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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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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수당 제도는 아동이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아동 친화적 정책이며, 현대 복지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제도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출산 및 아동양육 법제는 이미 19세기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발전한 것으로 독일 노동법 및 사회보장법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독일에서는 자녀를 키우는 일을 개인과 가정의 일로만 보지 않고, 사회가 지원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다양한 형태의 지원정책(Kindergeld, Elterngeld, Betreuungsgeld, Kinderzuschlag)과 법제(Kinder-Jugendhilfegesetz, Mutterschutzgesetz, Kindergartengesetz, Bundeskindergeldgesetz)가 실행되고 있다. 삶의 질을 우선시하는 독일정부는, 궁극적으로 아동복지를 위해 공동의 책임감을 가지고 예산을 아끼지 않는다. 최근 독일의 출산율의 상승은 아동양육을 위한 아낌없는 정부 정책과 지원의 결과다. 독일의 출산장려정책은 노동법 및 사회보장제도를 가족 친화적으로 개선하고, 보육시설을 확충하여 직장과 자녀양육을 병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의 아동수당 제도의 도입과 시행에 있어서, 독일의 사례에서 참고할 수 있는 정책적 함의는 아래와 같다. 첫째, 아동수당 제도의 적극적 추진과 더불어 지원 대상 및 급여수준의 확대가 필요하다. 둘째, 한국 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입예정인 아동수당 제도에 출산장려기제가 추가될 필요가 있다. 셋째, 아동수당 제도는 급여수준, 대상선정, 재원조달등 제도의 설계방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시행이 가능하다. 넷째, 아동수당 제도의 실행은 아동의 기본적 권리와 복지를 증진함에 있지만, 한국사회의 심각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수단이기도 하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전제조건은 청년실업의 해소, 안정적인 일자리 제공, 주거안정, 가족 친화적 법제, 노동시장에서의 남녀에 대한 평등한 대우, 영·유아에 대한 공공보육시설의 확충이다. 그러한 전제하에서만 아동수당 제도가 지향하고 있는 목표가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 제국주의가 고도로 발전했던 시기에 독일 선교 베네딕트회 오틸리엔 연합회 총아빠스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는 선교회를 지도하면서 직접 선교지역을 여행할 기회를 가졌다. 본 연구는 그의 ‘동아프리카’와 ‘한국’ 인식을 비교하면서 그가 두 문화적 ‘타자’를 바라보며 보유했던 ‘하나의 시선’을 식민주의와 선교 그리고 문화적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베버에게 독일 식민지 동아프리카의 비문명화된 ‘원시민족’ 흑인과 일본식민지 한국의 문명화된 ‘문화민족’ 한국인이 ‘기독교화’, ‘독일화’를 포함한 ‘유럽화’ 되어야 하는 ‘문화 활동’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비유럽 비기독교지역이 ‘유럽화’, ‘기독교화’ 되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의 ‘선교명령’ 때문이었다. 또한 오틸리엔 연합회의 설립과 선교활동의 시작 계기가 1880년대 독일제국의 ‘보호령’ 획득이었고, 독일 제국에서 ‘민족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독일인 취급을 받았던 독일 가톨릭교도들이 교회와 조국에 대한 이중의 충성심을 증명하고자 해외선교에 대한 열정이 강했었다는 점으로 볼 때, 독일민족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시대정신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베버에게 선교활동의 목표는 ‘신과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 오틸리엔 연합회가 선교방침으로 ‘타문화 존중’을 내세웠지만, 문명화 사명이 타문화가 자문화와 같아져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베버의 독일 조국을 위한 민족적 열정이 컸던 것으로 보아, ‘타문화 존중’ 태도가 과대평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시작되어 1952년까지 약 1,245만 명에 달하는 피추방민들이 서독과 동독지역으로 들어왔다. 다른 한편으로 1950년부터 시작되어 1990년의 독일 통일을 전후한 시기 불어 닥친 이주자들과 후기이주자들은 2016년까지 453만 명에 달한다. 독일계 이주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갖는 피추방민과 이주자 및 후기이주자에게 ‘하이마트’라는 개념은 이들의 이주를 규정짓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들의 이주에 있어서 하이마트라는 단어는 매우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것이다. 피추방민들이 가지고 있던 하이마트에 대한 감정은 그들의 이주가 강제적이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강제이주 이후 서독사회에서 피추방민들의 정착과 사회통합은 법적·제도적 장치의 마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전후 경제기적을 통한 사회·경제적 부흥을 통해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잃어버린 하이마트를 찾기 위해 결집된 정치적 단체와 의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갈수록 동력을 상실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세력으로 분산해체되었다. 신동방정책의 등장과 함께 과거의 하이마트에 대한 서독사회의 관심과 이해는 사라지고, 전후 피추방민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정주의적 하이마트정책은 포기되었다. 실향민 1세대의 고령화와 이들 자녀들 사이의 세대 간공감대의 부재는 이러한 변화의 주요 원인이었다. 그리고 분단된 동서독 관계의 회복과 통일이라는 미래과제가 과거의 하이마트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요구를 감소시켰다. 결국, 피추방민들은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과거의 하이마트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새로운 하이마트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의 독일통일을 전후하여 이주자, 후기이주자로 지칭되는 구 소련지역과 동유럽 출신의 독일계 이주자들이 대규모로 들어오면서 피추방민들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하이마트 개념이 사회적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19세기 이후 러시아와 동유럽 지역으로 이주·정착한 독일인들의 후손들인이들 (후기)이주자들의 유입은 동유럽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와 함께 이루어진 자발적인 이주였다. 차별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역사적 하이마트’ 로 돌아 온 이들에게 실질적인 하이마트는 그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구 소련지역이었다. 독일인으로서 자신들의 하이마트에서 배타적 존재였던 이들이 독일에서는 러시아독일인 또는 러시아인으로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어였다. ‘이중적 이질성’으로 표현되는 이들 러시아독일인들의 독일사회로의 통합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1차 이주자 집단에서 나타나는 문화쇼크와 함께 현지 사회와의 적응이라는 이중고로 그들의 사회통합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거의 30년에 가까운 이들의 이주는 다른 문화권 출신의 외국인 이주자집단에 비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미 1990년 이후 독일로 들어 온 (후기)이주자의 수자가 25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증가했다는 사실에서 이들이 독일 사회에 통합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시점에 독일사회를 지배하던 동일한 문화정체성을 앞세운 낙관론이 틀렸듯이 이들을 범죄와 사회불안의 잠재적요소로 인식하는 배타적인 인식도 잘못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오히려 (후기)이주자를 포함한 외국인 이주자들에 대한 사회통합정책의 방향은 21세기가 ‘이주의 시대’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런 맥락에서 ‘이주하는 인간(Homo Migrans)’은 하이마트를 떠나 새로운 하이마트를 만드는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이주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이마트가 정치적 의도로 오용될 때 나치의 역사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최근 제호퍼가 촉발시킨 하이마트 논쟁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의심과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 제호퍼의 의도가 반이슬람주의를 숨기기 위한 의도였던 아니던 간에 독일사회가 자신들의 역사를 통해 하이마트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독일로 들어오는 이주자와 난민을 품어주고 함께 해야 하며, 이는 모든 인간사회에서 유효한 인간덕목이다.
슈마허 (Kurt Schumacher)는 2차 대전 이후 독일이 나아가야 할 정치적 비전을 제시했다. 슈마허와 아데나워는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고 방식은 달랐으나 독일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정치적 책임감이 있는 인간들에 의해 운영되는 민주적 사회여야 한다는 데에는 일치했다. 그는 공산주의, 국가 사회주의,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를 거부한 사회 민주주의 자였다. 그는 일생 동안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고 평등 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 자본주의의 확산을 막고 국가 사회주의와 같은 전체주의를 중단하려는 그의 노력은 사회 민주주의 사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체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극복하기위한 그의 진지한 노력은 전후 독일 사회의 재건과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슈마허의 정치적 사고가 오늘날 독일 사회를 이루는 데 있어서 어떻게 기능했는지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슈마허의 정치사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명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발전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이 글은 나치 시기 교과서의 젠더와 가족 묘사를 분석함으로써 가족과 교과서의 정치적 관계를 고찰한다. 나치 시대의 교과서는 이데올로기 선전도구로 알려져 있으며, 젠더와 가족은 나치의 강력한 국민 동원 수단이었다. 이 글은 초등학교 1학년생용 읽기 교과서인 피벨을 분석한다. 텍스트와 그림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피벨은 아동의 생애 첫 교과서로 문자와 사회규범을 동시에 습득하도록 만들어진 사회화 도구다. 교과서를 정치도구화 하려는 나치의 시도는 초등학교의 경우 위로부터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피벨은 통제가 비교적 늦게 시작되고 가장 소홀히 취급된 분야였다. 피벨 제작과 발행은 나치 시대 거의 대부분 검인정 체제를 유지하였고, 출판사와 집필자들은 텍스트와 삽화 구성에서 어느 정도 자율성을 누렸다. 이 글은 피벨의 젠더와 가족 묘사를 분석함으로써 교과서와 정치의 관계를 밝히고 또한 정치와 교육이 함께 추구하는 이데올로기가 현실세계와 얼마나 유리되었는지 논한다. 사회 규범 전달은 교과서에 맡겨진 교육적 정치적 기능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 내용과 전달 방식은 곧잘 논쟁의 대상이 된다. 피벨의 가족상은 나치의 젠더와 가족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하였다. 이 과정은 나치 집권 이후 점진적으로 진행되었고 위로부터 강요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피벨은 당대의 가족 현실을 반영하지는 않았다. 피벨 가족의 특징인 어머니 중심의 성역할 구분이 뚜렷한 소시민적 핵가족은 당대가 아닌 19세기의 현실에 뿌리를 둔 보편적 가족상이다. 그러나 교육 도구로서 교과서가 전달하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이상과 관념을 포함한 현실이며, 그것은 때로 복고적이거나 미래지향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피벨 가족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가족 구성원 각자에게 주어진 가족 배역과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피벨 가족은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습적이고 보편적인 관념을 반영하며 이상적 가족에 대한 당대의 집단의식을 보여준다.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아울러 회원국의 중요한 권한들이 유럽연합으로 이전되기 시작하면서 동질적인 유럽적 정체성 함양에 대한 교육적 압박도 함께 커져왔다. 본고는 독일 역사교육에 사용되는 5종의 김나지움용 교과서를 활용하여, 그간 역사교육 교수계획안과 교과서에서 지배적인 서사 틀로 자리 잡은 유럽사 패러다임을 분석했다. 분석 범주로는 기독교 서구적 유럽, 서유럽중심주의, 비유럽적 연계성을 선택했다. 분석 결과, 본고는 거의 모든 분석 대상 교과서에서 통일적인 유럽의 상이 여전히 지배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기독교 서구로서의 문화적 통일성 대신에 동서 간극을 유럽사 발전의 주된 설명 요인으로 삼은 바덴 뷔르템베르크의 부교재 Europa만이 예외였다. 나머지 교과서들과 달리 Europa와 Anno는 동유럽과 동독의 역사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서유럽의 발전에 우위를 부여하는 시각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교과서가 세계사적 시각을 결여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이들 교과서는 변화된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유럽의 보편적 주장을 상대화해 볼 수 있는 아무런 기회도 학생들에게 제공해주지 못함으로써 세계정치적 갈등과 패권에 관해 극히 제한적인 논의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구화의 물결이 거세지는 작금의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개방적이고 분화적인 유럽사 패러다임을 요청하고 있다.
본 연구는 창의성의 관점에서 2차 세계대전 개전초기 독일군의 에벤에마엘 점령작전을 중심으로 창의적 전법을 분석하였다. 우선 독일군의 창의적 전법의 근원을 임무형 지휘전술로 보고 임무형 지휘전술의 태동 배경과 추진경과를 살펴보았다. 샤른호르스트부터 몰트케를 거쳐 젝트에 이르는 임무형 지휘전술의 발전과정을 통해 임무형 지휘체계가 정립되었다. 그 결과 임무를 기초로 현장상황을 고려한 독자적 지휘가 가능한 임무형 지휘전술이 독일군의 지휘철학으로 잡았음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에벤에마엘 작전의 상위 전략으로서 만슈타인의 낫질전략과 양공작전의 일환으로 시행된 에벤에마엘 점령작전(글라이더 강습작전)의 창의적 전략과 작전요소들을 고찰하였다. 아르덴느 삼림지대로의 종심깊은 기계화부대 돌파와 글라이더 강습 작전은 모두 기습과 속도를 유지하며 전개된 창의적 전략이자 작전이었다. 끝으로 에벤에마엘의 현장 작전부대인 팔슈름얘거 그라니트 특공대의 창의적 전술행동을 고찰하여 창의적 요소들을 도출하였다. 이를 위해 모체가 되는 팔슈름얘거의 전력화과정을 살펴보고 현장 작전간 시행된 창의적 전술요소들을 분석하였다. 본 논문에서 제시한 창의성의 배경과 요인들을 토대로 보다 확장된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근본적인 차원에서 창의적 사고와 행동이 체질화될 수 있는 군대는 물론 사회조직의 조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본 논문은 일본의 인기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카이사르 상과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의 카이사르 상을 비교 검토하는 작업으로, 브레히트의 역사소설 『율리우스 카이사르씨의 사업 Die Geschäfte des Herrn Julius Caesar』과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4, 5권을 중심으로 연구한다. 자신의 관점을 거의 ‘감정이입’의 수준으로 전하는 시오노 나나미의 탁월한 작가적 역량에 힘입어 많은 독자들이 고대 로마에 대한 지식을 거의 ‘전적’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들에서 얻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본 연구자는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비판적 검토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는 시오노와 브레히트의 작품에 나타난 카이사르 상을 카틸리나 역모사건과 카이사르의 스페인 총독직 수행을 중심으로 검토한다. 시오노는 이 사건들 속에서 카이사르의 개인적 능력 및 자질을 통해 역사를 이끌어나간 위대한 영웅 상에 대한 포석을 마련한다. 반면에 브레히트가 그린 카이사르 상은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다. 카이사르는 역사를 만드는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시티의 도구 및 하수인이며, 그의 통치 업무는 시티의 지침에 따라, 즉 상업 자본의 팽창을 위해 한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서와 브레히트 작품에 나타난 카이사르 상을 비교 검토하는 이 연구는『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얻게 된 독서의 즐거움을 ‘더욱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 생각하며, 이를 통해 고대 로마 및 역사 전반에 관한 비판적 시각 및 열린 시각을 제공할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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