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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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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내륙에 속하는 충주분지 일대 구석기 유적은 주수계인 남한강과 그 지류 일대에 분포하는 구릉대와 산록대에 입지한다. 대부분의 구석기 유물은 구릉대 하안단구 상부와 산록대 산록완사면의 상부에 형성된 퇴적물에서 출토되고 있다.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는 퇴적층은 하안단구 관련 유적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퇴적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보여지며, 산록완사면 관련 유적에서는 반복적인 사면퇴적의 영향이 빈번하게 확인된다. 층위상으로 구석기 유물은 쐐기구조가 발달된 암갈색과 적갈색 점토층에 집중되고있다. 한편 일부 유물은 사면퇴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립질의 퇴적층에서 출토되는데, 이 경우 유물의 재이동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충주분지 일대의 핵심적 구석기 유물층은 세 매로 구분되며, 이를 바탕으로 편년 단계를 설정하였다. 이중 과 단계는 중기 구석기시대, 단계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한다. 중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단계에서는 찍개를 중심으로 하는 석기공작이 확인되며, 남한강유역 구석기공작의 특징 속에서 양평-여주-충주를 잇는 공간적 범위의 설정에 의미 있는 것이다.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단계에서는 석영계 돌감에 기반한 소형석기 제작이 일반적으로 보여지지만, 이 시기의 특정 시점에는 돌날기법과 그에 기반한 슴베찌르개가 일부 확인된다. 돌날기법은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는 단양을 중심으로 그 주변인 제천까지 확인되었지만 충주분지 일대에서도 출토되어 향후 돌날기법의 출현과 전개에 대한 가설의 구축과 논의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3~5세기 금강유역 토기가마 구조와 출토유물 분석을 통해 분기를 설정하고, 변화양상과 특징을 파악하여 이를 4세기 중반 백제의 세력 확장과 관련한 당시의 사회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총 3개의 분기를 설정하였다. 기는 3세기 전반에서 4세기 중반까지이다. 이 시기 토기가마는 취락 내 위치하여 자급자족의 조업방식을 이루는 집단 과 토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집단이 공존하고 있다. 가마의 규모는 대부분 소형~중소형이며, 소성부는 모두 바닥시설이 없는 단순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출토유물은 일상생활용기가 주로 확인되었다. 기는 4세기 중반 이후부터 4세기 후반까지로, 백제의 직 간접적인 영향으로 고배, 개배 등과 같은 새로운 기종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가마의 입지와 구조, 소성방법 등은 기와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기는 백제 중앙양식의 영향력이 금강유역 내 강하게 미치는 단계는 아니었으며, 기존 재지사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기는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반까지이다. 모든 가마가 취락과 분리되어 위치하고 있으며, 가마의 규모가 커져 대부분 중대형 이상에 해당하고, 소성부 바닥시설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에서도 이전 시기보다 중앙양 식의 기종이 새롭게 더 추가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백제의 영역확장으로 인해 금강유역 내 백제 토기의 선호도가 증가하고, 토기의 수요 계층이 다양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늘어난 수요를 맞추기 위해 가마의 구조적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전시기 보다 대규모의 조업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사적 460호 공주 수촌리 고분군은 2003년 발굴되어 금동관모를 비롯한 금동신발 등의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군은 토광묘 수혈식석곽묘 횡구식석곽묘 횡혈식석실묘 등 연속성을 지니며 구릉정상부를 중심으로 대형 무덤들이 집중되어 있고, 무덤군에 대한 제사용 적석유구로 보아 다양한 무덤들이 하나의 친연성을 지닌 재지세력의 무덤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공주 즉, 웅진에 기반으로 한 苩氏세력이다. 이들 세력은 475년 고구려의 한성함락 시 文周와 함께 구원병으로 한성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한성이 이미 함락된 위급상황이었다. 문주는 木劦滿致와 祖彌傑取, 解氏세력, 그리고 구원병으로 참가한 지방 세력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문주왕은 고구려의 위협에서 노출된 도읍 한성을 대신할 지역으로 천도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때 천도 후보지로 목협만치의 기반인 천안지역과 당시 지방세력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수촌리 재지세력이 위치한 웅진(공주)지역이 부각되었다. 강력한 후보지인 천안지역으로의 천도는 목씨세력이 개로왕대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한성함락이라는 실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개로왕대 소외되었던 해씨세력의 반대로 현실화하지 못하였다. 대신 고구려의 공격을 방어하기 쉽고, 위급시 신라군이 빠르게 도착할 수 있으며, 지방 세력의 이탈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방세력의 도움이 가능한 웅진으로 천도는 진행되었다. 천도 이후 문주왕은 수촌리 재지세력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중앙귀족인 解仇를 병관좌평에, 왜에 체류 중인 왕족인 昆支를 불러 내신좌평에 임명하고, 三斤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문주왕은 수촌리 재지세력을 한성도읍기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가진 것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은 상호견제를 통해 문주왕은 정치를 안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달리 곤지의 죽음으로 정치상황은 혼란에 접어들었다. 해구의 전횡이 시작되었다. 해구는 곤지와 문주왕을 시해하고 삼근을 왕위로 세우며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러나 해구가 진횡을 일삼을수록 그의 반대세력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의 반대세력 중 하나가 수촌리 재지세력이었다. 병관좌평인 해구는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왕도인 웅진에서 반란을 일으키지못하고 많지 않은 병력으로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수촌리 재지세력의 견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구의 반란은 眞氏세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리고 東城王이 즉위하였다. 동성왕은 眞老를 병관좌평으로 임명하고, 수촌리 재지세력인 苩加를 자신을 보호하는 위사좌평에 임명하였다. 드디어 수촌리 재지세력이 중앙정계에 등장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병권을 장악했던 진씨세력이 물러나고 금강유역 재지세력인 燕氏세력으로 병관좌평이 교체되어 동성왕이 추진한 왕권 강화정책이 안정화단계로 접어들면서, 동성왕이 백가를 비롯한 수촌리 세력에게 기대했던 정치적 역할도 그 수명이 다하였다. 오히려 도읍 근처의 유력한 세력의 존재는 동성왕의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다. 동성왕이 백가를 비롯한 수촌리 세력의 정치적 세력 약화를 목적으로 가림성으로 진수시키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동성왕과 백가를 비롯한 수촌리 세력의 갈등은 깊어갔다. 이후 백가를 비롯한 수촌리 세력은 동성왕 시해와 반란의 실패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이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사비도읍기 무덤은 물론 유구들이 확인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글은 고려를 찾은 내투 발해인들이 고려 사회에 어떻게 정착해 나갔는지 해명되지 못한 주제를 문헌 기록과 고고학 발굴 자료를 활용하여 규명하려는 글이다. 고려 전기에 내투 발해인들이 처치(處置, 處地)됐다고 추정되는 지역을 문헌 기록과 고려-거란 전쟁간 확인되는 ‘발해항호’를 근거로 추정해보았다. 내투 발해인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정착지가 필요했고, 고려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정착을 안정적으로 유도하면서, 정세가 불안정했던 북방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격퇴하고 안정을 구가하기 시작한 현종대 후반부터는 발해인뿐 아니라 이종족 내투자들 모두 한반도 중부 이남에 배치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요나라 시기 유적에서 출토된 연화문 수막새와 고려시기 유적에서 출토된 연화문 수막새를 발해 상경성 출토 연화문 수막새와 비교, 검토하였다. 그 결과 안양사지 와 원지동 원지(院址) 에서 출토된 연화문 수막새가 요나라 시기의 유적에서 출토된 연화문 수막새와 흡사하고, 발해시기 상경성에서 출토된 연화문 수막새의 문화적 요소(모티프)를 계승하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당시 안양사가 고려 왕실과 매우 밀접했다는 사실, 원지동 원지 역시 원(院)의 시대적 성격상 고려 조정의 끊임없는 관리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내투 발해인들과의 연관성을 높게 추정하였다.
고려와 몽골간의 6차에 걸친 전쟁 중에 몽골군이 고려에 의해 패퇴하여 철수 한 것은 2차 전쟁이 유일하다. 2차 전쟁에 대한 고려 승전의 결정적인 전투가 金允侯가 참전했던 處仁城戰鬪(1232년 12월)이며, 이 전투에서 몽골군 총사령관 撒禮塔이 사살되었다. 김윤후는 대몽항쟁기에 처인성전투와 5차 전쟁에서 防護別監으로 임명되어 忠州城戰鬪를勝戰(1253년 10월)으로 이끈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윤후가 1259년 1월에 임명된 東北面兵馬使재임기간 동안 발생한 麟蹄寒溪山城勝戰(1259년 2월)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당시 기록이 빈약하여 처인성전투와 충주성전투, 한계산성전투의 자세한 전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본고는 사료의 빈곤을 보완할 수 있는 대표적인 현장의 자료인 성곽과 11세기에 발간된 北宋의 兵書인 武經總要 와 몽골이 서하와 금, 송나라의 전쟁과정을 기록한 자료들을 통해 당시의 전투상황을 비교 검토하여, 처인성과 충주성승전의 전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인제 한계산성의 승전에 대한 의의를 도출해냈다. 필자는 김윤후가 군사조직의 리더로서 전투상황 속에서 어떠한 해결방안을 도출해 내고, 어떻게 조직을 이끌어서 성공적인 결과물을 창출해냈는지, 그리고 승전 이후 하부조직에 대한 적절한 공적의 분배 등을 통해 군지도자로서의 리더십(leadership)과 관련된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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