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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소설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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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事成語는 故事性의 有無에 따라 고사성어와 일반성어로 분류된 개념이고, 또 四字成語는 글자 수에 따라 분류된 개념으로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 漢字成語이다. 그러기에 모두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다양한 제작원리를 통해서 만들어진 고사성어는 주로 文學·史學·哲學 위주의 전적들에서 유래되었다. 문학에서는 소설·산문·시·희곡 등 다양하게 유래되었는데 그중 소설이 가장 두드러진다. 특히 백화통속소설 《三國演義》와 문언소설 《世說新語》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 역사에 있어서는 故事成語 自體가 歷史故事性을 가지고 있기에 가장 많은 고사성어를 만들어 냈다. 그중 《史記》는 고사성어의 寶庫라 할 만큼 압도적으로 많다. 또 철학 및 종교의 경전에서는 道家의 《莊子》·《列子》·《韓非子》와 儒家의 《論語》와 《孟子》 등에서 많은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중국 고사성어는 국내에 유입되어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수용과 변용이 이루어졌다. 물론 동일한 한자와 동일한 의미로 수용되어 사용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다소 변형된 한자와 의미를 가진 고사성어도 상당수 있다. 또 심지어는 중국인조차도 모르는 한국형 고사성어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고대 중국에서의 상인, 특히 유가적 가치관에서의 상인은 본업이 아닌 말업에 종사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이는 상인이 생산 활동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고, 오히려 생산물의 올바른 분배를 혼란스럽게 하는 존재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이들이 결국 국가 제도의 합리적 운영을 방해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士農工’과는 성격과 역할이 확연히 다른 ‘商’을 ‘士農工商’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은 점은 ‘商’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상인에 대한 인식이 현실에서는 이중적 태도로 나타나곤 했다. 절제와 무욕을 바라면서도 이윤의 추구를 인정하고, 권력자는 자신의 힘을 넘보게 하지 않는 선에서 상인의 이익을 용인했으며, 상인과 이익을 공유하면서도 도덕적으로는 그들을 비난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현대의 상인 혹은 사업가에 대한 인식에서도 일정정도 확인될 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겉으로는 가치판단의 문제로 보이지만 사실은 역사적 문제이며, 이 이중적 태도가 하나로 점차 모아지는 과정은 곧 근대로 옮겨가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당대 이전의 상인에 대한 전통적 인식을 먼저 살펴본 후, 당대의 문언소설을 연구대상으로 하여 이러한 상인의 형상과 그들에 대한 이중적 인식이 어떻게 문학 속에 반영되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후빙은 중국 서북쪽 유목민족의 음식이다. 중국에서 오랑캐라고 부르던 유목민족은 휴대에 간편한 후빙을 주식으로 하였고 이 음식은 한나라를 거쳐 당나라 시기에 이르러 중원의 음식으로 정착하며 중국문화와의 융합을 이루었다. 이후 후빙은 동아시아 근대시기의 전쟁과 역사 속에서 중국 화교들에 의해 조선으로 전파되었고 한국전쟁을 통한 밀가루 배급에 힘입어 한국의 길거리 음식으로 보편화되었다. 한편 7, 8세기 일본에서는 당나라에 다녀온승려들이 여러 종류의 후빙을 일본으로 들여왔는데 그 가운데 전병은 일본식 과자인 센베이로 발전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고전을 근간으로 오랑캐의 떡인 후빙이 동아시아의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 속에서 어떻게 융합의 산물을 생성하였는지 고찰하였다. 또한 유목문화와 중원문화의 충돌, 전쟁을 통한 전파, 그리고 동경하던 외래문화의 흡수에 의해 후빙 그 자체에 또 다른 융합적 음식문화가 발생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이와 같은 작업은 음식이라는 물질의 상상력에 의해 배태된 중국 고전 및 동아시아 문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하는 시도가 될 것이다.
본고는 북송 시기의 대표적 문인이라 할 수 있는 소식의 인생 역정을 통해 인생의 각 단계에서 그가 중국의 대표적인 儒家·佛家·道家의 사상을 어떠한 과정을 통해 수용하게 되었는가를 추적하고 고찰한 글이다. 우선 들어가는 말에서는 儒家·佛家·道家의 사상체계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각각의 字義를 통해 살펴보았다. 儒家는 唐代 韓愈에 이르러 孔子를 중심으로 정통론을 내세우는 한편 신의 영역보다는 인간 세계의 관계와 질서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제도권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道家는 사고의 범주를 자연계로 확장하여 인위적인 질서보다는 無爲自然의 가치에 중점을 둠으로써 한 개인에게는 儒家와는 다른 ‘養生之道’를 제시하였다. 佛家는 외래사상으로써 儒家나 道家와는 다른 사상을 제시한바, 그것은 바로 ‘因果應報’라는 관념을 통해 현세와 내세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를 ‘해탈’에 두었으며, 우주로까지 사유의 범주를 확장시켰다. 소식은 전대로부터 내려오는 家風과 四川이라는 곳에서 청년시절까지 성장하고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儒佛道의 사상을 고르게 접하게 되었다. 이후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의 길에 나가서는 특히 애민정신을 십분 발휘하는 儒家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黃州 유배시절부터 정치적 좌절에 빠졌을 때는 주로 佛家와 道家에 의존하여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惠州와 儋州 등으로 2차 유배를 갔을 때는 많은 불승들과 교류를 하면서 佛家의 사상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식의 인생역정에 있어서 儒佛道 사상을 수용하는 가장 큰 특징은 어느 한 사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보다는 각 사상의 공통점을 토대로 융합과 합일을 추구하였다는 점이다. 즉 그는 각 사상에 잔존하는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함과 동시에 궁극적인 지향점은 하나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대부분 소식 자신이 남긴 문집과 시집 및 다른 지인들이 남긴 수많은 글들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전기가 없던 1000년 전 중국 사람들도 늦은 시간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북송의 수도 개봉에는 야시장이 곳곳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야식을 즐겼고, 또 야근으로 늦게 퇴근하는 관리들은 퇴근길에 술 한 잔이나 차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야시장에선 우리의 편육 같은 음식은 물론 닭, 오리, 토끼, 양, 돼지, 생선, 채소 등 다양한 야식을 즐길 수 있었고, 이런 야시장이 개봉 곳곳에서 밤새 영업을 하였다. 개봉에는 밤새 술 마실 수 있는 술집도 여러 곳 있었다. 술을 직접 제조하는 正店 72곳과 술을 받아 파는 脚店 3000여 곳이 있었는데, 한 번에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술집, 수백 명의 기생들이 화려하게 화장하고 손님을 단체로 기다리던 술집, 노천 술집 등 규모며 성격이 각기 달라 상황과 취향에 따라 술집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 술집들에서는 500종류 이상의 음식들을 만들어 냈고, 또 이 음식을 갖다 주는 종업원들 역시 뛰어난 서비스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술집과 함께 당시 밤 문화도 상당했는데, 燈節로도 불리는 정월대보름에는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밤 활동을 하였고, 심지어 처음 만난 청춘남녀들도 서로 마음이 맞으면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쿨하게 헤어지기도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데 있어 食色은 큰 차이가 없었음을 볼 수 있다.
본고는 《인효황후권선서》를 대상으로 삼아 명초 소설체 권선서의 특징과 의미, 그리고 윤리규범과 그 서사 전략을 고찰했다. 먼저 ‘권선서’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소설체 권선서가 송대 출판되기 시작하면서 명초까지 확대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둘째, 명초 권선서의 대표적인 작품인 인효황후 徐氏의 《인효황후권선서》 편찬과정을 살펴보았다. 영락제의 황후인 서씨는 여성이 갖추어야하는 婦德의 의미를 정치를 보좌하는 것으로까지 확대했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인효황후권선서》를 간행했다. 이 때문에 《인효황후권선서》는 단순한 인효황후의 종교 신앙을 담은 책이 아니라 명나라 초기에 전체적인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던 정치적 목적이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는 《인효황후권선서》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개별 이야기의 내용과 형식을 일일이 분석했다. 우선 권선 이야기의 윤리적 기능을 살펴보았는데, 같은 패턴을 가진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서술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윤리규범을 습득하게 하고 있음을 분석했다. 그리고 윤리 이야기의 서사 전략을 살펴보기 위해서 《인효황후권선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소설의 출처를 정리하여 분류했다. 《인효황후권선서》의 감응사례에는 유교뿐만 아니라 도교, 불교의 다양한 이야기가 수록되어있는데, 이들 이야기들은 명대 이전의 소설집이나 명대에 민간에서 유행한 이야기들로 그 출처를 밝힐 수 있었다. 이렇게 정리된 이야기의 출처를 바탕으로 원래 이야기의 속성을 살펴보고 이를 《인효황후권선서》의 이야기와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서사 전략에 따른 소설적 변형이나 변용도 고찰할 수 있었으며 민간에서의 이야기 변형 경로뿐만 아니라 유불도 삼교의 융합 과정도 추적해 볼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중국 唐代의 도교역사인물 張果가 문학작품에 어떠한 형상이미지로 자리하고, 회화적 표현에서 중국의 것임에도 한국에서는 중국의 것과 다른 변모양상을 보이고, 독자적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朝鮮社會의 시대성과 관련지어 분석하였다. 먼저, 중국의 <張果圖>: 元代 任仁發(1254~1327)의 <張果見明皇圖>, 永樂宮 八仙벽화 중 張果, 《列仙全傳》, 《三才圖會》, 《仙佛奇踪》, 《繪像列仙傳》 등 明淸 삽도 중 張果, 凌其金의 <張果圖>, 淸代 孟永光(1590~1648)의 <張果圖> 등의 작품에서 張果의 형상이 갖는 중국적 정형성을 탐구할 것이다. 다음으로, 조선의 <張果圖>: 檀園 金弘道(1745~1806)·兪漢芝(1760~1834)·평양소장 작자미상의 <果老倒騎>, 兢齋 金得臣(1754~1822)의 <福祥兩仙>, 吾園 張承業(1843~1897)의 <張果圖> 등을 집중분석하여 한국신선도에서 차지하는 작품의 예술성과 작가정신을 밝혔다. 본 연구에서는 이 그림들을 중심으로 중국의 張果 형상이 조선반도에서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그리고 중국의 <장과도>와는 어떠한 차별점을 띠고 있는 지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朝鮮 <장과도>의 특징으로 중국의 ‘魚鼓簡子’가 ‘서책’으로 바뀐 점을 지적하며, 이 ‘서책’으로 상징지물의 變容은 ‘崇文정신’과 ‘선비문화’라는 한국인의 정서와 뿌리 깊은 문화적 배경을 읽어낼 수 있는 또 다른 키워드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여기에서 정면으로 다루지 못한 개인소장 <장과도>의 본질적 측면에서의 의미해석과 작가에 대한 심층적인 사상분석이 앞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나아가 내단이론가 張果가 韓國仙道史, 한국도교사, 넓게는 한국사상사와 한국회화사에서 어떠한 위상과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보다 심도있는 분석을 필요로 한다.
본 논문은 元代 잡극 《西廂記》의 만주어 번역본인 《滿漢合壁西廂記》에 관한 연구이다. 淸은 중국 본토를 정복한 이민족의 왕조 가운데 가장 큰 정치적 실체였다. 淸의 만주족은 왕조의 교체와 정치 체제의 재건 외에도 언어와 문화 사상의 주도와 변화도 추구했다. 그들은 만주어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소통하고 기록하고 정체성을 표현 하고자 했다. 그들은 만주어로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했고 모국어 사용의 기준을 표명하는 사전을 만들었다. 주접, 상소, 법률, 족보, 사적저술, 민간문학도 만주어로 썼다. 또 자기 언어의 보급과 양적 확장을 위해 한적을 번역하여 만주어 서적을 간행했다. 만주어로 번역되는 한적에 사서와 경서, 한적 문학 등이 모두 포함됐다. 위정자의 국정운영에 활용할 만한 《三國演義》를 비롯한 다양한 연의소설이 번역되었고 四大奇書가 모두 만주어로 번역되었다. 만주어로 번역된 중국 문학은 대부분 소설 작품인데 여기 희곡 《西廂記》가 포함되게 되었다. 《西廂記》의 번역은 순수하게 만주어로만 되기도 했고, 만주어 옆에 한어를 병기하여 되기도 했고, 曲과 唱 부분만 발췌 번역되기도 했다. 이 번역들은 필사본, 각본의 형식으로 남아있다. 이 번역서들은 현재 중국 전역과 미국 유럽 및 일본 등에 전파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규장각과 존경각에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 에 소장된 《西廂記》는 합벽형식의 번역서로 가장 많은 이본과 영인본이 있는 판본이다. 한국에 어떠한 경위로 유입 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본 내용 위에 간단하게 어려운 만주어에 대한 설명을 더한 한글 기록이 있어 조선에서 이 책이 상당히 구체적 읽혔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 책은 김성탄본 《第六才子書》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第六才子書》에 없는 어휘나 내용이 있어 번역을 하던 만주인의 감정이 이입된 것을 알 수 있다. 또 동일 한자어에 대한 번역도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 만주어 어휘연구와 만주족의 한자 활용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논문은 잉어의 명칭과 유래, 중국에서 잉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여성과 다산, 길조와 행운, 신분 상승 등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잉어 리(鯉)자에는 왜 마을 리(里)자가 들어가 있는지, 공자는 왜 아들의 이름을 선뜻 ‘공리(孔鯉)’라고 지었는지, 생선 칼집 탕수인 ‘송서계어’에는 주재료인 ‘잉어 리(鯉)’자가 음식명에서 왜 빠져 있는지 등을 살피는데 그 목적이 있다. 잉어는 360개의 비늘을 가진 물고기로, 큰 강 하류의 물의 흐름이 느린 곳이나 댐, 호수, 저수지 등의 바닥[里]에서 사는데, 이와 같은 생물학적, 생태학적 특징에서 ‘리(鯉)’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잉어는 달달하고 입에 녹는 식감 때문에 아주 일찍부터 식재료로 사용되다가 당나라 때에 와서 신물(神物)이 되었다. 당나라를 세운 이씨 왕조는 선비족 출신으로, 중원으로 오면서 왕조의 정통성을 드높일 필요가 있었다. 이에 도교의 시조인 노자(老子) 이이(李耳)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와 ‘성조대도현원황제(聖祖大道玄元皇帝)’로 추존하고, 도교의 신선들이 잉어를 타고 승천한 데 착안하여 잉어를 당나라의 신물로 지정하고, 잉어의 식용을 금지하고 판매하는 자는 곤장 60대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어는 여성과 다산, 길조와 행운, 신분상승의 상징이 되었다. 잉어의 산란 모습과 신혼 첫날 밤뭇 여자들이 빨리 자식을 보라는 의미에서 돈, 대추, 밤 등을 신방으로 마구 던져 넣던 장면이 겹쳐지면서 잉어는 여성과 다산을 상징하게 되었다. 또한 잉어를 만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잉어는 길조와 행운의 아이콘으로, 잉어가 알을 낳기 위해 힘들게 용문을 올라가는 모습과 힘든 과거 급제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잉어는 신분상승의 아이콘이 되었다. 중국에서 잉어는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사람들의 행운의 표식이자 그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는 미각이다.
중국고대소설연구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되는 루쉰은 생전에 몇 가지 분야에 걸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중국소설사략》은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루쉰은 장기간에 걸친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편 루쉰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중국고대소설 연구는 주로 초기에 집중되었다. 이후는 주로 전투적인 ‘잡문’ 글쓰기에 몰두하느라 소설 창작과 고대소설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지만, 그럼에도 루쉰은 중국고대소설 연구를 필생의 사업으로 여겨 죽을 때까지 이에 관해 적지 않은 글들을 남겼다. 여기서 소개한 것들은 바로 이렇게 루쉰이 남긴 수많은 글들 가운데 중국고대소설과 관련 있는 항목들을 정리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주로 루쉰이 잡지사의 요청으로 쓴 글들이나 다른 학자들과의 논쟁을 정리해 간헐적으로 발표한 것들이다. 따라서 이 글들은 전문적인 논문이라기보다는 사안에 따라 루쉰이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에 불과하지만, 그의 《사략》 편찬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해당 내용들은 대부분 《사략》에 반영되어 있다. 아울러 여기서 다루고 있는 루쉰의 글들은 내용상 다음의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육조와 당, 송 시기의 소설에 대한 논의들이다. 두 번째는 《삼장취경기 三藏取经记》 판본의 시기 문제에 대한 것이다. 세 번째는 당시 새로 발굴된 《유선굴 游仙窟》에 대한 소개와 기타 자료에 대한 비판과 소개의 글들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분류에 따라 각각의 사항들을 소개하고 분석할 것이다.
이 논문은 魯迅 소설 속 달 이미지에 대한 상징적 독해를 시도한다. 이러한 작업의 목적은 魯迅의 소설 창작 행위를 이성의 영역인 의식적 차원만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인 무의식적 차원까지 고찰하고,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 및 작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좀 더 넓혀보고자 하는 데에 있다. 2장에서는 魯迅 소설 속 달 이미지에 대한 상징적 독해를 위해 우선 달의 상징체계를 살펴보았다. 달은 ‘太陰’ 상징체계로서 여성 원리 및 죽음-재생의 순환을 그 대표적인 내용으로 삼는다. 달은 인류의 역사에서 감성의 항진 및 무의식의 심연과도 깊이 연관된다. 이 논문에서는 특히 달과 광기의 관계, 달과 서정적 감수성의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3장에서는 魯迅의 작품집 《吶喊》, 《彷徨》, 《故事新編》에서 달 이미지가 등장하는 소설들을 선별하여 분석했다. <奔月>, <肥皁>, <藥>에서는 太陰의 여성 원칙이 표현되어 있음을 논의했고, <狂人日記>, <白光>, <弟兄>에서는 달이 광기와 본능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음을 밝혔으며, <故鄕>, <社戱>, <孤獨者>에서는 달이 향수와 고독의 감성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고찰했다. 4장에서는 작품 속 달의 형상화가 魯迅의 무의식적 글쓰기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우선 魯迅의 창작 행위를 상호텍스트 원리에 기댄 ‘팔랭프세스트(palimpsestes)’ 글쓰기로 보고, 그것이 매개하는 ‘심층적 기억’을 달의 상징체계와 관련하여 논의했다. 또한, 魯迅의 창작 행위를 무의식적 층위에서 고찰했다. 라캉(J. Lacan)은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라고 언명했다. ‘대타자(Other)’의 담론인 무의식은 魯迅의 유년 시절의 주변 환경과 직결되며, ‘심층적 기억’을 형성한다. 이미지에 대한 애착 및 도교, 비주류에 대한 관심은 魯迅의 무의식적 지향을 참조하며, 그것은 글쓰기를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그의 소설 속 달의 이미지는 魯迅의 의식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에서도 활용되었음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융(C. G. Jung)의 ‘그림자(shadow)’ 개념을 이용해 魯迅 소설 속 달 이미지가 ‘그림자의 자각’과 관련이 있음을 논의했다. 특히 <弟兄> 작품을 창작하면서 魯迅이 자신의 그림자를 의식에 통합하는 과정인 ‘개성화(individualization)’를 성취했음을 밝혔다. 이 논문은 그간 魯迅 텍스트를 이해해온 주된 방식인 이데올로기적 접근이 아닌, 상징적 독해라는 관점에서 魯迅 및 魯迅 문학을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본고의 논의가 그간의 魯迅 문학 연구가 결락해온 부분에 대한 補論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바진의 《수상록》의 첫 번째 제목은 《탐색집》이다. 여기서 탐색이란 작가 자신에 대한 탐색과 사회문제에 관한 지식인의 탐색으로 나눌 수 있다. 자신에 대한 탐색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 질문에 대해 바진이 《탐색집》에서 내놓은 답은 작가, 글쓰는 사람이다. 그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 등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탐색하기 위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고 자신도 구원할 길을 찾기 위해서 글을 쓴다.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떻게 해야 나라, 사회, 인민에게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온 바진은 1978년 일본영화 《망향》이 상영되면서 당시 중국 사회에서 벌어진 《망향》에 대한 논란을 보고 《수상록》의 첫 번째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된다. 《망향》은 19세기 말 20세기 초기에 가난 때문에 동남아로 팔려가 창기가 된 오자끼(ozaki)의 비참한 삶을 통해 당시 일본정부가 여성을 판매하는 수단으로 자본을 축적하는 죄악을 고발하고 있다. 영화는 가라유끼상(karayuki sang)의 삶을 통해 당시 동남아 각국 인민이 일본군국주의의 침입을 받는 동시에 일본 하층 노동자들 역시 똑같은 운명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자끼의 일생은 한 사람의 일생일 뿐 아니라 당시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일본 근대사의 가장 수치스런 부분을 고발한 이 영화를 보고 바진은 문화대혁명 시기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거짓을 말한 자신에 대한 참회로부터 중국 사회의 전제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수상록》의 의의는 신중국 성립 후 수십년간 이어진 정치운동 가운데 말을 잃어버린 중국의 지식인이 독립적 사고를 회복하고 역사의 진상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망향》으로부터 촉발되어 씌어진 《수상록》은 바진의 모든 작품에 깔려있는 주제, 즉 약자에 대한 연민과 그 약자가 살아가는 사회제도의 구조에 대한 비판을 통합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도농이원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중국의 후커우제도 속 농민공의 현실과 애환을 다루는 농민공 소설은 그들이 체험해야 했던 현대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충돌을 구현하고 있다. 중국 개혁개방과 현대화의 산물이자 증인인 농민공 집단의 체험과 정서는 중국 사회발전의 전환점을 관조하면서 신속한 발전이 만들어낸 구체적 영향을 조망하는데 유효하다. 이런 의미에서 쟈핑와(賈平凹)의 《즐거운 인생(高興)》(2007)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사용하여 농민공 가오싱(高興)의 체험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소설과 현실의 보다 가까운 접합 지점을 구축한다. 작품은 도시생활의 절망감과 적응 가능성을 포착하는 한편, 시안(西安)이라는 공간이 가오싱에게 장소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다. 장소가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는 데 근본적인 속성이고 또 개인이나 집단에게 있어 안정과 정체성의 원천이라고 할 때, 개인에게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장소의 경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수자로서의 가오싱은 익숙했던 자신의 장소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장소를 구축하지도 못하는 이중고에 놓여있다. 반복되는 차별과 배제의 사건은 도시와 가오싱이 서로에게 낯선 존재임을 보여준다. 서로에 대한 온도차를 드러내며 도시 시안은 가오싱에게 장소에서 공간으로 퇴행된다. 기대와 바람이 어긋나고 파열음을 내지만 가오싱은 여전히 시안에서 살아가고 죽어서도 시안의 귀신이 되겠다는 마음을 다잡는다. 도시 삶의 의지가 강렬해질수록 그의 장소감은 더욱 무력화된다.
2017년 4월에 출판된 옌거링(嚴歌苓)의 《방화(芳華)》는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많은 부분 옌거링 자신이 경험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서술되었다. 《방화》는 샤오쑤이쯔(蕭穗子)의 1인칭 시선으로 30여 년 전 문화대혁명시기 문예공작단에 속해있던 젊은 이들이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겼었던 사랑과 역경을 그린 작품이다. 특히 주인공인 류펑(劉峰)과 허샤오만(何小曼)은 소설 속에서 각각 기억과 망각을 대변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맥락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 옌거링 특유의 서술기법이 더해지면서 독자들은 자신의 추억을 점검해보고 그 기억 속 자기자신의 역사적 책임을 물어보게 된다. 이에 본고는 ‘기억’과 ‘망각’을 키워드로 하여 옌거링이 문혁을 회고하고 서술하는 방식에 대하여 고찰해보고자 한다. 특히 1인칭의 시점으로 서술된 《방화》의 서술 기법에 집중하는 한편, 기억과 망각을 통해 인물들이 구성되는 방식을 중점으로 하여 저자가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추적해 본다.
馬伯庸의 새 작품 《長安十二時辰》은 역사서사의 엄숙함과 미국드라마의 리드미컬한 전개스타일, 그리고 할리우드식 영웅만들기가 하나로 결합되어 전통적 스타일과 현대적 사유가 잘 조화된 역사소설이다. 주인공인 張小敬은 하층 계급 출신으로 감옥의 죄수가 되었다가 후에는 다시 장안성 전체를 지켜내는 캐릭터로, 이런 유형은 중국의 전통적인 영웅 스타일이라기보다는 평범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현대 할리우드의 영웅 스타일이다. 張小敬이라는 영웅 캐릭터의 탄생은 세 가지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우선, 작가는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역사적 가능성’이라는 창작 이념을 가지고 영웅 탄생의 시대와 배경을 만들어 내었는데, 번화함과 위기가 함께 공존했던 唐 玄宗 시기의 長安城이 바로 그러한 시공간이었다. 다음으로 서사 구조의 측면에서 작가는 끊임없이 증폭되는 음모와 위기를 통해 張小敬의 대처 능력과 희생 정신을 표현해냄으로서 영웅의 숭고함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서사의 배경에서 작가는 張小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내적 외적인 모순과 갈등을 통해 영웅의 비극성을 드러내고 있다.
차마고도는 실크로드보다 오래된 교역로이다. 당나라 때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된 이 길은 윈난(雲南), 쓰촨(四川)의 차와 티베트의 말이 교환되었다고 해서 차마고도(茶馬古道)라 불리게 되었다. 중국 서남부에서 티베트, 인도에 이르는 고대의 상업도로였으며, 중국 서남부의 헝돤산맥(横断山脉) 지역과 시짱고원(西藏高原) 사이에 위치하며 서남지구 각 민족 간 경제 및 문화를 교류의 중심축이었다. 2004년, 중국의 영화감독 티엔좡좡(田壯壯)은 이 차마고도를 영화의 중심에 놓고 만든 영화, 《차마고도·더라무》(茶馬古道·德拉姆)로 제1회 중국영화감독협회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현장의 생생함을 그대로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차마고도·더라무》는 운남성 서부쪽의 빙중루오(丙中洛)에서 티베트의 차와롱(茶瓦龍)의 누(怒)강 유역에 이르는 곳에서 마바리 떼[馬幇]와 지역주민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특정 민족(들)에 대한 현장의 기록으로서 지리학이나 민속학 또는 인류학적 가치를 지니고 세밀한 현실을 조명해주고 있으며, 이것은 민족지성(Ethnographicness)을 지닌 영화의 지식 생산의 측면이자 영화가 갖는 지식 전파의 높은 효율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진정한 민족지성을 지닌 영화 제작을 위해선, 영화 제작진과 대상 인물들 간의 평등하고 친근한 교류를 바탕으로 상호 협조하여 제작에 참여하여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촬영 카메라의 소형화 및 충전기의 발달로 원거리 및 오지에서의 인류학과 민속학 연구에서도 그 활용가치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더라무》가 증명해주듯 민족지성을 지닌 영화가 지식의 생산과 전파의 도구로서 더욱 적극적으로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된다면 민속학 및 인류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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