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기관 내 간행물

  • 간행물 내 검색 검색

백산학보

검색결과 :
8
전체선택 Endnote Refworks
최명길은 정묘 병자호란 때 주화론을 주장하고 제도 개혁에 앞장선 인물이며, 양명학과 상수 학을 연구한 학자이다. 현재 그의 주화론은 병자호란 때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주화론은 權道論, 外藩論, 宗國保存論에 논리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첫째, 조선은 현실적 상황 변화[時]에 따라 후금(청)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다. 둘째, 조선은 명나라의 外藩이기 때문에 內服臣과는 다르다. 셋째, 나라를 보존해야 한다. 최명길의 주화론은 기본적으로 유가 철학 전반에 근거하고 있다. 최명길이 양명학을 연구하였 다고 하여 주화론 역시 양명학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지만 상대주의적 관점은 스승 신흠을 통해 전해 받은 소옹 상수학에서 계발된 것이다. 그는 상수학을 통해 세상을 음과 양이 서로 의지하는 관계로 인식하였고, 夷狄과 小人의 존재도 현실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명길은 정묘 병자호란 때 후금(청)과 강화를 주장할 수 있었다. 다만, 척화론자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후금(청)과의 강화를 주장해 나가는 과정은 양명학의 치양지에서 영향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비난이라는 외물에 영향 받지 않고 자신의 진실된 마음을 발현 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최명길은 양란기에 대내외적으로 조성된 국가의 위기에 직면하여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학문을 개척하고 정치론을 제시한 정론가였다. 그는 대내적으로 반정(反正)으로 출발하여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인조(仁祖)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 이후 조선왕조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형성하고, 취약한 인조의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대외적으로 만주족의 성장으로 급변하는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 국가를 유지 보존하여 민을 보호하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사상적 실천은 당시의 주류 지배층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당시의 주류 지배층을 지배한 학문은 주자학(朱子學)이었는데, 이들은 수기(修己)와 도덕을 내세우면서 주자학(朱子學)에 입각한 명분과 의리를 정론(正論)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벗어난 일체의 학문과 정치적 실천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만약 도덕과 의리를 저버린다면 국가가 망하는 것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정세와는 동떨어진 주관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장이었으며, 동시에 치자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무책임한 주장이었다. 청의 침략으로 빚어진 삼전도의 치욕은 바로 이러한 주류 지배층의 사상적 한계가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최명길이 이들의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주장을 철저하게 논파할 수 있었던 것은 유자(儒者) 로서의 책임의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국가를 유지·보존하지 않으면 민(民)이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치자(治者)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스스로의 수양에만 매몰되어 의리와 명분을 내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유지·보존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유학의 본령이기도 하였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이 연구한 지천 최명길 선생의 삶과 업적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지천 선생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선생의 삶과 업적을 재미와 감동을 고려하면서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토리텔링을 적용하여 보았다. 스토리텔링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뜻하기도 하고, 그것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하는 방법론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매체 유형에 따른 이야기 구성 방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토리 텔링은 주제, 독자, 매체에 따라 동일한 내용이라도 달리 구성할 수 있게 한다. 이 글은 충청북도 선비정신이란 ‘주제’에 맞추어 해설사가, 관광객들에게, 지천 선생의 삶을 스토리텔링 방법으로 제시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독자(청자)가 이를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야기는 보편성, 현재성, 상호작용적인 특징을 고려하여 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역사학자들이 연구한 지천 선생의 삶과 업적이 재맥락화 되어야 하며 선비 정신 등 관련된 것들이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사실이나 객관적 정보의 제시보다는 그것을 기초로 하여 맥락을 고려하여 구성하므로 감동을 줄 수 있는 기술 방법이다.
최근 10년간 조사·보고된 남한강유역 구석기 신자료에 대한 연구는 10개의 주요 한데유적을 대상으로 하였다. 유적은 남한강의 상류에 비해 하류에 집중되며, 하안단구 상부의 점토층이나 산록완사면 말단에 퇴적된 점토 및 사질점토층에서 석기가 출토된다. 석기가 출토되는 퇴적층은 기존 연구를 통해 네 매로 구분할 수 있다. 최상부는 A퇴적층(16~15ka 이후)으로 단양 수양개 지구 1유물층, 원주 송호동 1유물층과 보통리 1유물층, B1퇴적층(40~16ka)에는 평창 송정리 1유물층, 단양 수양개 지구 1·2·3유물층와 수양개 지구 2·3·4유물층, 제천 고명동 세거리 3유물층, 충주 송암리 왜실 1유물층, 원주 신평리 유물층과 송호동 2유물층 그리고 보통리 2유물층, 여주 연양리 1유물층, B2퇴적층(65~40ka)은 평창 송정리 2유물층, 제천 고명동 세거리 1·2유물층, 충주 송암리 왜실 2유물층과 호암동 1유물층, 원주 보통리 3유물층, 최하부는 C퇴적층(65ka 이전)으로 충주 호암동 2·3유물층, 여주 연양리 2·3유물층이 포함된다. 대부분의 유적에서는 석영계돌감이 우세하지만, B1퇴적층부터 돌날 및 좀돌날 기법이 등장하면서 기타 돌감이 증가하고 있다. 석기공작은 찍개 위주의 대형석기에서 소형석기 중심 공작으로 전환되며, 소형석기는 점차 소형화된다. 구석기 신자료의 의의는 중기 구석기시대에는 절대연대 자료의 추가 확보, 찍개 중심 석기공작과 지역성, 중기 구석기시대 말기 석기공작의 확인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후기 구석기시대 에는 여러 지역에서의 유물층 확인, 돌날 기법의 기원·출현과 (재)확산, 좀돌날 기법 관련 유적의 추가 확인, B1퇴적층 내 유물층의 세분 가능성이 주목된다.
고구려 고분벽화 속 인물의 몸은 벽화분 내 주요 출현 위치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천장고임부 천인들의 작고 유려한 몸, 둘째는 무덤칸 내부 생활 장면 속 인물들의 밋밋한 몸, 셋째는 무덤칸 경계부 장사들의 크고 우락부락한 몸이다. 이러한 차이는 인물의 의복 착용 상태와도 연관되어, 두 번째 부류는 몸의 대부분이 의복으로 가려져 있음에 비해, 첫 번째와세 번째 부류 중에는 상체나 다리가 노출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위 세 부류 각각에 대한 설명이 시도되기는 하였으나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표현된 위와 같이 대조적인 형태의 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현대의 이미지화되고 상품화된 몸에 길들여져 시각적 표현 주체와 대상을 서로로 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본고에서는 위와 같은 목적으로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의 여러 학문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체화(體化, embodiment)’라는 개념을 고대 동아시아 유교 전통에서의 젠더화(genderization) 및 의례화 (ritualization)의 의미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맥락화하였다. 이에 기반하여, 인물 등장 고구려 벽화분 천장고임부에 주로 표현되는 천계(天界), 그리고 널길이나 무덤방 입구 벽면에 주로 표현되는 경계(境界)는 인물의 젠더화와 의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비-사회적 공간이었기 때문에 인물의 개성이나 드러난 몸 표현이 금지되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에 비해 무덤방 내부 벽면은 인물의 개성이나 생물학적인 몸보다 사회적 관계의 조화와 유지를 위해 젠더화되고 의례 화된 몸 표현이 중요했던 공간으로 이해하였다.
三國遺事 에 언급된 張保皐는 紀異 의 ‘神武大王·閻長·弓巴’에서 찾아진다. 해당 항목이 기이 에 편재되어 있기 때문에 신무왕이 표제로 등장한 것이다. 아울러 禪師인 一然 자신이 儒家的 정치 이념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에, 국왕의 명령을 수행한 염장을두 번째로 기입한 것이라 여겨진다. 전반적인 서술 내용과 의미는 역시 장보고를 주 대상으로한 것이다. 이러한 장보고에 대하여 삼국유사 는 여타 사서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용어로 장보고를 표현하고 있다. ‘俠士’, ‘謀亂’, ‘明公’ 등이 바로 그것이다. ‘협사’의 경우는 기왕에도 대체로 ‘의협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이해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아울러 ‘협사’는 무예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용어가 아닐 뿐더러, 관직의 보유 여부를 판단하여 구사하는 용어도 아니다. 조선시대 문신에게도 ‘협사’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협사’는 字典的 의미 그대로 ‘의협심이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모란’의 경우는 직접적인 ‘반란’의 단계에까지 이르기 전, ‘모의’의 단계에 머문 수준을 지칭하는 것이라 판단된다. 장보고가 실질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는가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삼국유사 는 ‘모란’ 앞에 ‘欲’자를 덧붙여, 장보고가 ‘모란’을 염두에 두었거나 의도한 수준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보고를 살해하고자 한 염장이 문성왕 에게 장보고가 ‘장차[將]’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라 보인다. ‘명공’의 경우는 단순하게 ‘그대’ 또는 ‘명철하신 공’, ‘총명하신 당신’, ‘현명한 그대’ 등으로 그릇된 번역을 하여 왔다. ‘명공’은 ‘명예로운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한 존칭’ 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존칭’이다, 삼국유사 는 장보고에 대하여 그 어떤 자료에서도 보이지 않는 ‘명공’이라는 표현을 염장의 입을 빌려 드러내고 있다. 이는 장보고가 국왕으로부터 진골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았기 때문에, 명예롭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기술한 것이다.
성문은 성의 얼굴로서 성의 위계와 기능을 반영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발해도성 성문의 특징을 파악하였고, 형식을 분류하였으며, 또 수 당 장안성 및 고구려 안학궁성의 성문들과의 비교를 통해 발해도성 성문들의 기원문제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발해도성에서는 상경성 외성 남벽 정문지, 남벽 동문지, 북벽 중문지, 북벽 11호 문지, 궁성 남벽 정문지, 서문지(3호 문지), 북문지, 서고성 외성 남문지와 북문지, 내성 남문지, 그리고 팔련성 외성 남문지와 내성 남문지가 발굴조사를 통해 성문의 구조가 파악된다. 발해의 성문구조물은 성벽과의 상관관계에 있어 양면돌출형식, 동일선상형식, 어긋형식, 옹성 형식으로 구분되지만, 발해도성에서는 어긋형식과 옹성형식은 확인되지 않는다. 양면돌출형식 성문에는 문돈문식(門墩門式), 문돈문중복식(門墩門重複式), 문돈문누문결합식(門墩門樓門結 合式), 문돈문누각(기단)결합식(門墩門樓閣基壇結合式), 누문식(樓門式)이 있고, 동일선상형식 성문에는 누문절충식(樓門折衷式)이 있다. 발해도성의 성문구조물은 문돈(門墩), 문길(門道), 격벽(隔璧), 연결 벽(隔牆), 누문기단(樓門 基壇), 누각기단(樓閣基壇) 등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문돈이 있는 문돈문식 성문, 즉초루식 성문은 수 당 장안성과 고구려 안학궁성에서, 누문이 있는 누문식 성문은 고구려 안학궁 성에서 각각 찾을 수 있다. 문돈문중복식, 문돈문누문결합식, 문돈문누각결합식 성문구조는 모두 삼문일체형(三門一體形) 혹은 이문(二門) 삼루일체형(三樓一體形)의 성문구조로서 발해에만 고유한 성문형식이다. 팔련성 외성 남문지에서 확인된 누문절충식 성문도 고구려 안학궁성과 수당 장안성에서는 발견된 바 없다. 발해 상경성에서 외성 정문, 황성 정문, 궁성 정문, 궁성 북문, 외성 북벽 중문 등 남북 중축선 상의 성문들이 모두 서로 다른 형식인 것은 수 당 장안성과 구분되는 발해의 특징적인 용문제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중 양국의 정치관계는 안정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경제와 사회문화 교류도 활발히 진행되는 추세이지만 여전히 역사적 갈등과 영토를 둘러싼 분쟁, 그리고 의식형태의 차이, 체제간 대립 등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한중 양국의 민간에서의 쟁점과 의식형태의 차이는 한국 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고 있다. 한국 역사 교과서의 중국 역사에 대한 서술을 보면, 찬란했던 고대 중국을 인정하면서 자국의 문명 기원을 되돌아보고 있다. 또한 ‘華夷’체제 하의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은 복잡한데, 조공체제하에서의 중국의 기타 국가들에 대한 안전보호제공을 승인하는 반면 ‘華夷’체제는 불평등한 질서의 안배라고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한국 역사 교과서는 서술과 사진, 지도, 연표 그리고 사료 등을 통하여 정치, 경제, 외교 등여러 방면으로 당대의 중국을 소개하고 있다.중국 역사에 대한 서술의 특징을 보면 세계사를 배경으로, 더 넓은 시야로 중국사를 서술하였 으며 중국 역사 사건들과 인물들에 대해 다각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지리적인 요인이 인류 역사 발전에 끼치는 영향 역시 중시한다. 한국 역사 교과서에 존재하는 문제를 살펴보면 민족, 국가와 강역 문제, 중국 현대사에 대한 서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문제 등에 여전히 중국과 이데올로기의 차이, 역사 문화적 인식의 불일치 등 마찰과 갈등이 존재한다. 본 논문은 한국 역사 교과서에 수록 정리된 중국 역사의 내용을 참고로 한국 역사 교과서에 서의 중국 역사에 대한 서술, 중국 역사에 대한 서술의 특징, 한국 역사 교과서에 존재하는 문제 등 세 가지 점들을 검토하면서 중국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과 한국인들의 중국관을 통찰함과 동시에 양국의 역사적, 문화적 충돌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