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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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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매체사의 관점에 입각해서 30년전쟁을 바라보는 당대 독일인들의 인식세계를 재구성하고 전쟁에서 시사간행물이 수행한 역할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전쟁 기간 중 벌어진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필자는 1631년 5월 20일, 황제군과 가톨릭 동맹군의 총사령관인 틸리가 이끄는 군대가 개신교 도시 마그데부르크를 함락, 파괴한 사건을 다룬 언론보도에 주목했다. 도시가 함락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극심한 살육전과 약탈, 대규모 화재로 인해 3만여 명이 넘는 주민 가운데 최소 2만 명가량이 희생된 비극적 참상이 이미 당시에 중요한 시사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은 1631년 말까지 출간된 간행물 중에서 최소 205종의 소책자와 41종의 전단지가 이 소식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잘 드러난다. 비록 틸리가 전투에서 승리 를 거두기는 했지만 마그데부르크의 참상에 대한 개신교 진영의 보도가 가톨릭 군의 ‘잔학상’을 널리 알리면서 효과적인 선전전을 벌였고 그 결과 전세를 반전시키는 데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최초의 근대적 미디어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소책자와 전단지들이 마그데부르크 함락 및 파괴를 보도하면서 해당 사건을 논평하기 위해 어떤 개념 틀을 활용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여러 시사 간행물 속에 빈번하게 자주 등장하는 문학적 모티프가 눈길을 끄는데, 도시의 이름에서 비롯된 ‘처녀(Magd)’로의 의인화와 도시 함락을 ‘혼인식’에 빗댄 은유적 표현기법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동일한 모티프를 소재로 삼았다 하더라도 신ㆍ구교 측의 선전방식은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가톨릭 측에서 마그데부르크 정복을 ‘콧대 높은’ 처녀에 대한 틸리의 성공적인 구혼과 혼 인식에 비유했다면, 개신교 측에서는 틸리를 ‘처녀겁탈자’로 낙인찍고 신부가 이에 저항하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마그데부르크 혼인식이 내포하고 있는 강압적인 폭력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특히 개신교 측 선전매체의 이런 설명방식은 독자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왜냐하면 도시가 약탈당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민간인 여성에 대한 용병들의 성폭력이 광범위하 게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그데부르크 함락과 관련해서 실제 일어난 사건과 우의적 해석이 수렴되는 것을 통해, 개신교 측 저자들은 선전매체의 설득력을 한층 더 높이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 논문은 근대적 반유대주의의 태조라 불리는 빌헬름 마르를 중심으로, 반유대주의 담론이 인종주의와 결합하면서 어떠한 질적 변화를 겪었는가를 연구하였다. 전통적인 반유대주의는 종교적이거나 문화적인 혹은 사회적·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유대인의 특정 측면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반유대주의와 달리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그 자체’에 집중 하였다. 보수주의, 급진 민족주의, 식민지 인종주의, 사회다윈주의 등의 모든 언어를 동원하여 유대인을 우리를 위협하는 ‘적대적 인종’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의 원흉인 악마적 인종’, 그것도 모든 것을 ‘유대화’할 정도로 가공할 능력을 지닌 ‘악마적 인종’으로 추상화시켰다. 이와 동시에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종말론적인 인종투쟁 사관을 통해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세계관적으로 정당화시켰다. 이에 의하면, 역사는 빛의 세력인 우리와 어둠의 세력인 유대인종과의 투쟁의 역사이며, 현재는 유대인종의 최종적 승리와 우리의 멸망을 바로 목전에 둔 역사의 마지막 환란 단계이다. 따라서 유대인종에 맞서는 최후의 결전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새로운 편견과 표상들을 만들어 냈다기보다는 기존의 유대인에 대한 온갖-때로는 서로 모순되기까지 했던-정형화된 편견들과 부정적 표상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이데올로기적 틀을 제공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영국군 점령지역에서는 탈나찌화의 이름으로 국가사회주의 단절작업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46년 대부분의 대학들이 수업을 재개하면서 교육정책 수립이 시급한 사안이 되었으며 군정청은 고등교육정책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인식해야만 했다. 본 논문에서는 영국 군정청 점령지역에서의 고등교육개혁을 주목하고 전후 서독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초기단계에서 어떤 논의와 결정이 이뤄졌는지 고찰하였다. 본 논문에서 다루는 ‘북서독일 고등교육회의(Nordwestdeutsche Hochschulkoferenz, NWK)’는 1949년 WRK(서독 총장단회의)가 설립되기 전까지 영국 군정청시기 대학과 고등교육의 방향에서 매우 중요한 기틀을 잡았던 회의였다. 이 고등교육회의는 1945-1948년까지 영국과 미국의 점령지역에서 총 16번 개최되었고 그 중 영국군 점령지역에서 13번의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가 이후 서독 총장단회의(WRK)로 연결되는데 있어서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고 지속력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독일 고등교육의 새로운 시작과 방향을 모색하는 가운데 당시 영국군정청이 독일의 전통과 새로운 이념과 제도 사이에서 취한 생각과 태도, 또 이때 논의되었던 회의내용들이 전후에 고등교육에 있어서 어떤 토대를 마련하는지 고찰하였다. 결과적으로 독일 고등교육개혁의 설립 초반기에 두드러지게 관찰할 수 있는 점이 고등교육의 전통적 특징들을 복원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 군정청의 교육관계자들이 교육적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한 방향의 교육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러한 방향설정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본 연구는 전후 초기 고등교육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기초가 되므로 추후 서독의 고등교육의 발전과 방향에 대한 후 속 연구들을 촉진하는데 기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논문은 1960, 70년대에 중등학교제도 개혁에 관한 기민당의 교육정책을 연구하였다. 1960년대 그 정당의 교육정책에서 나타난 개혁지향적인 변화와 그것에 상반되는 1970년대 보수적인 경향으로의 전환을 살펴보고, 그러한 과정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분석해보고자 하였다. 그것을 통하여 보수적 지형에 속한 정당의 교육정책의 특징과 개혁에 대한 한계점을 밝혀볼 수 있다. 1960년대 사회·경제·문화적 변동들은 독일연방공화국의 교육 분야에서 전례 없는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였다. 현대화와 민주화와 연관된 교육체제의 개혁은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하지만 기민당 교육정책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변화를 꺼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김나지움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학교시스템과 오랜 종교적인 영향력의 유지를 옹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육개혁은 그 정당이 새로운 정책을 만들도록 유도했다. 기민당의 교육정책에서 종교적인 성격이 사라지고, 개혁지향적인 정치가들과 젊은 당원들은 새로운 변화에 보다 능동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 시기에 기민당은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하고, 다른 정당과의 경쟁과 공동작 업을 통하여 교육개혁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렇게 국민학교 개혁과 종합 학교 도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개혁적인 흐름은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1960년대 말부터 당의 교육프로그램 내용의 재정립을 둘러싸고 개혁과 보수적 흐름의 주도권 다툼이 나타났다. 그리고 교육개혁의 급격한 확대를 요구하던 사민당과의 대립으로 기민당 내 여론은 보수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져 갔다. 더불어 경기의 하강은 당의 교육정책이 급격히 보수적 흐름으로 기울어지게 했다. 1970년대 중반 당 내부에서 개혁파들과 그들의 정책은 더 이상 지지 받을 수 없었다. 검토 중이던 개혁적 정책들은 폐기되고, 더 이상 논의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기민당 교육정책은 ‘새로운’ 보수적인 방향으로 전환 되었다.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은 현재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전 세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독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출산율 회복을 위한 법적·제도적 노력을 꾸준히 시행하고 있다. 또한 출산율 증가를 위해서는 다양한 양육정책과 가족 복지적 측면에서 국가적 차원의 지지가 필요함을 인지하고 입법 을 통한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최근 독일의 출산율의 상승은 아동양육을 위한 아낌없는 정부 정책과 지원의 결과다. 독일의 출산장려정책은 노동법 및 사회보장제도를 가족 친화적으로 개선하고, 보육시설을 확충하여 직장과 자녀양육을 병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출산율을 높이고 인구 구성비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전제조건은 가족 친화적 법제, 노동시장에서의 남녀에 대한 평등한 대우, 전통적인 남녀관 내지 결혼관의 타파, 결혼제도에 대한 각종 특혜의 폐지, 영·유아에 대한 공공 보육 시설의 확충 등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아동양육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정책과 제도적 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구절벽, 저출산의 문제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에 정부의 적극적인 양육지원 정책과 법적 토양 마련 만이 출산율을 높이고, 미래의 대한민국이 인구절벽의 마지막 낭떠러지에 처하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베르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 에 나타나는 독일 법문학의 양상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법문학이라는 학제적인 연구는 법철학, 법사회학, 법경제학과 아직 활발한 연구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일찍이 법을 다룬 문학작품들은 괴테, 클라이스트, 뒤렌마트, 카프카등에 수 없이 많은 작가들에 의해 쓰여져 왔다. 197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 법문학연구는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Poetie Justice 란 책을 통해서 더욱 발전된다.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진 법적 상상력은 재판관의 제한적인 판단을 확장시켜주고, 이러한 확장된 판단을 통해 옳고 그른 판단을 하기 위한 기폭제 역할을 한다. 초기에 문학에 나타나는 법적 양상들을 연구하는 문학에서의 법 에서 문학을 통한 법의 다양한 모습을 구현하는 문학으로서의 법 으로 법문학 운동은 발전 전개되어져 왔다. 책 읽어주는 남자Der Vorleser 의 저자 슐링크 역시 법학자로서 보아왔던 법적인 문제들을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글로 표현하였다. 법률 불소급 문제, 과거의 죄, 자연법과 실정법의 경계등의 그간 법학에서 논란이 되어왔던 주제들을 주인공 미하엘과 한나의 이야기로 풀어나가면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또한 그는 뉘른 베르크 전범재판과 같이 2부에서 전범자였던 한나의 재판을 미하엘의 관점에서 보여준다. 독일에서 실제로도 있었던 전범재판은 나치시대의 전범자 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려는 자들와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전범자들 의 모습을 법학도 미하엘이라는 관찰자의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미하엘은 재판을 단순히 관찰자의 시점에서 지켜보다가, 점점 재판에 빠져 들게 되고, 결국 그는 재판의 참여자가 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첫사랑이였던 전범자 한나의 문맹을 알아내지만, 침묵으로 묵인해버린다. 결국 한나의 문맹은 밝혀지지 않은 채 한나는 중형을 선고받게 된다. 결국 미하엘은 자신이 비난하던 전쟁세대의 ‘침묵’과 ‘방조’처럼 자신도 ‘침묵’하고 내버려 둔다. 이러한 그의 침묵은 결국 글을 통해서 치유되고, 스스로 나치수용소의 피해자이였고 생존자이기도 한 여인에게 ‘한나와 자신의 부적절한 관계’ 를 털어놓음으로써 침묵에서 벗어나게 된다. 저자 슐링크는 이러한 한나와 미하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어두운 과거의 역사를 처벌하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이고, 과연 누구까지 처벌받아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는 늘 의문되어진다. 본 연구자는 문학에서의 나타나는 다양한 법과 역사, 사회의 모습들을 분석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2차 대전 후 3 세계로부터 서구 자본주의 국가를 향해 간호이주가 진행 되었다. 이는 오늘날 “ 이주의 여성화 “ 현상에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노동력 저평가 현상을 바탕에 둔 현대 자본주의의 한 양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당시 역사적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 고유한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19세기 이래로 사회 서비스 주체 기관에 속했던 독일 가톨릭은 2차 대전 후 개인 사제가 중개하는 간호학생 이주 문제를 주목하고 그것의 윤리적, 법적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의료와 양로 등 사회서비스 제공기관으로써 역시 노동력 부족문제를 겪고 있던 가톨릭은 간호학생 중개를 근본적으로 막기 보다는 중개과정을 정상화함으로써 인력문제를 해결 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간호이주자 전제를 대상으로 지원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가톨릭 교회의 이런 행동들은 당시 독일사회가 제 3세계로부터 노동력을 유입하고 활용하는 일을 일종의 개발원조 차원으로 이해했던 바에 기인한다. 국민의 의료와 요양의 사회적 권리 실현을 위한 복지국가와 정치적 독립 후 경제적 근대화를 지향하는 제3 세계국가 사이에는 개발원조 명분과 노동력 확보의 필요가 적절히 조합된 관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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