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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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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서양 중세 역사가 오토 폰 프라이징이 쓴 연대기와 전기에 나타나는 역사관이 무엇인지를 살핀다. 특히 황제와 교황의 관계에 대해 역사가인 오토가 어떻게 기록했고,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두 저서를 통해 분석한다. 구체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콘스탄츠 협약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는 먼저 콘스탄츠 협약을 확인하며 황제 바바로사 개혁정치의 성격을 규명한다. 다음으로 오토의 두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특성을 살핀 후, 두 작품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한다. 아울러 연대기와 전기의 특징을 비교함으로써 바바로사의 개혁정치에 대한 역사가 오토의 역사관을 조명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헤레로 전쟁을 둘러싼 논쟁이 갖는 교육적 잠재력이 “갈등의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문제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최근 독일 역사가들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일어난 인종학살과 홀로코스트 간의 연속성을 지적해 왔으며, 그 주된 근거로는 인적 연속성(나치 추종자가 된 식민지 통치자)과 이념적 평행성(인종주의적 차별)이 거론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헤레로 족과 나마 족 대량학살을 식민주의라는 트랜스내셔널 현상의 일부로 간주하는 역사가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헤레로 전쟁 백주년 기념의 해인 2004년을 계기로 이 주제는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독일 역사교육 또한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의 영향 하에 식민주의 수업의 혁신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다원적 관점과 논쟁성이라는 교육학적 원칙이 역사교육과정과 역사수업에 도입되었다. 헤레로라는 핵심어가 교육과정에 등장한 주는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안할트 뿐이지만, 최근 독일 역사교과서는 인종학살에 대한 공식 사죄와 배상, 독일과 나미비아의 분리된 기억문화 및 전쟁의 장기적 결과 같은 주제들에 점차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이처럼 헤레로 전쟁은 역사교육의 목표인 다원적 관점과 논쟁성의 함양 및 타자이해의 증진에 활용되고 있다.
본 논문은 나치 역사의 그늘 아래 “실패한 역사”로 해석되어 온 바이마르 공화국을 신중하게 재조명하고자 했다. 현재 연구사에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 즉 이미 1919/20년 공화국 수립기에 부과된 과중한 부담과 인플레이션과 대공황으로 이어진 역사적 격변 상황, 그 결과 초래된 사회적 갈등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공화국 성립 초기, 패전이라는 현실의 부정은 과거 체제 및 엘리트들과의 단절을 어렵게 했으며, 이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갈등은 이미 좁았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행동반경을 국내, 국제 정치적으로 더욱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심지어 대공황기 브뤼닝 정부의 디플레이션 정책에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다수 독일인들이 신생 공화국에게 갖고 있던 커다란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야 했던 바이마르 국가에게 이러한 현실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동안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문제, 즉 서방 연합국이 당시 실행한 독일 문제 해결 방안과 다른 대안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지 문제를 제기하게 되는 이유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초기에 공화국을 지지했던 독일 국민들은 혁명의 혼란과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구제국이 남긴 구조적 문제와 패전의 짐이 초래한 심각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구 엘리트층, 노동자, 중산층이 체감한 현실의 어려움은 각각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우선 참정권 보장, 대등한 노사협약제도, 사회 복지 정책의 성과 등 공화국 수립은 다수 노동자들에게는 커다란 성과를 가져다준 반면, 중산층은 이전 시대에 비교 할 때 상대적 박탈감을 피할 수 없었다. 신생 공화국으로부터 전쟁으로 인 한 영업상의 손실을 보상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인플레이션은 그들의 존재 기반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농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이마르 정당으로 부터의 민심 이탈이 그 결과였다. 대공황 당시 대량 실업의 최대 피해자는 노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공화국 시기 가시적 성과를 체험한 노동자들보다 더욱 커다란 위기의식과 공화국에 대한 불만을 느낀 것은 중산층이었다. 사실 인플레이션과 대공황 당시 중산층의 위기와 정치적 우경화 현상은 연구사에서 지속적으로 다뤄진 문제이다. 하지만 본 논문은 시작부터 몰락에 이르기까지 한편엔 바이마르 공화국이 처했던 국내, 국제 정치적 현실, 그리고 해결해야 할 과중한 과제들, 다른 한편엔 혁명의 혼란과 인플레이션, 대공황을 겪으며 상실감과 고통을 겪었던 독일인, 특히 중산층의 현실 적 문제들에 대한 균형 잡힌 조망을 시도하였다. 역사적 현실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를 “실패”로 보는 해석은 비역사적이 라는 문제의식에서였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룩한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성과는 새롭게 의미를 갖게 된다.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룩한 다양한 역사적 성과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은 새로운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본고는 독일 68운동의 전사와 배경이 되는 서베를린 학생들의 시위를 다룬다. 동서 냉전의 전선도시 베를린에서 시작된 1960년대 중반의 이런 비판과 저항은 1967년 6월, 다시 베를린에서 폭발하는 68운동의 중요한 전사를 이룬다. 이들 저항을 통해 독일 68은 본격적인 준비기를 거치며 이후 시위와 동원의 잠재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 68운동을 설명할 때 베를린 저항은 필수불가결한 전제를 이룬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주요한 사건이 재구성된다. 하나는 1964년 콩고 독재자 모이세 촘베의 국빈방문에 맞선 항의와 시위이고, 다른 하나는 1965-66년 자유대학에서 집회와 저항이다. 제3세계와 연대하며 식민주의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전자의 사건은 베를린 학생들이 벌인 최초의 정치적 시위로 기록된다. 자유대학을 뒤흔든 후자의 사건은 학생들이 자유발언의 권리를 지키고 대학 내 기구의 실질적인 참여를 확보하기 위한 저항으로, 68운동의 주요한 쟁점을 예고한 것이었다. 자유대학 학생들이 중심에 선 60년대 중반 서베를린의 시위는 한편으로, 67년 6월 2일 사건으로 폭발할 독일 68운동의 전사이자 예행연습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동서냉전의 격심한 대립 속에서 보수적인 반공주의 주류 여론과 다른 목소리를 냄으로써, 냉전의 거대한 빙벽에 최초의 균열을 내는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서베를린 학생들의 저항이 보수적인 반공주의 주류 여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목소리를 냄으로써 냉전으로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 조그만 변화의 씨앗을 심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1960, 70년대 서독의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통합적 교육정책의 시작과 발전을 연구하였다. 독일 연방공화국은 1960년부터 다른 국가들로부터 대규모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 외국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급격한 유입과 정착은 주요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는데, 특히 이주민 자녀 교육문제는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관련 정책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주아동과 청소년 교육정책의 기본이념으로 ‘통합’의 개념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오늘날 다문화교육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통합적 교육정책은 사실상 ‘분리’ 또는 ‘동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비판받았다. 그것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현실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통합적 교육정책의 실체를 규명하고 기존의 해석에서 비판받았던 부분을 다시 되짚어보고자 했다. 무엇보다 통합의 개념이 무엇이고 그러한 교육정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분석하였다. 그것을 통해 그 진행과정 중에 나타났던 어려움과 부딪쳤던 한계점을 밝혀보고자 했다. 이것을 위하여 유럽적 차원의 통합적 교육정책을 검토하고 실제 정책적 조치가 이루어졌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구체적인 사례를 다루고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교육문화부장관협의체(KMK)를 통해 이주노동자 자녀를 위한 교육정책의 방향이 제시되었다. 초기에 그 정책은 단순히 독일내 외국인 아동과 청소년에게 일정한 학교교육을 제공하는데 머물러 있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어 이주민의 정체성과 문화적 배경을 존중하는 ‘통합’의 개념이 교육정책에 적용되었다. 이 개념은 당시 서유럽국가들의 협력회의에서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된 것이다. 서독에서는 연방주들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교육정책이 채택되었는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은 분리보다 통합에 정책적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다. 이주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독일 학교의 학생으로 동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학교와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돕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주민 자녀들의 어려움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지 못하거나 졸업증을 얻지 못하는 비율이 여전히 높았다. 그것은 학교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학급에서 소외를 겪는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들을 위한 조치들이 과중한 학업부담을 주거나 지원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발생했다. 더 나아가 독일의 가치관과 규범을 중심에 놓는 통합정책은 이주아동과 청소년을 고려하지 않는 동화정책으로 여겨지며 이민사회의 불만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들의 정체성과 문화상대성을 존중하는 이상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교육당국이 정책을 전적으로 주도하면서 한계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전반의 관심과 장기적인 정책들이 꾸준히 투입되어야할 과제로 남겨지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1979년부터 1992년 사이에 두 사람이 교류한 서신들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관계 및 정책, 사상, 삶을 조명해 보았다. 이 서신들에 의하면 두 사람은 1973년 김대중의 동경 납치 시기부터 1992년 빌리 브란트가 타계하기 까지 20년 동안 깊은 인간적 그리고 동지적 관계를 발전시켜 갔다. 두 사람 사이의 서신 내용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서신 내용들과 맥락적인 연계 속에서 또한 여러 중요한 사실들을 제시해 주었다. 예를 들어, 1979년 10·26 사태 이후 서독에서 있었던 한국의 사회민주당 창당 움직임, 1980년 김대중의 사형이 예견되던 시기에 브란트의 사람들과 한국 정부 사이에 논의되었던 김대중을 유럽으로 망명 시키는 내용 등도 이 시대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지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사안들이었다.
서로 다른 문화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문화적 접촉이 증가하는 글로벌 시대에 ‘문화’를 동질적이고 분리된 단위로 간주하는 생각은 지양될 필요가 있음에도, 문화를 단일한 범주로서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사고는 여전히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문화적 경계를 넘는 한 개인의 직접적인 경험은 이러한 문화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본 연구는 한 사례연구로서 한국의 독일 선교사이자 독일의 한국학 학자였던 안드레 에카르트(1884-1974)에게서 상호문화적 혹은 트랜스컬처럴 상호작용 혹은 혼종 문화의 발전 흔적들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에카르트의 경우, 먼저 한국의 독일 선교사로서 후에는 독일의 한국학자로서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주로 자신의 문화, 독일 문화에 근거하여 한국 문화를 인식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두 문화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했다. 1909년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의 독일 선교사로서 활동했던 에카르트는 동서양에 대해서 이분법적 사고를 보유하고 독일 문화와 한국 문화 사이에서 대조되는 점과 비교 점들을 연구했으며, 또한 문화의 혼종성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1928년 독일로 돌아간 후 독일의 한국학자로서 활동했던 에카르트는 민족적, 문화적 경계를 ‘실질적으로’ 넘었는데, 그의 연구 중심이 ‘단일적인’ 것에서 ‘상호적인’ 그리고 ‘혼종적인’ 것으로 이동하면서 상호문화적, 트랜스컬처럴 상호작용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국의 독일 선교사와 독일의 한국학 학자로 활동하면서, 그의 삶을 통해 두 문화의 중재자가 되었다. 에카르트 개인의 경험과 연구들을 검토해 본 결과, 민족적, 문화적 경계가 사실 ‘유동적인’ 것이며, ‘변화 가능한’ 것으로서 문화들의 만남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이동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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