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기관 내 간행물

  • 간행물 내 검색 검색
  • 간행물 또는 권/호를 "-전체-" 선택하시면 통합 검색이 가능합니다

독일연구

검색결과 :
8
전체선택 Endnote Refworks
30년전쟁기에 황제군 총사령관으로 맹활약하면서 페르디난트 2세의 권력 강화에 기여했다가 스스로 보헤미아 국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자객들에 의해 피살된 발렌슈타인은 당대나 지금이나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는 점에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이미 생존 시부터 그를 둘러싼 수많은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점성술에 심취한 발렌슈타인의 이미지는 오늘날까지도 전문 연구자 집단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일반 대중들까지도 매료시키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본래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부터 비롯된 점성술은 헬레니즘 시대의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학문적 토대가 정립된 이후 기독교계의 끊임없는 견제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다가 르네상스를 거치며 부흥기를 맞이했다. 근대 초기 유럽의 수많은 군주와 성ㆍ속 제후들은 점성가를 이른바 ‘궁정 수학자’로 등용해 그들의 예측을 통치에 활용하곤 했는데, 발렌슈타인 역시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이자 점성가였던 케플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케플러는 1608년과 1625년 두 차례에 걸쳐 발렌슈타인의 출생 천궁도를 제작했고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황제군 총사령관의 전속 점성가로 봉사하기도 했다. 발렌슈타인이 케플러에게 두 차례나 천궁도 작성을 의뢰했고 케플러의 사망 이후에도 ‘제니’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출신 점성가를 고용하는 등 점성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또한 발렌슈타인이 천궁도를 잠재적인 경쟁자나 적대자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일종의 부가적인 정치ㆍ군사적 정보로 간주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중요한 정치ㆍ군사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발렌슈타인이 점성술적 조언 및 판단에 맹목적으로 의존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논리는 1620년대 후반부터 가톨릭 진영 내부의 발렌슈타인 반대파가 주축이 되어 조직적으로 유포시킨 과대 포장된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 그들은 점성술의 이교적인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발렌슈타인에 대한 황제의 불신을 증폭시키거나, 그의 암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황제군 총사령관의 ‘점성술적 자만심’이 반역의 원인이 되었다고 강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의 초기 전기 작가 중에서는 점성술 심취와 관련된 허구적 서사를 가공해냄으로써 현재에 이르기까지 후세인들이 발렌슈타인 ‘신화’를 되풀이하도록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실러의 표현처럼 적들이 살아남아 그의 역사를 쓴 것이 발렌슈타인의 불행이었던 것이다.
식민지에서 ‘원주민의 노동으로의 교육’과 관련하여 식민주의자들과 일정 부분 목표를 공유했던 기독교 선교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들이 원주민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복음’이 ‘노동의 복음’이었는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지를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활동했던 독일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고자 했다. ‘원주민의 노동으로의 교육’과 관련해서 신속한 시간 안에 경제적인 이익을 내고자 했던 식민주의자들과 시간이 걸리더라도 원주민의 내면 변화를 통한 교육을 추구했던 선교사들은 상이한 방법을 옹호했다.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정부의 권위에 기대어 노동의 의무와 같은 ‘직접적인’ 강제노동을 주장했던 데 대해서, 선교사들은 대체로 ‘직접적인’ 강제노동에 반대하고 세금과 같은 ‘간접적인’ 강제노동을 옹호했다. 하지만 선교사들 중 소수는 식민주의자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원주민의 내면 변화를 통한 노동교육에 사용한 방법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였다. 선교사들 자신들이 ‘기도와 노동’하는 삶을 본보기로 보였고, 선교학교는 지적 교육과 노동교육을 병행함으로써 ‘노동학교’ 역할을 했다. 이때 식민정책 관련자들은 특히 가톨릭 선교회의 활동을 ‘labora et ora’로 이해하면서 칭찬했으며, 개신교 선교회의 활동 ‘ora et labora’를 비난하는 근거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양 교파 모두 선교활동에서 ‘labora et ora’를 실천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독일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에서 원주민의 ‘노동으로의 교육’을 통해서 추구한 목표는 식민주의자와 차이가 있었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원주민의 ‘문명화’라기보다는 ‘기독교화’였다. 이때 원주민의 경제적 자립이 중요했는데, 이것은 원주민이 선교회와 본국 독일제국을 위해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아프리카 원주민 자신들을 위해서 경제적 자립을 주장했다. 원주민의 경제적 자립 없이는 아프리카에서 장기적인 기독교 선교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활동했던 독일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회가 ‘원주민의 노동으로의 교육’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한 궁극적인 목표가 유사했던데 대해서, 그 과정에 대해서는 조금 달랐다. 가톨릭 선교회가 노동으로의 교육을 아프리카인을 보다 높은 문화 수준으로 교육시키는 수단으로 간주한데 대해서, 개신교 선교회는 도덕을 향상시키는 이교도 선교의 결과가 노동으로의 교육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활동한 독일 양 교파 선교사들이 전하고자한 ‘기독교의 복음’은, 식민주의자가 선교회에 요구한 그들의 ‘노동의 복음’과는 일정 부분 달랐지만, 역시 ‘노동의 복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선교사들의 ‘노동의 복음’의 핵심은 기독교의 ‘노동윤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원주민의 기독교로의 개종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자립경제를 목표로 제시했다. 그들의 ‘노동의 복음’은 가톨릭 선교회의 경우에는 ‘모든 사람의 의무’와, 개신교 선교회의 경우에는 온 인류의 ‘직업’ 혹은 ‘소명’과 연결되어 설명되었다.
이 논문은 라트카우가 개시한 목재 위기 논쟁을 출발점으로 하여 독일 근대 임학의 성립과 그 역사적 의미를 검토한다. 목재 위기 논쟁은 독일 영방국가들이 당대의 목재 부족 현상을 실제보다 과장했다는 주장의 진위 여부를 가리고자 했다. 라트카우는 목재 위기 담론이 숲으로부터 보다 많은 재원을 창출하려는 절대주의 국가의 의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목재 위기는 ‘과학적 조림’을 통해 독일 숲의 가독성을 증대시켰으며, 독일인들을 ‘숲의 민족’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18세기 초 카를로비츠가 『산림경제』에서 제시한 지속가능성 개념은 독일 임학이 현대 환경주의에 남긴 유산이며, 19세기 초 작센과 프로이센이 각각 타란트와 에버스발데에 설립한 임학교는 독일 임업교육과 숲 연구의 산실이 되었다. 한편 경제의 지속가능성에서 환경의 지속가능성으로 발전한 ‘지속가능한 숲’ 개념은 나치의 인종주의 수사에 오용됨으로써 독일 현대사에 상흔을 남겼으며, 이는 숲의 역사를 정치사로 읽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연구는 1960, 1970년대 서독 교육개혁과 산업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오랫동안 산업계는 독일의 교육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상정되었다. 특히 전통적인 계급구조를 옹호하고 개혁을 반대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독일의 사회경제는 거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대량소비사회의 도래와 3차 산업의 발전은 계층구분의 약화와 산업구조의 전환을 야기했고, 그 결과 서독의 직업시장은 보다 높은 교육을 받은 노동력을 대규모로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에 산업계는 보수진영에 속한 세력들 중에서도 빠르게 대응하였다. 교육팽창은 물론이고 전통적인 학교시스템의 개혁을 요구했던 것이다. 본고는 서독 교육개혁과 산업계의 관계를 새롭게 조망해보고자 하였다. 무엇보다 교육개혁에 대한 산업계의 입장과 그것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 교육영역에서 산업계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가치가 무엇이고, 그것이 얼마만큼 교육정책에 관철되었는가를 분석하였다. 1960년대 초부터 경제단체들은 교육제도 현대화를 위한 국가의 투자를 요구하고, 모든 사회집단에 이를 지지해줄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기존에 직업교육으로 한정되었던 교육영역에 대한 경제단체들의 관여는 일반학교 교육으로 확장되었다. 중등학교 과정에서 새로운 경제 질서에 긍정적이고 기업에 친화적인 교육환경을 만들려 애썼다. 그러나 산업계의 교육개혁에 대한 지지는 197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약화되었다. 고등인력의 수요 충족, 성장둔화에 의한 재정적 부담 증가, 사민당 정부와의 갈등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종합학교 도입에 대한 경제계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산업계는 변화된 경제 환경에 적합한 효율적인 학교교육을 선호하였으며, 무엇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하였다. 그리고 충분한 인적자원을 양산하고 기업에 친화적인 시스템을 위한 교육정책을 원했다. 그렇지만 산업계의 경제지향적 요구는 시민사회의 저항을 부르기도 하였다.
여타 동유럽 국가의 1989년 혁명과는 달리 동독의 민주혁명은 주민의 대량탈출에 의해 촉발되었다. 대량탈출과 체제비판운동은 상호작용하면서 동독 체제붕괴의 민주혁명을 추동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이질적인 지향으로서 대립하기도 했다. 1989년 10월과 11월 신포럼을 비롯한 체제비판 단체들이 거리 시위와 단체와 정당의 조직화 활동을 주도했을 때에는 통일문제 보다 체제 개혁과 갱신이 정치 관심의 중심 주제였다. 하지만 11월과 12월 체제비판운동이 ‘제3의 길’을 내세워 서독과의 통일을 유보 내지 우회하려고 나서자 동독 주민들 다수와 체제비판운동의 일부는 더 이상 동독 국가의 존속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서독과의 통일이 체제 개혁의 완성을 뜻했다. 동독 주민 다수가 서독의 정치지도부의 통일공세에 조응하며 서독의 물질적 풍요와 새로운 삶의 더 많은 기회 획득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체제비판운동은 정치의 주변부로 내몰렸다. 동독 체제비판운동이 지닌 탈중심성과 기층민주주의적 성격은 결정적인 국면에서 더 이상 동독의 미래 전망으로 존중받지 못했다. 민주혁명은 독일통일로 발전했지만 그것의 중심 주체는 더 이상 애초 민주혁명의 주역들이 아니었다. 혁명 과정에서 급속한 통일로 방향 전환을 주도한 것은 민주혁명에서 정치화된 평범한 동독 주민들이었다. 민주혁명은 통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애초 민주혁명의 주역들이 내세운 ‘제3의 길’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동독 민주혁명은 초기부터 서독의 유인에 맞섰기에 독자 국가 존속 지향이 뚜렷했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서독과의 결합을 개혁의 완성으로 보는 흐름을 강화하기도 했다.
이 글은 과학사에서 한동안 잊힌 인물이었던 루브빅 플렉(Ludwik Fleck)의 방법론에 대한 개괄이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과학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했지만, 정작 쿤이 영향을 받은 플렉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사망한 후 약 20년 후인 1980년대부터 그의 연구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최근 과학사에서 그가 자주 호명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우선 리보브라는 곳에서 그의 이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역사적 배경을 그가 제시한 ‘사고교류’(Denkverkehr)를 통해 살펴보고 그가 제시한 ‘사고집단’(Denkkollektiv)과 ‘사고방식’(Denkstil)을 중심으로 그의 논지를 소개했다. 끝으로 그의 이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향후 과학사 연구에서 어떻게 더 활용될 수 있는지를 라투르의 이론과 관련해서 논의했다.
이 글은 독일에서 연원한 반기념비가 한국사회 기억문화의 지형에 일으키고 있는 변화상을 소개하고 그 성격을 규명한다. 소위 기념비적 역사를 가장 전형적으로 체현하는 매체인 기념비의 매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반기념비는 과거의 특정한 사건이나 사실보다는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를 재현하는 기념비다. 민족적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죄업을 기억하는 ‘경고비석’이라는 특유의 기념비 유형을 발전시킨 독일 현지에서도 기념비가 지닌 특유의 물화 를 극복하기 힘들다는 점은 베를린 중심부에 자리잡은 신위병소의 사례에서 드러난다. 국내의 <평화의 소녀상>과 <베트남 피에타>도 <4월 학생혁명 기념탑>과 <수호자상>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파시즘적 기념비 문화를 넘어서고는 있지만 평화의 통속적 알레고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한국형 반기념비의 맹아적 형태인 제주 4 · 3 평화기념관의 백비, 건축가 조성룡이 광주의 콜박스 사거리에 설치한 <기억의 현재>, 그리고 설치미술가 원지호의 <미리 지어진 전쟁기념물>은 보다 민주적인 기억문화의 장을 열고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