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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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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은 『慈仁叢瑣錄』에 수록된 오횡묵의 한시 176편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문학적 가치와 문학창작자로서의 면모를 밝히고자 한다. 『慈仁叢瑣錄』은 오횡묵이 자인현감에 제수되어 정선군수직을 사임한 1888년 8월 2일부터 함안군수에 제수되어 이임한 1889년 4월 17일까지 일을 기록하고 있다. 전체 구성은 자인현의 지도, 날짜별로 기술된 일기, 하루하루의 기록과 감회를 적은 詩, 賦로 이루어져 있다. 『慈仁叢瑣錄』에 수록된 창작시 176편은 絶句 77수, 律詩 64수, 古詩 33수, 歌行 1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들에는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목민관의 마음과 오횡묵이라는 평범한 개인의 心思가 생생하게 잘 드러난다. 먼저 『慈仁叢瑣錄』 소재 한시 작품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목민관으로서의 선정포부, 벼슬을 내린 임금에 대한 감사, 굶주림에 지친 안타까운 백성들의 모습, 韓將軍 이야기, 以桂亭에서의 활쏘기 및 시회, 술자리에서 회포, 고적과 사찰, 벗과의 만남과 헤어짐, 누대에서 경치감상, 세시풍속, 만인산 헌정, 가족에 대한 마음, 민가 순행 방문 등 다양한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본 연구는 『慈仁叢瑣錄』에 수록된 한시들을 비교적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주제가 비슷하여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작품들을 모아 愛民意識, 家族愛, 交遊와 抒情, 風俗과 世態 등의 4개 유형으로 항목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정리된 유형에 해당하는 개별 한시 작품들을 통해 오횡묵의 시세계를 파악하고 문학창작가로서의 면모를 고찰하였다.
본고에서는 문화유산학에서의 ‘문화유산’과 그 하위 개념으로 설정한 ‘유형문화재’ 및 ‘무형문화재’의 개념을 재정립하였다. 문화유산에는 유적건조물・유물・기록유산 등이 있고, 무형문화재・자연유산・국가등록문화재도 이 분류 안에 속한다. 유적건조물에는 유형의 문화유산이 포함되고, 유물의 형태는 배제된다. 실질적으로 유적, 유구는 주거지나, 무덤, 가마 등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국내에서는 유적건조물을 국가 혹은 시・도 단위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선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중국 역시 정부기관에서 이동이 불가능한 유형문화재를전국・성・시・현급 중점 문화재 보호단위로 선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유산은 지정과 비지정으로 구분할 수 있고, 그중 정부 혹은 지차제가지정한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대중에게 정보가 제공된다. 문화유산학의 학문적인 범주를 문화유산에 대한 조사・교육・보존・복원・활용 등으로 나누어 접근할 수 있고, 고고・역사・인류・민속・문명・예술・관광학 등 여러 학문의 융복합적인 학문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외에 의류・건축학 등의 학문이 문화유산학에 융복합되기도 하고, 역으로 문화유산학이 이 학문들에 속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문화유산학의 개념에는 정부와 지자체가 지정혹은 등록한 문화유산이 포함되고, 지정 혹은 등록되지 않은 문화유산도 연구대상에 포함된다. 본고에서는 유적건조물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였고, 그 결과 현대사회의 대중들은 지정된 문화유산에 집중하며, 비지정된 문화유산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비지정된 지표 아래의 유적건조물은 관심도가 가장 낮다. 만약, 현대사회가 현대에 남겨진 문화유산을 보존 및 보호하지 않게 된다면 현대사회는 이전 사회의 문화유산만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와 문화유산도 잃어가게 될 것이다. 필자는 그 해결책이 문화유산학의 활성화라고 판단한다. 문화유산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대사회 이전의 문화유산을 보존 및 보호하고, 현대사회가 남길 문화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온전하게 물려주기 위함이다.
재래시장이 형성되어 그 장소정체성을 갖는 것은 많은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가 아니라 한 장소에 그려진 역사의 기록임과 동시에 다양한 문화와 융화되어 또 다른 하나의 문화가 탄생된 곳이기도하다. 한 공간이 장소정체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수많은 복합적 조건이 성립해야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재래시장은 상업적 기능이 주된 목적이기는 하지만물건을 사고파는 상업적 기능만 작용하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문화와 역사를 매개하고 또 기록되는 곳이어야 한다. 아울러 사람이 살게 되는 곳은 어떤곳이어야 하는가 하는 지리적 측면에서도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람의 삶의터전으로 형성되어야 하는 합목적적 기능을 위해서는 어떤 공간이 선택되는가? 이 공간은 어떠한 지리적 특성 즉 장소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선택된공간이 합목적적 기능을 하기 위해서 어떠한 장소화가 이루어져서 그 지역의공간정체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장소정체성을 지니게 되는가? 장소정체성을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수는 없으므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반드시 탈장소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어떤 목적적 기능을 가지게 되는방향으로 탈장소화가 진행되는가 하는 것은 본래 공간이 갖는 장소정체성에따라서 삶의 합목적적 기능을 위해 공간이 활용될 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 풍수지리적 측면의 접근과 함께 미래지향적 측면에서 고찰해보는 것은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역』의 작자에 대한 설은 매우 다양한데, 전통적으로 “성인작역聖人作易”의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성인작역”이란 중국 고대의 전설과 역사 속에서 중화 문명 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소수의 성인들이 『역易』의 창작에 관여하였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인은 복희伏羲・문왕文王・주공周公・공자孔子 등을 가리킨다. 하지만 “성인작역”의 설은 합의를 이룬 정론이 없는데, 왜냐하면 『역』이 제작되는 과정의 구체적인 정황과 성인들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학자들마다 상이하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견해가 통일되지 않는 것은 주로 문왕의 “연역演易”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른 데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중괘설重卦說”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학설이 난립하고 “삼성설三聖說”과 “사성설四聖說”이 서로 대립하게 되는 것 모두 문왕의 업적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성인작역”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이설異說들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문왕의 창작 활동인 “연역”의 진상을 명백하게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주역周易』은 점占의 성분과 철학적 요소가 공존하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본질을 파악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역易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어떤 사람에 의해, 어느 시대에, 무슨 목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통해 경전 내부에 편입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주역』 속에 내재된 점과 철학의 긴장관계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역의 본의本義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천(天)”은 유가관념 체계 가운데 궁극적 관념이다. 또한 대부분 철학연구자들은 “천”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세상을 창조하는 지상신, 혹은 궁극적 실체라고 잘못 이해하곤 한다. 사실 유가에서 말하는 천은 “천도”, “사람”, “만물” 이 서로 통일된 “유기적 전체 우주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가가 말하는 천은 지상신으로 인격화될 수 있는 궁극적 실체를 공허하게 만들며, 아울러 그것을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통성(通性)”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완전히 천의 궁극적 의미를 제거해버린다면, 우주 및 우주를 구성하는 인간과 만물의 생명을 완전히 타성적인 자연으로 타락시켜버리기 쉽다. 이때문에, 유가는 궁극적인 창조적 실체를 공허화시키는 동시에, 또한 천을 고양시킴으로써 형이상적 초월성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천에 대한 숭상과 인(人) 의 상승의 대조 속에서 독특한 천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바로 “여재(如在)”라고 한다. 그것은 사실상 인간의 실존적 자아와 그 내재적 성명 덕의의 통일로 귀결된다.
9세기 초반은 신라 하대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로 사회 전반의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다. 하대를 실질적으로 개창한 원성왕은 비정상적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태자를 책봉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당시의 신라 사회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정치적 상황과는 별개로 이 시기의 불교계에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원성왕系를 중심으로 사찰을 창건하거나 고승을 추모하는 碑들이 건립된 것이다. 원성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성왕 즉위 전에 무장사와 갈항사를 중창하였고, 그 후손들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꾸준히 佛事활동을 하였다. ‘新創佛 寺’ 금지령을 내린 애장왕 역시 재위 3년(802)에 海印寺를 창건하였고, 이보다한 해 앞서 애장왕의 어머니인 桂花夫人도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장사에아미타불을 조성하였다. 원성왕의 선조들은 중대 내내 주류에서 밀려난 세력이었다. 중대는 무열왕의 직계 자손들을 중심으로 권력을 공고히 하였던 시대였기 때문에 주류에서밀려한 세력들이 생겨났다. 김경신(원성왕)은 혜공왕대의 혼란한 틈을 타 중대 왕실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김양상(선덕왕)을 먼저 왕위에 올려 자신의 즉위를위한 과도기를 설정하였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김주원을 제치고 결국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때문에 원성왕은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신라 사회의 비전을 제시해야만 했다. 원성왕이 새로운 사회의 비전으로 제시한 것은 불교였다. 원성왕系는 하대가 중대와는 다르다는 점을 표방해야만 했고, 그 방법으로 중고기로의 지향을추구하였다. 그 점이 잘 드러나는 것이 이차돈과 아도, 원효, 신행에 대한 추모 현상이다. 애장왕 7년(806)의 ‘新創佛寺’ 금지령 역시 원성왕의 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新創佛寺’ 금지령을 내리는 시기와 이차돈, 아도, 원효, 신행에 대한 추모가 이루어진 시기가 일치하고 있다. 또한 ‘新創佛寺’ 금지와 함께 사치품 사용에 대한 규제를 한 것은 진골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통제하고자 하였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원성왕을 비롯한 하대의 왕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즉위 정당성에 대한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각기 다른 이유로 왕권을 위협받았기 때문에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세력들이 존재하였다. 그들에 대해 규제를 함으로써왕과 진골귀족들을 구분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청과물유사도매시장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경제학, 경영학의 관점에서 경제적 효율성 및 비제도적 공간이라는 명목 하에 공식 도매기관에 흡수되어야하는 불법적인 대상으로 인식 되어졌다. 또한, 제도시장인 공판장 및 농수산물 도매시장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어, 비 제도시장인 유사도매시장에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면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본 연구는 유사도매시장 중 과거부터 도시 유통경제망에서 큰 역할을 담당해온 청과물 유사도매시장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연구를 통해 청과물유사도매시장이 비공식적, 불공정거래의 장소가 아닌 사회 변화 속에서의 역할, 도시 유통 경제 속 상호 유기적인 변화를 살펴보았다. 도시의 확장과 변화에 따라 유사도매시장은 경제적, 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성격을 달리하였으며, 제도시장과는 달리 도시 내 문제점을 해소해주는 공간으로서 자리잡았다. 청과물 유사도매시장은 외부적으로는 도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공간이였다면, 내부적으로는 시장과 상인의 특성 및 전략에 대한 변화 동향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연구장소이다. 본 연구를 통해 수요의 증가에 따른 위탁업의 성행에서 그치지 않고 위탁업의 성행에 따른 전문가의 등장과 전문가의 등장에 따른 소매시장의 도매시장으로의 변화, 제도시장의 등장과 유통과정의 변화에 따른 유사도매시장의쇠퇴에 이르기까지 유사도매시장의 형성과 변화에 대하여 점층적으로 살필수 있다. 또한, 쇠퇴하는 유사도매시장에서 상인 저마다의 생존전략을 통해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가야는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신라에 멸망당한 나라이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만 남기 마련이어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가야에 대한 문헌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가야에 대해서 간략하게 전하는 자료로는 『三國史記』와 『三國遺事』, 중국의 『三國志』, 『後漢書』와 『南齊書』, 일본의 『日本書紀』 등의 역사서가 있다. 또한 『廣開土王陵碑文』과 『昌寧 眞興王拓境碑』, 『陜川 埋安里碑』 등과 같은 당대에 만들어진 금석문도 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유적들을 발굴조사하게 되고, 그 성과들이 학계에 보고되면서 가야사 연구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고고학 성과들은 문헌자료의 부족을 물질자료를 통해 보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에 더해 최근 정부 차원에서도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가야사 연구가 활기를 띄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을 통해 비록 자료의 영성함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대가야에 한해서는 구체적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다. 필자는 대가야사를 기본적으로 1~3세기의 삼한소국단계를 지나 4세기의 지역연맹체단계, 5세기 이후의 대가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족한 가운데 각각의 단계를 추정할 수 있게 해 주는 盤雲里 瓦質土器遺蹟, 快賓洞古墳群, 池山洞古墳群 등의 고고학 자료들이 확인되는 데서 그러하다. 이를 바탕으로 기존 연구성과들과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들을 바탕으로 대가야의 성립과정과 그 내부체제를 구명해 보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5세기대 이후 가야사회를 주도해 나갔던 대가야 최고지배층이 권력을 독점하고,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권력의 집중과정은 피지배층에 대한 통치강화와 다르지 않아 제도적인 장치와 이념적인 측면을 함께 살펴보아야 그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제도적인 장치로서는 중앙 및 지방통치체제의 구축, 신분제의 구축과 정착, 율령제의 시행 등을 들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념적 측면에서 권력집중과정을 살펴보려 하였다. 대가야 권력층이 지배이데올로기를 정립시켜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지산동고분군의 축조, 새로운 사상체계의 등장, 건국신화 등을 통해 대가야에서의 권력집중과정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5세기대 이후 가야사회를 대표하고 중국과도 직접 교류하는 등의 대가야 내부체제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 정치권력의 집중 또는 안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순장, 불교, 건국신화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대가야로의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고는 장혼이 편찬, 간행한 『詩宗』에 관한 연구이다. 『시종』은 여항인 최초로 편찬한 중국 시선집으로, 우리 손으로 엮고 간행한 몇 안 되는 중국 역대 시선집이다. 여기에는 장혼의 시론이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말~19세기초 시단의 일정한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시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체로는 雜言에서 7언 배율까지, 시대는 古逸에서 명까지를 그 수록범위로 하고 있다. 그 중심에 고시와 당시가 놓여있다. 고시에는 5언 고시, 근체 시는 율시, 그 중 7언 율시가 가장 높은 비중으로 수록되었다. 시체별, 시대별, 대표적 작가들의 성과와 기존 선집들의 전통을 충실히 반영하였고 그 위에 자신의 기호와 안목을 바탕으로 재편집하여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시각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내용은 인간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감의 다양한 측면을 모두 보여주고자 하였다. 고시와 당시를 통해 시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이러한 복고지향적인 시의식은 정조의 시관과도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점에서 ‘성령’을 외치며 진보적 사유를 지녔던 후배 여항인들과 장혼을 동일 선상에서 논의하는 것은 재고해 볼 문제라고 하겠다.
본 논문에서는 중국고대의 자연과 인위의 해석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노자와 순자, 왕충을 중심으로 자연과 인위 개념의 해석과 그 변화를 살펴보고있다. 자연과 인위 개념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 보면, 노자는 인간의 인식을 기준으로, 순자는 인간의 노력을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다. 왕충의 경우는인간세계의 움직임 전체를 자연으로 보고, 인위는 이 자연 속의 본성의 경우에만 인정되고 있다. 그러한 기준의 근거는 각자의 근본존재에 대한 해석에있다. 노자는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도의 존재를 두고 있다. 순자는 천의 움직임을 하나의 현상으로 언급하고 있다. 왕충은 천을 실증적으로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氣論과 노자의 자연무위를 받아들여 천을 설명하고 있다. 왕충의 경우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인간세계도 자연의 세계가 되게되고, 자연의 세계의 일부에서만 인위가 인정되게 되었다고 하겠다. 세 사람이 주장하는 자연과 인위 개념의 기준을 정리해보면, 근본존재와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의지가 관여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그 범위 밖이근본존재에 근거를 두는 자연이고, 그 범위 안이 인간에 기준을 두는 인위로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중국사상뿐만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도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 왕조가 붕괴할 때까지 건립된 선정비는 수령의 要譽 문화를 대표하는유물이다. 선정비 건립의 경로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우거나 이・향임 주도하에 아니면 수령 본인 스스로 세우는 방법이 행해졌다. 세 경로 중 이・향임과 수령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가장 빈번하였다. 수령칠사에 해당하는 선정을펼쳤거나 수령의 정책으로 은혜를 입었다는 여론이 형성되면 선정비 건립을추진하였다. 건립이 결정되면 회의를 통해 제반 절차를 논의했으며, 입비전과석재 운반은 각 면에 분정하여 확보하였다. 건립비용에서 비중이 제일 높은것은 석각에 드는 비용이며, 선정비 구성은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에 제작 소요일은 길지 않았다. 조선시대 선정비의 건립 추이는 전기에는 일찍이 금지 조처가 내려졌기 때문에 금지령이 해지되기 이전까지는 공식적인 건립은 없었다. 금지령을 해지한 중종 대까지도 어느 정도 엄격한 기준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는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시기는 선조 대부터 현종 대까지본격적인 선정비 폐단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어 현종 대 2차례 금지령을 내리는 등 그 건립 추이가 일정치 않았다. 제2시기인 숙종 대 부터 영・정조시기는어느 정도 왕권 강화에 힘입어 선정비에 대한 금지령 조처와 훼철을 단행하여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영조 대 박문수의 노력으로 금지령 위반자를구체적 처벌 규정이 마련되고, 정조는 금지령 위배 선정비에 대한 철거 작업을 펼쳤다. 제3기는 세도정치 이후로 거의 전국 모든 지역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선정비가 세워지던 시기로 난립을 넘어 선정비 홍수의 시기였다.
경주 선도산 아미타삼존상(이하 선도산불상)은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하며 현재 보물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도산불상은 신라 불상 중에서 단석산 마애불상군을 제외하면 조성규모가가장 크고 신라 불상의 고유한 특징과 함께 중국 北齊-隋代의 다양한 불상 양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불상이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에서 西岳이라 불리며 仙桃聖母의 주재처로숭상 받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선도산의 아래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하여 서악리고분군 및 무열왕 후손의 묘가 있으며 불상은 선도산에서 이들 고분군을 내려 보는 것 같이 조성되어 있어 지리적 위치 또한 주목을 받았다. 본고는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선도산불상의 조성시기와 조성목적을 살펴보았다. 조성시기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7세기 중엽으로 막연히 인식했으나 양식적 특징을 살펴 본 결과 650~670년경의 조성으로 판단된다. 또한 선도산불상이 아미타삼존인 점에 주목하여 조성시기에 즈음한 아미타신앙의 형태를살핀 결과 이는 ‘死者의 극락왕생을 위한 追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功德으로 死者의 극락왕생을 비는 믿음’에서 조성된 것이라 하겠다. 덧붙여 이러한대규모의 불사는 일반 백성의 의지로 보기는 어렵고 지리적인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불상의 발원 세력은 왕족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도산불상은 무열왕대에 先代의 왕생을 빌며 발원했거나 혹은 문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불상의 양식을 고려하면 650년경을전후로 한 시기에 무열왕의 발원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와 같이 선도산 불상은 왕실에서 발원하여 대규모로 조성되어 당대의 신앙형태를 충실히 반영한 작품으로 신앙적인 면에서나 조각사적인 면에서 가치를 재조명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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