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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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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남한지역 미사리유형의 석기와 북한지역 청동기시대 초기 자료를 비교하면, 가장 이른 단계의 석검 부재, 단면 편평형과 오목형 삼각만입촉의 공반, 장방형․어형․즐형․제형 양인 석도의 공존, 단면 편평형 중심의 양인 석부, 무공석도, 동북형석도, 부리형석기 등을 볼 때 압록강 및 두만강유역 석기와의 공통점이 관찰된다. 이 중 석검의 부재는 압록강유역, 동북형석도와 부리형석기의 출토는 두만강유역의 특징이다. 이와 달리 양인 석도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유역에 주로 분포하며, 무공석도 역시 해당 지역의 특징적 형식 중 하나이다. 따라서 보다 구체적으로 압록강 상류~두만강유역을 미사리유형과 관련된 지역으로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을 중국 동북의 지역별 석기상과 비교하면, 遼東山地와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석검의 부재, 단면 편평형과 오목형 삼각촉의 공반, 장방형 양인 석도의 존재, 단면 편평형 양인 석부의 높은 점유율, 편평편인석부와 석착, 무공석도, 환석 등이 모두 미사리유형과 공통하는 석기 양상들이다.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이 중 몇몇 요소들이 관찰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가장 유사한 것은 역시 遼東山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석기상으로 보는 한 남한지역의 미사리유형은 遼東山地 馬城子 문화로부터 기원하여 압록강 상류~두만강유역을 거쳐 남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비파형동검문화 속의 토기는 다종다양하여 어느 특정 기종 또는 특정 기종 조합이 토기문화를 구성한다고 한정해서 말하기 어렵다. 비파형동검문화는 요서지역의 십이대영자문화, 요동지역의 정가와자유형으로 대표된다. 그리고 양자를 관통하는 토기는 이중구연점토대토기라고 할수 있다. 요서지역의 이중구연점토대토기는 형태적 유사성 때문에 한반도나 요동지역에서 확인 되는 점토대토기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서지역의 이중구연점토대토기는 기본적으로 구연부를 완성한 후 외측에 점토대를 부착하는 제작전통을 가진다. 이는 구연부를 완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점토대를 부착하여 점토대 자체가 구연부를 형성하는 요동지역이나 한반도의 점토대토기와는 제작방식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한편 요서지역은 구연부에 부착되는 점토대가 얇은 것에서 점차 두터워지는 흐름이 있으며그 과정에서 구연부 단면 (타)원형 또는 방형의 형태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중에서 점토대토기의 구연부 제작방식과 동일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은 점토대토기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으 며, 대체로 원형점토대토기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출현은 전국 전기인 기원전 5세기대보다 올라갈수 없다. 동시기 요동지역의 정가와자유형에서 확인되는 점토대토기는 정가와자유형의 형성배 경을 고려하면 요서지역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 동북지역의 점토대토기는 요서에서 요동으로, 혹은 요동에서 요서로 단선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상호 간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방식의 교류 속에서 요동지역의 토기제작 전통 하에 요서지역의 구연부를 두텁게 (타)원형으로 조성하는 모티브가 선별적으로 수용된 결과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국민이 유관순(1902~1920)을 3 1운동의 상징으로 여긴다. 이런 유관순에 대해 이화학당 출신 ‘친일’ 인사들이 해방직후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유관순을 세상에 알리고 기념사업을 펼쳤다는 주장이 있다. 그 지적의 타당함을 살펴보기 위해 유관순의 발굴 과정을 검토했다. 유관순의 독립만세운동이 해방 후 어떻게 알려지고,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기념사업이 이뤄졌는가를 알아봤다. 유관순은 3 1운동과 관련돼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학생 71명 중 가장 무거운 3년 징역형을 받았다. 이 중 감옥에서 순국한 학생은 유관순뿐이었다. 유관순은 옥중시위를 주도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이 때문에 옥사했다. 그의 불굴의 독립정신은 북한도 높이 평가해 역사책에 싣고 있다. 유관순은 1947년 2월 28일 경향신문 에 실린 박계주의 ‘순국의 처녀’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당시 남북 분단 위기의 한반도 정치 상황은 애국소녀 잔 다르크와 같은 인물을 필요로 했다. 박계주가 처음으로 유관순을 잔다르크로 표현했듯이 당시 교과서 편찬 담당자들도 청소년들 애국심을 일으키려 잔다르크처럼 활동한 학생을 찾고 있었다. 유관순의 등장을 이화학당 출신들 만이 바랐던 건 아니었다. 유관순 발굴과 함께 국민적 관심이 쏠려 곧바로 기념사업회가 결성되고 영화 傳記가 만들어 졌다. 기념사업회가 먼저 조직되고 유관순이 알려진 게 아니었다. 기념사업회는 유관순 모교인 이화 출신 ‘친일’ 인사들도 참여했지만 독립지사, 同鄕 및 고흥 유씨 親族 인사들이 적극 참여해 발족됐다. 영화 전기 제작도 동향 인사 및 친족들이 있어 가능했다. 1947년 11월 27일 천안 병천의 아우내만세운동기념비 제막식 날, 김구 이시영 등 독립지사들은 유관순 추도사를 헌정했다. 이들은 추도사에서 南北으로 나뉜 한반도 상황에 대해 순국선열에게 죄스러움을 보이며 민족 통일 즉 완전 독립 완수를 맹서했다. 그리고 유관순이 ‘호국의 신’ ‘겨레의 수호신’이 되어 도와주길 기원했다. 기념사업회 결성과 모든 기념사업 배경에는 남북 분단 위기 상황에서 애국심을 고양시켜 민족 통합을 이루려는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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