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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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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家禮』에 의거한 유교적 상장례는 매우 위계적인 동시에 차별적이었다. 男尊女卑·尊高卑低라는 원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원칙에 따라 父親喪이 가장 무겁고, 母親喪이 그 다음이며, 婦人喪이 가장 가벼웠다. 『가례』를 준수했던 18~19세기 경상도 사족 가문에서 부인의 지위는 매우 낮았다. 부인상을 당할 경우, 남편은 4일 동안만 애도했고, 장례식을 끝으로 居喪 기간이 종료되었다. 여기에서 유교적 상장례는 한국 전통사회의 친족제도인 率壻婚[혹은 壻留婦家婚]과 강하게 충돌한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한국의 전통적 친족구조는 17세기 이후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기저에 『가례』가 있었다. 『가례』는 남성과 여성을 위계적으로, 그리고 차별적으로 배치시키는 것을 강제하는 이론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가례』가 엄격하게 준행되면 될수록 부계(혹은 남성)의 위상이 높아졌고, 모계(혹은 여성)의 그것은 추락했다. 『가례』 준행 의지의 확산, 남성과 여성 지위의 역전과 간극의 심화, 인구 증가에 따른 공간 배치 압력의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한국사회는 18세기 전·중반 이래 男系親 중심의 宗族社會로 급속하게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본고는 노상추 일가의 일상과 의례의 수행을 통해서 가족과 친족에 대해 검토하였다. 우선 거주 방식의 경우, 노상추의 가족은 부모와 자녀로 구성되었다. 다만 경제적 기반은 부모가 사망하고, 상속이 이루어진 이후에 독자성을 확보하였다. 다음으로 의례를 시행하는 방식의 경우, 제사에 참여하는 범위는 같은 曾祖의 자손으로 6촌을 넘어서지 않았다. 이 범위가 하나의 집안이었다. 그것을 넘어서는 범위는 친족조직을 구성하여 절기의 차례, 분묘 관리 등을 수행하였다. 친족 조직은 동성 친족 사이에 존재하며, 이들은 의례 활동을 통해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시기 이성 친족의 관계는 외가의 역할이 주목된다. 노상추는 주기적으로 외조모를 찾아뵙고, 외가 친족들의 상례와 제사에 참여하였으며, 경우에 따라 외가의 기반에서 생활하였다. 또 상속에서 딸의 몫은 분명하게 있었다. 노상추의 고모부와 고종사촌이 장모와 외조모의 제사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도 외가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외가의 역할은 여전히 분명한 영역이 있었다. 이것을 넘어서는 범위에서 이성 친족은 친교 목적에서 관계를 유지하였고, 교유의 빈도가 매우 높았다. 오히려 의례를 통해 대면하는 동성 친족과 비교하면 강제 요소가 없음에도 지속성과 친밀함이 높았다. 이렇게 볼 때, 19세기 경상도 사족들은 각종 의례의 시행에서 행위의 절차는 『주자가례』의 항목을 비교적 충실하게 수행하였지만 가족과 친족의 관계가 작동하는 지점에서는 『주자가례』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同高祖 8촌을 범위로 하는 집안[家]에서 宗子가 의례와 家産을 장악하는 『주자가례』의 가족 질서는 조선에서는 6촌의 범위에서 작동하였고, 재산은 부모와 자녀 및 손자녀의 범위를 넘어서 상속되지 않았다. 의례와 재산을 宗子가 독점해서 운영하는 『주자가례』의 가족 운영 방식은 19세기 조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주자가례』는 잘 정돈된 의례의 절차를 제공하는 참고도서로 기능하였고, 자신들이 인식하는 가족과 친족의 범위에서 주체적으로 변용하여 시행하였다.
본 논문은 조선후기 선산지역 재지사족의 동향과 서원·사우의 건립추이를 개관하고, 안강노씨 가문의 문산서원 건립 사례를 파악한 것이다. 선산은 조선전기의 사상계와 관계를 주도하였던 인물들이 대거 배출된 지역이었다. 길재 이래로 충절과 도학의 양 갈래로 문풍이 이어지면서 이를 계승한 인물들을 선정하여 鄕十賢으로 칭송하였다. 특히 길재-(김숙자)김종직-정붕-박영으로 이어지는 선산지역 도통은 박영에 이르러 많은 문인을 양성하면서 16세기 초반 松堂學團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말 이래로 현달한 인물이 부재한 가운데 선산지역 재지사족들은 인근의 여헌·우복·서애학단으로 편입되어 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박영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길재에서 박영으로 이어지는 도학자 4인에 대한 금오서원 건립이 추진되었다. 이후 금오서원에 제향되지 못한 나머지 6인은 월암서원과 낙봉서원을 건립하여 제향하였다. 나아가 이들 서원이 모두 사액되면서 선산지역 향촌 사회는 향십현의 후손들이 실질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선산에는 이들 향현의 가문 외에도 유력한 가문들이 있었다. 이들 가문 역시 17세기 이래로 문중서원을 건립하면서 향촌 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조정의 금령으로 인해 서원 건립이 어려운 상황이어서 사우로 건립하였다가 추후 서원으로 승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례로 안강노씨는 노계정과 노상추 조손이 무과로 사환하여 현달한 이래, 노상추의 아들과 손자, 조카들 역시 무과로 출사하면서 18세기 중반 이후 가문의 위상이 제고되었다. 18세기 후반 문산사 건립과 19세기 초반의 문산서원 승원은 이러한 가문의 위상과 관련이 깊었다. 실제 선산지역 서원과 사우는 해당 가문의 위상, 조정의 정책, 지방관의 성향, 제향인의 색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건립과 승원이 결정되었다.
이 논문은 개인의 경제생활 중 토지매매와 관련하여 토지 매매 정보의 수집과 이를 통한 매매활동의 실태를 일기 자료를 활용하여 추적했다. 연구 결과는 토지 매매시장의 성장과 매매활동의 변화 규명을 통해 조선후기 경제 환경의 변화를 규명하는데 기여한다. 분석 자료는 노상추(1746∼1829)가 1763∼1829년 동안 작성한 『노상추 일기』이다. 그의 일기에는 곡물을 비롯한 생필품에 대한 물가와 경제생활 관련 기록이 산재하고 있으며, 이들 기록 중 토지와 관련한 매매정보의 수집과 이를 활용한 매매활동도 있다. 일기 기록을 토대로 노상추가 주변에서 발생한 토지매매 내용을 수집한 사실과 19세기 초 일기에서 ‘居間’과 ‘居間人’의 실제를 확인했다. 이러한 매매정보의 유통 환경에서 거간인의 존재를 활용하여 노상추는 토지매매 시장의 매매동향을 파악했다. 노상추가 매매활동에 있어서도 시장의 매매정보에 대한 수집을 토대로 매매물에 대한 흥정, 매매명문 작성, 그리고 매득물에 대한 확인을 실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매득 토지와 관련한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에도 매매명문을 토대로 적극적인 소유권 수호 활동을 전개했다. 연구 성과는 토지매매명문의 작성에 앞서 정보 수집, 흥정, 매매물 확인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존재하는 사실을 밝혀 매매양상과 매매관행의 변화 연구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19세기 초 居間 행위와 居間人이 존재하고 있는 실태를 규명하여 이 시기 토지매매 시장의 전개 양상의 일면을 규명했다.
이 연구는 경상도 선산의 무관 노상추가 역임한 오위장과 금군장이 그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탐색한 글이다. 노상추는 진동 만호의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뒤 수령으로 진출하는 희망을 품었다. 1783년에 그의 바람대로 삭주 부사가 되었으나, 그 뒤로 다시는 수령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후 은퇴하는 1813년까지 홍주 영장, 강화 중군, 가덕 첨사가 그의 외직의 전부였고, 그 사이를 채워준 관직들이 바로 오위장과 금군장 등이었다. 노상추는 수령 진출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인사권자들에게 본인의 존재를 알리고 벼슬자리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오위장과 금군장 등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관직들을 지내면서 노상추가 지향한 정체성은 유학 경전의 독서를 통해서 예의염치를 아는 무관이었다. 여기에는 유장(儒將)을 최고의 무장으로 쳐주던 사회 분위기와 함께 영남이라는 지역사회의 관계망 속에서 처신해야 하는 현실이 자리했다고 여겨진다.
본 논문은 김영선(1995)의 맞섬말 유형 분류에 따라, 한·중 양국어의 양분적 맞섬말의 의미 특성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우선 양분적 맞섬말 중 암수 관계에 해당되는 한국어 ‘사내’/‘계집’과 중국어 ‘男子漢’/‘丫頭’를 선정하고, 크게 두 가지 작업을 진행하였다. 첫째, 각 언어별로 해당 낱말의 기본의미와 전이의미를 사전을 통해 확인하고, 연상적 의미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나타나는 용례에서의 쓰임이라고 생각되는 의미를 확인하여 정리하였다. 또한 이들 기본의미와 전이의미, 연상의미를 포괄적으로 조감하여 이들 낱말의 의미 확대 양상을 밝힌 다음, 이들 낱말에 한정된 두 언어의 다의 구조적 특성을 대조적으로 고찰하였다. 둘째, 각 언어별로 맞섬말쌍의 기본의미와 전이의미, 연상적 의미를 비교하여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하고자 하였는데, 해당 낱말들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두 언어의 특성을 대조적으로 고찰하였다. 아울러 통시적 관점에서의 의미 기술도 부분적으로 고려하였다.
본 연구의 목적은 현재까지 피리 연주법에 대한 선행 연구들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하여 현재 나와 있는 피리교재의 기초연주법내용을 분석해서 새로운 피리 기초 연주법교육의 방향을 제시해보려 하는데 있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선행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피리의 연주법을 분류해 보면, 우선 소리를 내는 단계의 연주법과 연주를 하는 단계의 연주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소리를 내는 단계의 연주법을 연주 자세와 취법으로 볼 수 있으며, 연주를 위한 연주법에는 선율 진행을 위한 연주법과 음색을 바꾸기 위한 연주법, 강조나 꾸밈을 위한 연주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피리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이런 연주법이 모두 숙달되어야 하겠지만,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기초 연주법에서는 연주자세교육과 취법, 안공법교육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둘째, 현재 2019년 4월을 기준으로 도서검색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피리와 관련된 교재와 악보집은 13종이 있다. 여기서 악보집 성격이 강한 교재를 제외하면 총 5종이다. 셋째, 현재 나와 있는 피리교재 5종의 기초연주법내용을 연주 자세교육과 취법, 안공법을 위주로 분석해보면, 피리교재의 기초 연주법교육에 관한 부분은 모든 교재에 수록이 되어 있다. 하지만 각각의 교재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공통적으로 분량이 너무 작고 연계된 연습곡이 미비하다는 점과 통일된 용어를 쓰지 않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현재 나와 있는 피리교재의 기초연주법내용을 분석해본 결과 기초 연주법에 대한 분량이 너무 작다는 점과 용어의 통일성이 부족한 점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우선 기초연주법교육을 위한 내용이 늘어 나야하고, 그림이나 사진 등을 활용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취법교육과 안공법교육을 위해 각 단계별로 연습곡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또 피리의 각 부분에 대한 명칭을 통일한다면 초보자들의 혼란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재조대장경 『金光明最勝王經』 권제2에 기입되어 있는 13세기 각필 부호의 실체를 정밀 분석한 것이다. 『금광명최승왕경』 각필 부호의 종류는 크게 선과 점, 삐침, 체크 등의 4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부호들의 총 개수는 약 1,073개로 이 부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선이 12%, 점 76%, 삐침 11%, 체크 및 기타가 1%이다. 『금광명최승왕경』에 새겨진 체크 형태의 부호와 겹사선 부호, 그리고 다양한 부호들이 새겨진 동일한자의 용례를 골라서 비교 분석한 결과 『금광명최승왕경』 권제2에 새겨진 부호들은 경전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게 하는 표기 부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글은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전남 함평 불갑산지역 민간인 학살 사례를 개인의 구술증언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연구는 2000년 이후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어, 상당한 수준의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특히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연구는 ‘아래로부터의 역사’와 ‘기억정치’라는 부분에서 상당히 큰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주류담론으로 편입하지 못했던 많은 ‘잊혀진 기록’들을 공식적 역사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분단이라는 상황은 사물을 평가하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과거 ‘적군’이었던 빨치산이나 인민군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것은 그리 많은 연구가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 논문은 한국전쟁 당시 전남 함평 불갑산지역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였던 사람의 기억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과 불갑산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분단상황과 레드 콤플렉스 등에 의해 일원화되었던 역사의 해석을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고, 또한 민간인학살과 같은 사건을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日本書紀』 欽明紀에는 553년 10월, 백제의 왕자 餘昌이 고구려를 공격해 승리하였다는 ‘百合野 전투’ 기사가 보인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대규모 會戰이 벌어졌고, 고구려왕이 東聖山 위까지 퇴각하였던 일이 역사적 사실이라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백합야 전투 기사를 부정하거나 553년 10월의 시점을 고쳐보아야 한다는 지적도 일각에서 계속되고 있다. 553년 7월에 신라의 新州가 한강 하류 유역에 설치되었으니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은 닿아있지 않았을 공산이 크고, 성왕은 이듬해 신라와의 管山城 전투를 준비 중이었으므로 553년에 큰 병력을 일으킬 여력은 없었으리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황상 근거만으로 『일본서기』의 기사를 부정하거나 시점을 수정해보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고구려와 신라의 通好에 직면하여 불리한 처지에 빠졌던 성왕은 고구려와의 정면 대결을 통해 백제의 군사적 역량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勝戰을 명분으로 왜 및 가야 세력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신라를 정벌하고, 한강 유역을 수복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백합야 전투는 백제와 고구려만의 싸움에 그치지 않고 이듬해 있을 관산성 전투의 前哨戰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이에 백제군의 고구려 공격에는 신라군의 동향 또한 핵심적인 변수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성왕은 신라 진흥왕에게 王女를 시집보내 일시적인 관계 봉합에 나서는 한편 삼국간의 접경지로 추정되는 백합야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친 후 군사적 거점을 구축하는 등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하였다.
본 논문은 조선시대 양반의 신분유지와 향상에 있어 중요한 매개체였던 科擧를 통해 창원지역 在地士族의 실태를 살펴본 것이다. 조선시대 창원지역에서는 생원·진사시 32명, 문과 12명이 배출되었다. 전체 합격자와 비교해 보면 생원·진사시는 0.04~0.08%, 문과는 0.03~0.07%에 해당되는 매우 낮은 수치이다. 이는 지역 내에서 합격자가 매우 희소성을 지닌 집단인 동시에 과거합격이 개인과 가문, 나아가 고을 차원에서도 큰 영예였음을 보여준다. 창원지역에서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는 창녕조씨·남평문씨·김해김씨 불비파·김해김씨 이형파·창녕장씨 등이 확인된다. 이 가문들은 과거합격을 매개로 창원지역 내 가문의 격을 일신시키며, 鄕案 입록 등을 통하여 향촌사회를 주도해 갔다. 합격 시기는 대부분 15·16세기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지역의 주요가문들의 이거, 현달한 인물의 부족과 인조반정 이후 중앙정치의 변동 등에 영향을 받아 17세기부터 과거 합격자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이로 인해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과 그렇지 못한 가문 간의 격차는 점차 좁혀져 갔으며, 창원지역재지사족은 사회적 지위 유지를 위해 여러 문중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본 연구를 통해 밝힌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악기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의 삼국 시대의 현악기 형태는 장방형이며, 현의 수가 4-6개로 나타났다. 일본의 고분 시대의 현악기 형태도 판형, 축상형, 공명형이며, 현의 수도 대부분 4-6현이다. 둘째, 한국과 일본의 현악기는 제작에 있어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태성리 1호분은 거문고에 보이는 괘는 뚜렷하지 않으나 현수가 6개로 분명하게 존재하고, 현을 고정하는 2개의 촉구멍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현악기에는 현공에 구멍이 없으며, 집현공에 줄을 집약해서 사용했다. 바로 집현 방법에 있어 한국과 일본은 독창성이 있었다. 셋째, 현악기의 연주기법은 삼국 시대의 현악기에는 알 수 있었지만, 고분 시대의 현악기에서는 알 수 없었다. 삼국 시대에는 연주자가 악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연주하며, 연주자의 왼손을 현악기의 몸통 위에 짚고서 오른손으로 연주한다. 하지만 일본의 현악기는 유물로 발견되어 연주기법을 알 수 없었으나 彈琴 埴輪에서 연주 자세와 연주기법을 알 수 있었다.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은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서도 경주 일원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금속문화의 도입은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자연환경 상 조건이 농경과 수렵을 중심으로 정착하기 좋은 입지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상으로의 유이민 집단의 정착에 큰 어려움이 없었고, 그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한편, 사로 단계의 신라가 진한의 제소국을 아우르는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데에는 선진문물과 함께 사로에 들어온 탈해집단의 우수한 문화와 토착세력 및 기존의 이주 집단을 규합하는 정치력도 중요하게 작용하였지만, 울산지역의 철 생산 유적 또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울산의 달천철장은 최근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막대한 자원의 보고였고, 고대 국가가 발전하는데 있어 철기의 생산이 갖는 의미를 고려한다면 신라의 고대국가로의 확립에 있어서 그 중요성이 결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한반도 삼국이 국가형성을 지향해 나가는 시기가 되면서 신라는 해상을 통한 왜와의 외교를 통해 국가 간의 외교사의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특히 울산지역이 신라의 외항으로서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왜와의 교류에 있어 가장 빠른 경로가 바로 경주 도성에서 출발하여 관문성을 거쳐, 울산만의 율포에서 왜로 출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해양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국가가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번영을 구가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의미는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해상로에 대한 지배는 곧 역사의 주도권 확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한반도 고대국가 신라는 한강유역을 확보하면서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사회, 문화 전반을 더욱 발전시켰고, 그를 바탕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병합하였고 나아가 동북아시아 해상 교류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이러한 역사전개의 방향은 지금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많은 국가들이 모두 바다를 통한 해상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음에 주지하는 사실이다.
본고는 한 때 교통의 중심지로 청도 역사와 정체성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판단되는 省峴道驛의 변천과 문학적 형상을 살펴보고, 활용방안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다. 淸道는 그 어원이 교통과 일정한 관련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명성이 높았는데, 이는 조선시대 嶺南大路 상의 주요 驛가운데 하나로 인근의 많은 역을 관할하고 察訪이 주재했던 省峴道驛의 위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05년 경부선 철도의 개통은 기존과는 다른 변화를 수반하였는데, 성현은 더 이상 예전처럼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게 된다. 경부선 철도의 개통을 전후하여 성현역을 중심으로 한 청도지역의 터널에는 총 6개의 額石이 남아있다. 청도지역에만 이렇게 많이 남은 이유는 최장거리에 해당되는 터널인데다 공사 당시부터 난공사지역으로 분류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경부선 개통 전에 새겨진 1903년 淸安君 李載純의 ‘隱谷隧’와 1904년 당시 육군중장 寺內正毅(데라우치 마사다케)의 ‘代天成功’과 체신대신 大浦兼武(오우라가네다케)의 ‘福利千秋’는 초기 경부철도 부설과 관련된 인물들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어 철도사는 물론이고 문화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성현의 문학적 형상은 이곳을 경유한 군수와 관찰사, 그리고 사신들이 남긴 한시와 최남선의 창가와 시조를 통해 그 대략을 살필 수 있다. 성현 일대는 역사와 문화를 갖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와인터널 이외에는 관심 밖으로 방치된 것이 사실이다.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액석을 비롯한 관련 시설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지정하여 보존방안을 수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이 연구는 백불암 최흥원(1705~1786)의 『역중일기』를 중심으로 18세기 대구 한 양반가문의 상례와 제례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상제례의 일반적인 절차와 과정은 대체로 『주자가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묘살이와 齋戒가 그러했다. 전자는 『주자가례』에 없는 절차가 행해진 것이라면, 후자는 당시에 잘 실행되지 않았던 의식이었다. 엄격한 재계는 안으로는 싫어하여 기피하는 대상이었고, 밖으로는 홀로 고상해 한다는 세속의 비난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뿐 아니라 여러 경우에서 『주자가례』와 俗禮는 절충.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미성자녀는 죽은 날에 염하여 다음날 입관 매장되었다. 노비들의 죽음도 많은 경우 3월장이거나 이보다 더 긴 5월장으로 치러졌다. 또 3년 상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검토한 상제례는 18세기의 일반적인 사정이라기보다는 대구 지역 한 양반가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초기 서원이 어떤 방식으로 보급·확산되었는지 퇴계 문인들의 활동을 통해 다룬 연구이다. 명종 대부터 광해군 대 까지 퇴계 문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서원은 43개소에 총 56명이 참여하였다. 이중 퇴계와 소통이 많았던 이정, 황준량, 박승임, 그리고 정구를 본고에서 검토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정은 경주 서악서원과 순천 옥천서원 설립을 추진하며 스승과 세밀한 부분까지 협의하면서 진행하였다. 전자는 경주 府南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성장했고, 후자는 지역의 성리학적 질서 확립은 물론 사림 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황준량은 지방관에 나아가 신령 향교 중창·白鶴書堂 설립, 단양 향교 수리, 성주 迎鳳書院 중수 주도 및 孔谷書堂·鹿峰精舍 설립 등 초기 서원설립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퇴계가 지은 그의 행장에서 교육 사업에 대한 성과를 가장 많이 거론한 것도 이 같은 사정에 기인한다. 박승임은 서원 보급 운동에 가장 열성적인 문인으로 소수서원에 대한 관심을 비롯해 이산서원에 퇴계 제향 주관, 여주 沂川書院 설립, 예천 鼎山書院 창건 기반 제공 등 박승임의 서원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퇴계의 서원관과 맥이 닿아 있었다. 퇴계 사후 서원 설립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정구는 성주 천곡, 현풍 도동, 음성 운곡, 안동 임천서원 중건 및 창건에 힘썼다. 이처럼 문인들이 서원 설립을 주도하고, 퇴계가 적극 지원해주는 모습은 서원 확산 초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 서원 확산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퇴계를 제향 및 추향된 서원은 전국에 31개소를 헤아린다. 퇴계 제향 서원의 핵심이 바로 문인들과 합향 된 형태가 가장 많았다. 이와 같이 퇴계의 서원 보급운동은 그의 문인들에 의해 계승되어 서원이 조선 사회에 하나의 교육·제향 기관으로 자리 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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