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정유재란 때 많은 활동을 했다. 최희량의 본관은 수성(隋城), 호는 일옹(逸翁)이다. 그는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에는 아버지의 상중(喪中)이어서 전장에 나아가 싸우지 못하였다. 그는 1594년 무과에 급제한 후, 충청수사로 있던 장인 이계정(李繼鄭)을 돕도록 천거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흥양현감(興陽縣監)으로 이순신(李舜臣)의 아래에서 12차례 전공을 세웠으며, 적의 군량 800여 석을 탈취했으며, 포로 700여 명을 되돌려 왔다. 이에 이순신의 격찬을 받았지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서 지냈다. 병자호란 때는 나이가 많아서 직접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내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扈從)하게 하였다. 최희량은 전쟁 중에 수군과 육군 지휘부의 갈등 등으로 모함을 받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종전 이후에 전공을 인정받아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다. 그는 1774년(영조 50)에는 향인들의 청원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00년(정조 24)에는 나주 향인들이 지은 忠逸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1871년(고종 8) 시호가 무숙(武肅)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일옹집(逸翁 集)』이 있는데, 시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보물로 지정된 「破倭 報牒」은 임진왜란 시기에 전공에 관한 보고의 내용과 체계, 전투에 대한 전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본 논문은 임진왜란 때 충주에 세웠던 명나라 장수 吳惟忠의 「吳總兵淸肅碑(淸肅碑이라고 약칭함)를 고찰한 문장이다. 임진왜란 때 명군 가운데 참된 군인의 표상이 될 장수가 몇몇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오유충이다. 오유충은 전장에서 군인의 본분을 다한 용맹성을 보여주었고, 또 주둔지에서 조선 백성을 보살펴주는 청덕심을 보여주었다. 조선 백성들이 오유충이 베풀어준 청덕을 기리는 비석을 무려 7곳이나 세워놓았다. 충주 오유충의「청숙비」는 그 중의 하나이다. 오유충이 충주에 들어와서 백성들이 전란 속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다며 부하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고, 그 자신도 청간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민의에 따라 행하였다. 충주 백성들은 오유충의 청덕에 감복하여「청숙비」를 세웠다.「청숙비」의 ‘淸肅’ 두 글자는 오유충이 맑은 덕행과 엄숙한 영으로 충주 백성들을 보살펴주었다는 의미를 담아놓았다. 오유충의「청숙비」는 1597년(선조 30) 11월에 충주 武學堂 남쪽에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에 통치 당국에 의해 비석이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행히도 일본 京都大學 中央圖書館에 정조 연간에 趙寅永 등 이 성책한 金石集帖 에 오유충의 「청숙비」탁본이 수록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유비무환 나라사랑’정신은 기존의 성웅사관에서 주로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런 정신은 실제 임진왜란 시기 국난 극복을 위한 여러 가지 전력 건설의 기반이 되었다. 본고에 서는 임란의 세 시기로 나누어 이순신의 수군력 건설 과정과 각각의 시기에 나타난‘유비무환 나라사랑’정신을 보여주는 기록을 함께 살펴보았다. 임진왜란 발발 이전, 이순신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수군력을 건설하였다. 무엇보다 전선(戰船)을 건조하고 거북선[龜船]을 창제하는 등 무기체계를 갖추었고, 수군 병력을 규정대로 모집하여 훈련시켰다. 이 외에도 전쟁에 대비하는 여러 방안을 세웠기 때문에 전쟁 초기 해 전에서의 전승(全勝)을 거둘 수 있었다. 두 번째 시기인 강화교섭기에는 조선 수군 역시 군량부족과 전염병의 치성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병력부족이었는데, 최대 22000여 명이던 것이 1595년 봄에 4190명 수준으로 약 80% 감소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통제사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전력 건설 을 위해 250척의 전선건조, 어염(漁鹽)과 둔전(屯田) 등을 활용한 군량확보, 모든 수단을 동원한 병력충원, 그리고 무기제작과 훈련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유년(1597) 8월 3일, 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10여 척의 전력으로 칠천량해전 2개월 후에 치러진 명량해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칠천량해전 이후 그는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선 고하도 통제영에서 월동을 하면서 전선건조와 군량확보 등 수군력 건설을 위해 시급한 문제들을 서둘러 추진하였다. 이어 무술년 (1598)년 2월 17일, 고금도 통제영으로 이동한 후에는 호남 연해안의 전력을 기울여 수군력 건설에 매진하였고, 그 결과 마지막 노량해전에 서 승리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순신은 각각의 시기마다 남긴 일기나 한시(漢詩) 등을 통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걱정하는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런 기록들에 남겨져 있는 그의‘유비무환 나라사랑’정신은 조선 수군 전력 건설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임진왜란 시기 해전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절이도해전에 대한 연구는 소략하다. 그것은 절이도해전에 관한 사료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절이도해전의 경과에 대해서 관련 사료들을 분석하여 정리하고자 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명 수군은 전쟁의 막바지인 1598년에 들어서 사로 병진작전을 추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병되었다. 도독 진린이 이끈 명 수군이 무술년 7월에 고금도 조선 수군 진영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벌어진 해전이 바로 절이도해전이다. 절이도해전에 대해서는 사료가 이분화되어 있어서 몇 가지 요소별로 해전 경과를 구성해 보았다. 이를테면 전투일자가 언제인가, 전투장소는 어디인가, 이순신은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는가, 명 수군 도독의 전투 참가 여부, 전과는 어느 정도인가 등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았다. 필자가 분석한 결과 절이도해전은 2가지 사료를 모두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하나는 전투일자가 7월 19일로 볼 수 있고, 전투장소는 절이도 앞바다이며, 이순신이 직접 지휘하여 적선 50여 척을 분멸시킨 것으로 보았다. 다른 하나는 전투일자가 7월 24 일로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참가하지 않았으며 녹도만호 송여종이 8척을 이끌고 적선 11척을 맞아 6척을 나포하고 적 수급 70급을 벤 것으로 볼 수 있다. 2가지 중 어느 것을 채택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어쨌든 절이도해전에서의 승리는 명량해전 이후 고하도와 고금도에서 수군 재건 노력 결과를 시험한 무대였는데, 수군 재건에 성과가 있었음을 확인하는 장이 되었다. 아울러 명 수군에게 조선 수군의 우수성을 각인시킨 의미 있는 해전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연합작전을 잘 추진하여 이어서 벌어진 예교성 수륙합공전과 노량해전에서 수로군이 제 몫을 다할 수 있었다.
거북선(龜船)의 연원은 고려시대 특수군선인 과선과 검선 등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과선과 검선의 구조는 짧은 창검을 뱃전에 꽂아서 적의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을 방지하게 되어있었는데, 이러한 구조 가 후대 거북선의 개판에 칼과 송곳을 꽂는 형태로 이어졌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일반적으로 14개의 화포가 비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조선 후기에 거북선의 화포장 정원이 8명이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임진왜란 때 거북선에 탑재된 화포의 수량도 8개로 추정되었다. 이순신 제2차 백의종군로 고증 관련 쟁점노선에 대해서는 천안 보산원에서 공주 일신역으로 이동할 때 개치(蓋峙)를 경유하였고, 남원에서 운봉현을 거쳐 구례현으로 이동할 때는 여원치와 숙성령을 경유 하였으며, 하동현에서 청수역으로 이동할 때는 황토재를 경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군의 참전병력에 대해 단편적으로 파악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1592년 7월 명 육군의 평양 공격 참전병력은 3,000명 이었고,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이여송이 거느린 명 육군 병력은 35,000~36,000여명이었으며, 이후 명군 병력은 계속 증강되어 1593년 2월에는 38,637명에 달했다. 1597년 12월에 명 육군 참전병력은 40,000명이었고, 1598년 명 수군 참전병력은 13,000여명이었으며, 1598년 9월 명 수륙군 참전병력은 7만명으로 파악되었다.
이 글에서는 왕건이 후삼국 통일전쟁기에 수행한 해군 활동에 주 목하여 현대 해군이 규정하고 있는 해군력과 그 운용 개념을 적용하여 해석하고, 역사적인 교훈을 살펴보았다. 고려의 해군력을 구성하던 해 군 전략과 병력, 전함의 실체를 검토하고, 해양 통제, 군사력 투사, 해 군력 현시, 인도적 지원 등 현대적 개념을 적용하여 그 운용적인 특징을 정리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우선 왕건은 903년 나주 진출 직후 해군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해군 전략을 수립하였다. 왕건이 수립한 해군 전략은 나주를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는 전략 거점으로 구축하고, 이를 발판으로 서 남해상에 대한 해상권을 장악해가면서 후삼국을 통일하자는 방략이었다. 왕건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최대 3천명 수준의 해군 병력과 100여 척에 달하는 전함을 확보하였다. 왕건은 이렇게 확보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해군 활동을 전개하였다. 왕건은 나주와 압해도, 진도, 고이도를 연결하는 서남해역을 핵심 해역으로 설정한 다음 해양 통제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왕건은 견훤의 외교활동을 통제하는 한편, 독자적인 해상세력을 포섭 할 수 있게 되었다. 핵심 해역에 대한 해양 통제는 후백제왕 견훤의 망명과 전쟁 재원 확보라는 정치·경제·군사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왕건은 해상으로부터의 해군력 투사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나주, 진도, 고이도, 진주 지방은 해군력이 투사된 주요 공간이었다. 왕건은 이 지역들을 확보함으로써 서남해역에 대한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왕건은 해군력을 현시하기 위한 해군 활동도 수행하였다. 해 군력의 위용을 드러내어 고이도의 항복을 받아냈고, 서남해역에서 준동 하던 해상세력을 제압하기도 하였다. 왕건은 인도적 차원의 지원 활동도 전개하였다. 남방의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한 구휼 활동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해군력에 기반한 인도적 지원에 따라 서남해의 지방사회와 지역민들은 왕건과 고려를 든든히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요컨대 효과적인 해군전략의 수립과 실천, 이를 실현하기 위해 확보한 해군 병력과 전함을 근간으로 하는 해군력에 기반하여 왕건은 견훤과의 대결 구도에서 승리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논문은 임진왜란 해전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의 경쟁력의 실체를 첨단 수군과 이순신의 혁신 역량의 결합에서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Ⅱ. 첨단 조선 수군’에서는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 드러난 막강한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까지 조선 수군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병력, 무기, 함선의 준비 측면에서 개관해 보았다. 이를 통해 수적 측면에서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비해 절대 열세였지만 판옥선, 거북선으로 대표되는 조선 함선의 질적 전투력은 일본의 함선을 압도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수적으로, 질적으로 모두 열세의 함대가 아니라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질적으로는 우세한 함대를 이끌어 모든 해전에서 승리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무도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우리의 역사 인식은 부분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지상군의 경우는 준비가 미흡해서 개전초기부터 곤욕을 치렀지만, 수군의 경우는 나름대로 착실한 전쟁 준비가 있었다는 역사인식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Ⅲ 이순신의 혁신’에서는 당파전술, 거북선의 돌격전술, 학익진 전술, 이순신의 해전 전술 종합 등 이순신 혁신의 성과를 해전 전술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당파전술은 충돌전술이 아니라 함포 포격전술이었고, 거북선의 돌격전술은 근접포격전술이었으며, 학익진 전술은 집중포격전술임을 밝혔다. 거북선의 근접포격전술과 학익진을 활용한 집중포격전술은 모두 함포의 명중률을 향상시키기 위해 창안 한 이순신의 혁신의 산물이었다. 이순신은 활과, 화공(火攻)을 중심으로 한 재래식 전술과 신무기인 천자총통, 지자총통을 중심으로 한 첨단 전술을 적절히 결합하여 조선 수군을 당대 최고의 질적 전투력을 지닌 수군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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