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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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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1888-1985)는 1930년대 말 주권국가의 영토를 넘어선, 새로운 국제법적 단위로서 ‘광역’(Grossraum) 개념을 제안한 바 있다. 광역이란 개별 국가가 갖는 공간적 제한이나 지나친 확장력을 극복하고자 제안된 개념으로서,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새로운 지구적 지역주의의 영토적 단위”이며, 세계를 지구라는 공간개념과 지구적 차원에서 보고자 하는 시각의 변화를 드러내는 용어이다. 본 글에서는 우선 슈미트가 명확하게 의미를 밝힌바 있는 지역주의적 공간이론의 구체적 내용과 구성 및 이론의 성립배경을 확인하고, 이론이 갖는 의미를 역사적으로 측정하였다. 슈미트가 제안했던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오늘의 상황에 그의 이론을 대입하고자 한다면 맥락에 맞지 않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슈미트의 문제제기를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서 확인하는 작업에서 시작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그의 이론이 오늘날 동아시아 지역에 적용 가능한 틀로 작동될 수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점검하였다. 그의 역사에 대한 노모스적 해석, 국제법과 국제질서에 대한 재구성, 자신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서 나온 통찰 등, 지정학적 인식을 근간으로 하는 슈미트의 세계질서 구상은 우리에게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끔 한다. 그는 지정학적 조율을 통해 현실적으로 지구라는 공간과 국제관계 사이의 권력의 균형을 추구해 나가는 작업을 제시했다. 그의 광역이론은 소수의 지역적이고 문화적으로 서로 구분되는 권력블록들 간의, 전지구적이며 평화적으로 형성될 균형의 가능성을 제공하며,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단극적 세계질서에 대한 다원적, 현실적 대안을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제안이 2차 세계대전 시기 서구의 몰락이라는 상이한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연구는 독일 석탄산업의 환경사를 19세기 말 산업화부터 현재까지 라인루르 탄전을 중심으로 검토한다. 독일 석탄산업이 환경문제와 맺어 온 관계를 해당 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 및 이와 결부된 사회적 가치 및 태도의 변화를 통해 고찰한다. 독일의 광공업은 국가 경제적 중요성 때문에 법적 행정적으로 보호받아 왔으며, 이로부터 광산 피해와 환경문제에 냉담한 아비투스를 발전시켰다. 여기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1864년의 프로이센 광산법이었다. 이 본질적 태도는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 탈산업화로 특징지어지는 중공업 쇠퇴와 사회경제적 구조변화, 그리고 생태주의의 도전은 1980년대 들어 광공업을 둘러싼 사회적 가치와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광공업의 특권적 지위는 사회적으로 도전받으며 침식되었다. 이 과정에서 광업의 생태적 전환은 그 자체의 점진적 소멸로 수렴되었다.
오늘날 독일 도시들의 구시가지에서 목격되는 건물들은 대체로 1945년의 종전 이후에 재건된 것들이다. 전쟁 중에 입은 대대적인 파괴로 인해 도시는 재건되어야 했다. 전후의 결핍 상황에서 현대적 건축보다는 옛 시대의 양식의 건물들로 지어진 구시가지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단지 긴급한 주거공간의 마련만이 아니라 도시 외관의 연속성을 복원하는 데에 재건의 중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 논문은 독일 프라이부르크 시가 구시가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전개해온 역사적인 작업을 고찰한다. 정치적으로 독일이 대면하고 청산해야 할 과거가 있듯이 이 도시는 재건을 통해 건축적, 도시계획적인 과거를 정화하고 새롭게 하는 기회를 갖는다. 프라이부르크가 900년 전의 창설시기부터 원칙으로 삼았던 도시공간의 개념을 재발견하고, 역사를 과시적 도구로 삼았던 역사주의의 장식을 제거하며, 역사를 건너뛰는 실용주의에 함몰되는 근대 건축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전후 독일 도시의 재건에서 프라이부르크에 부여할 수 있는 특별한 의미는 이 작업의 전제가 되는 전쟁의 파괴가 벌어지기 훨씬 이전, 1930년대부터 이 도시가 이에 대한 구상과 조처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느 도시보다 앞선 준비였다. 그러나 재건 작업의 출발 시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프라이부르크는 제3제국 시기에 이루어진 재건작업이었음에도 후에 배제되거나 수정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치 과거로부터 일찌감치 상대화된 정책적 유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이 도시의 건축 및 도시계획 책임자인 슐리페의 ‘복원’ 개념이 있었다. 파괴된 구시가지를 재구성하는 데 집중된 전후 프라이부르크의 재건은 과거에서 미래의 정향까지 이르는 집단적인 역사해석 작업이었다.
남한과 서독은 같은 분단국가였지만 이들이 처한 분단현실은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동서독은 남북한과 같이 한국전쟁 같은 ‘내전’을 경험하지도 않았고, 특히 서베를린의 존재는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이후에도 제한적으로나마 동서독 간에 인적·물적 교류가 이어지게 만들었다. 동독을 승인하거나 동독과 수교하는 나라들과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Doktrin)이 1967~1968년 시점에서 서독에서 아직 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독이 처한 분단환경의 차이는 남한보다 ‘유연한’ 반공주의를 만들어냈다. 1960년대 중반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간에 정치적·군사적 긴장이 극대화되고 있었다. 북한은 남조선혁명론에 입각해 대남침투와 군사적 도발을 강화하는 한편, 베트남전쟁에서 북베트남을 지원·참전하기도 하였다. 한반도의 긴장상황은 1968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전쟁위기로까지 극대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남한사회내에서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한편, 동백림사건과 같은 공안사건들을 만들어내어 집권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이용하였다. 1967년 6월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동백림사건 해외관련자 연행사건을 계기로, 게다가 이듬해 일어난 푸에블로호사건과 그로 인한 전쟁위기를 바라보며 서독사회는 자신들과 다른 한반도 분단상황과 반공주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언론보도를 통해 나타난 서독의 한반도 분단문제 인식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로 서독사회는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라고 인식해왔지만, 소련 및 중국과 관계 악화 이후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인지하게 되었다. 이는 1960년대 중반 이후 강화된 북한의 군사적 공세가 소련이나 중국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보았던 서구세계의 일반적 인식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서독언론들은 북한이 같은 사회주의 진영 국가이면서 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여 있던 북베트남과 연대하며, 한반도에서 이른바 “아시아 제2전선”을 형성해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는 모습에 주목하였다. 둘째로 서독언론들은 박정희 정권이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강력한 반공정책으로 인해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았다. 남한 반공주의의 경직성은 개인적 차원의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에 해당되는 동백림사건 관련자들의 행위를 간첩죄로 단죄하고자 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 모든 형태의 접촉을 금지하는 한편, 4월혁명 이후 남한사회 내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던 통일논의 자체를 억제시키고 있었다. 서독언론들은 박정희 정권이 강경하고 경직된 반공주의를 추구하게 된 요인으로 “두려움”에 주목했다. 셋째로 박정희 정권이 공동의 반공투쟁이라는 명목 아래 서독 측이 중앙정보부의 동백림사건 해외관련자 연행에 대해 이해해주기를 바랐던 반면, 서독사회는 소위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를 “범죄”로 규정하면서 그러한 행위가 오히려 진정한 반공투쟁을 방해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게다가 남한이 진정으로 한반도 통일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에도 집중해야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서독의 언론보도들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취사선택하며 여전히 반공투쟁에만 몰두하였다.
이 글은 유럽인종주의 역사에서 세기 전환기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휴스턴 스튜어트 챔버레인의 인종관과 종교관을 다루고자 한다. 영국 태생인 그는 일찍이 독일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프랑스 인종주의자 고비노의 영향 아래 아리안주의와 반유대주의적 사고를 정립해 갔다. 그의 인종주의는 19세기 후반 성장하고 있었던 독일의 극우세력에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나치즘에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제공했다고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인종주의는 극우라는 일단의 정치세력을 넘어 광범한 독일 교양시민계층에 강한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이런 맥락에서 주목될 수 있는 것이 1897년 출간되어 널리 보급된 『19세기의 토대들』이란 그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통상적인 역사교양서를 표방하는 듯했으나 철저하게 그가 확신 한 인종주의적 관점을 중심에 두고 유럽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특히 이 책은 종교, 그중에서도 기독교의 역사에 큰 비중을 두고 유럽사를 읽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그에게 기독교는 ‘게르만 인종의 종교’였고,또 그는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역사를 재해석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그의 태도는 단순히 역사해석의 차원을 넘어 ‘기독교의 쇄신 내지 개혁’이란 실천적 요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그의 종교인식의 목표는 궁극적으로는 인종주의적 세계관의 확산에 있었다. 이 글에서는 챔버레인의 문제작 『토대들』을 통해 전형적으로 나타난 인종주의적 종교인식의 면모를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나아가 그의 종교인식이 세기말 인종주의 담론의 확산에 동원되어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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