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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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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구려 강역에 대한 주요 쟁점에 관해 살펴보았다. 700여 년 간 고구려의 세력권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고구려의 팽창 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고, 고구려 역사의 부침에 따라 가변적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세력권을 설정함에 있어서 고구려가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여 장기간 직접지배가 가능하였던 1차적 강역과 일시적인 점유에 그쳤거나 세력 간의 중간지대 내지는 완충지대에 있었던 2차적 강역으로 구분해서 파악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한다. 1차적 강역은 점의 집적을 통해 표시할 수 있는 바이지만 주로 자연지리적인 측면에서 강, 산맥 등을 수반한 어느 정도 선과 면의 개념까지 확대될 수 있는 공간일 것이고, 2차적 강역은 그런 표시가 원천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상징적으로 구분해 낼 수 있는 공간이면서 점유가 변화되는 공간일 수 있을 것이다. 소위 ‘문화권’이라고 하는 관점은 강역과는 직접적으로 연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시각을 조금 달리해보면 고대국가에 있어서 강역은 당시 변경인들은 필요에 따라 이주 내지는 편입 등을 통해 삶을 영위하였을 가능성도 많고, 이종족의 존재양태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강역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러한 점도 착안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고구려가 같이 주변 여러 종족이 서로 접하고 있었던 상황과 다종족 국가임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일종의 변경지대는 세력 간의 갈등과 충돌을 완화시키는 완충지대의 기능도 있어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특히 국경 지역은 그 정체성과 관할이 조정되고 재편되는 공간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강역의 범위를 쉽게 설정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강역을 연구함에 있어 고구려와 인접해있던 세력이나 국가의 입장에서 역으로 추적해 본다면 고구려와의 경계에 대해 상호 보완되는 객관성을 담보해 낼 여지가 좀 더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상과 같은 점들을 종합적으로 염두에 둔다면 고대국가의 강역이나 경계는 선이 아니라 점의 집적 형태나 대역(일종의 zone)의 형태로 대략적으로 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바로 그러한 결과가 ‘세력권’으로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고구려 강역에 대한 연구도 ‘세력권’에 대한 이해로 귀결되어야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되며, 세력들 간의 경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이나 현상 그리고 인간들의 존재양태에 주목하여 살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서로 이질적인 세력들이 만나고 충돌하며, 그런 가운데 같이 살아가면서 융합되고 공존하는 공간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근거 없는 영역의 팽창 등으로 대표되는 의도된 서사의 역사가 만들어낸 허구적인 경계나 영역, 그리고 역사적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근거가 없거나 사료 비판 없이 무분별하게 설정하고 있는 관념적인 가상의 국경선들을 오히려 지워나가야 할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 이후 만들어진 강역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탈피하여야 역사적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부여 강역에 대한 연구현황을 정리하고, 그 문제점과 쟁점 사항을 분석해 봄으로써 부여 성립 초기, 전성기, 쇠퇴기의 강역을 생활문화권역 중심으로 재설정해 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성립기 부여는 『사기』와 『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오환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부여의 강역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오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서차구고분군 발굴보고서를 재작성하는 과정에서 이들 무덤의 조영집단을 오환으로 파악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환의 거주지는 장성 이북의 길림 합달령 주변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성립초기부터 부여는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성립되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더불어 고고학적으로도 기존의 토착문화인 서단산문화가 소멸되고 초기철기문화인 포자연문화로 새롭게 출현한다는 점 역시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전성기의 강역범위에 대해서는 호룬평원설과 송눈평원설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호룬평원은 인간이 생활하기에 자연환경이 적합하지 않으며, 부여의 물질문화로 파악할 수 있는 유적,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송눈평원 지역을 부여의 중심권역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강역범위는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장광재령과 위호령, 서쪽으로는 송원지역에서 개원 일대에 이르는 선, 남쪽으로는 용강산, 북쪽 경계는 동류송화강 일원으로 설정할 수 있다. 전성기 부여의 강역범위 내에는 모두 5개의 생활문화권역이 확인된다. 부여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5개 문화권역 중 길림시 일대와 사평ㆍ개원 일대의 세력집단은 전연의 침입에 의해 소멸되고, 휘발하유역의 세력집단은 고구려에 복속되며, 빈현 일대의 세력집단은 읍루와 물길의 남하로 인해 지속적으로 세력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유수 노하심유적을 중심으로 한 북류송화강 하류에 거주하던 집단이 최후까지 존속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494년 왕실이 고구려에 투항한 이후에는 일부 세력이 동류송화강을 건너 두막루를 건설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발해의 강역은 건국부터 멸망까지 정치 전개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이러한 발해사의 정치사적 시기구분에 대한 의견은 커다란 차이는 없다. 그리고 그 주요한 분기점은 제3대 文王 시기까지와 제10대 宣王 즉위시점부터라는 점에서 모두가 일치하고 있다. 즉 문왕 이전이 건국ㆍ발전기라고 할 것 같으면, 선왕 이후에 중흥기를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고, 거기에 동북쪽으로 그 강역을 확대하였다. 발해의 강역은 제10대 宣王 및 제13대 大玄錫代에 가장 넓었다고 하는데, 사방 5천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체로 보아 발해의 영역은 남쪽이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서쪽은 遼陽의 遼東에 미치고 있었다고 보인다. 북쪽은 대체로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동쪽으로 연해주에 뻗쳐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발해의 강역에 대해서는 여러 異見이 존재하고 있는데, 특히 西邊과 東北境이 그러하다. 西邊의 경우는 요동의 귀속여부와 그 시기 문제, 東北境은 연해주지역의 말갈과의 경계 등이 주요 쟁점이다. 남쪽의 신라와의 경계도 다소의 이견이 존재한다. 우선 발해의 서변에 대한 제논의는 발해가 요동지역 점유를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 요동점유설과 요동완충설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발해의 서변에 대한 실체 규명을 위해서는 돌궐-당의 동향이나 당-거란의 동향도 고려하면서 이 전투의 배경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발해의 남변에 대해서는 『신당서』를 근거로 泥河를 경계로 신라와 접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요동완충설에서는 757년 안동도호부 폐지 이후, 발해도 서쪽으로 진출하지 않고 신라도 대동강 이북으로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동 지역은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발해와 신라는 서쪽에서는 경계를 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발해의 북변과 동변은 연해주지역의 말갈유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발해 강역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서변은 사료 검토를 통한 돌궐ㆍ거란과의 관계가, 북변과 동변은 말갈유적의 고고학 성과의 수집과 해석이 관건임을 알 수가 있었다.
초기 연맹적인 모습으로 출발한 고조선은 이윽고 ‘조선’과 ‘조선왕’을 맹주로 하는 중심세력이 형성되었고, ‘제후적 존재’를 시사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는데 서기전 4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위만조선의 관직체계를 살펴보면 다분히 자치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조선의 정치체제는 후대로 내려올수록 연맹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주변 지역의 半독립적인 首長이 국왕 아래 결집하여 국정운영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이 늦어도 서기전 4세기에 당시 지상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의 ‘王’이라는 稱號를 썼다는 것은 고조선의 지배자가 바야흐로 예맥세력의 실질적인 盟主가 되었음을 뜻할 것이다. 그러므로 늦어도 衛滿朝鮮期에 이르면 고조선은 주변의 半독립세력을 아우르는 형식을 갖추고 ‘중심국가’ 의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의 중심의식은 단군신화를 통해 더욱 발현되었는데, 단군신화에는 당대 고조선 지배층이 갖고 있던 天孫族 의식을 담고 있다. 또한 단군신화를 통해 고조선 지배층의 세계관은 지상 아래 온 세상이 고조선을 중심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고조선이 중심의식을 넘어 천하관을 지향했음을 알려준다. 서기전 4세기 말 고조선의 칭왕은 기존의 왕칭인 ‘왕검’을 계승한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은 고조선이 예맥공동체의 독자적 세력권 구축을 넘어 중국까지 포함한 세계의 패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위만조선 초기에 잠시 이러한 천하관이 제약을 받았지만 우거왕 때에 이르러 다시 원상복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우거왕대에 달라진 천하관 모습은 분명 朝漢전쟁의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황룡사는 553년 착공된 후 13년 만인 566년 창건가람이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지조성토와 뻘층에서 검출된 토기의 대부분이 6세기 후반 이후로 편년되고 있어 창건가람의 실체에 많은 의구심을 낳고 있다. 즉, 사찰이 축조되기 위해선 건축물이 들어설 대지가 우선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데 황룡사의 경우는 원지반이 뻘층이어서 최소 2.5m 이상을 성토하여야만 하였다. 따라서 토기의 편년과 대지조성, 그리고 당탑 등의 건축물 조영까지를 고려한다면 566년의 창건가람은 다소 불가능할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발굴조사 결과 창건가람과 관련된 목탑과 금당, 강당 등의 주요 건물지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여느 삼국시대 사찰과 비교해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서 과연 황룡사지에 창건가람이 존재하였는지를 근본적으로 의심케 하고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에 기록된 구층목탑의 初成은 구층목탑 이전에 별도의 탑이 존재치 않았음을 내포하는 것이어서 발굴조사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음을 확인케 한다. 위와 같은 의문점은 결과적으로 566년의 ‘황룡사 필공’이 창건가람 보다는 대지조성의 완공이었음을 판단케 하고 있다. 향후 황룡사의 대지조성과 관련하여 흙이 어디에서 제공되었는지, 그리고 원지반의 개량을 위해 어떠한 토목공법이 사용되었는지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본 논고는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ㆍ백제지 및 三國有名未詳地分條의 원전과 찬술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지리지의 찬자는 고구려지 서문을 찬술하면서 『新集』과 다른 고구려 자체의 전승자료를 활용하였고, 백제지 서문에서 중국 사서에 전하는 기록을 인용하여 백제의 지리적 위치를 설명하였으며, 중국과 국내의 여러 史書에 전하는 기록을 참조하여 백제의 천도 현황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신문왕 9년(689)에서 성덕왕대 전반 사이에 고구려와 백제의 지명에 대해 정리한 저본자료를 고구려ㆍ백제지의 기본 골격으로 삼은 다음, 고구려지에 경덕왕과 헌덕왕대, 태봉에서 새로이 편제한 군ㆍ현에 대한 정보를 추가하고, 이어 다양한 전승자료에 전하는 지명의 異稱이나 別稱, 異表記 등을 細注로 제시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신라지에 奈靈郡이 본래 百濟 奈已郡이었다고 전하는 사실을 참조하여, 백제지의 말미에 奈已郡을 추가로 첨입함으로써 고구려ㆍ백제지를 완성하였다. 한편 지리지의 찬자는 법흥왕대 이전 기록에 보이는 三國有名未詳地分條의 신라지명은 주로 『國史』를 기본원전으로 하는 『구삼국사』의 신라 기록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면서도 편년적 체계를 갖춘 전승자료에서, 중고기 이후부터 경순왕대까지의 기록에 전하는 지명은 실록류의 어떤 사서에서 인용하여 소개하였고, 『新集』을 기본원전으로 하는 어떤 전승자료와 『구삼국사』 고구려 기록에 전하는 고구려의 지명, 『구삼국사』 신라 기록 및 『자치통감』, 『신당서』 등의 중국 사서에 전하는 고구려지명을 三國有名未詳地分條에 제시하였다. 또한 『구삼국사』 백제 기록에서 그 위치를 詳考하기 어려운 백제지명들을 추려서 三國有名未詳地分條에 소개한 다음, 古記類와 신라측의 전승자료, 중국 사서에 전하는 백제지명 가운데 그 위치를 詳考하기 어려운 것들을 찾아 추가하여 소개하였으며, 이어 여러 지방의 읍지류와 고기류, 다양한 전승자료에 전하나 그 위치를 詳考할 수 없는 지명들을 인용하여 三國有名未詳地分條를 완성하였다.
본 글은 상경용천부에서 장령부까지 영주도 노선상에 존재했던 발해유적 분포와 조영특징을 파악하여 영주도의 구체적인 동선을 재조명 해보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이 가운데 24개돌유적 쓰임새와 관련하여 기존 중국학자들의 연구결과 “역참이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과연 설득력 있는 것일까를 추론해 보았다. 제Ⅱ장에서는 발해 교통로와 관련된 주요 노선과 유적분포를 정리해 보았고, 제Ⅲ장에서는 노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발해 24개돌유적 분포와 현황(구조)을 정리해 보았으며, 제Ⅳ장에서는 상경에서 장령부까지 분포되어 있는 6개소의 24개돌유적 용도 관련 기존 연구성과를 비판해 보고, 과연 역참일 가능성이 있는지를 쓰임새와 건축구조 방면에서 각각 분석해 보았다.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결론은 다음과 같다. 24개돌유적은 영주도를 비롯한 발해 주요 교통로 선상에 있어 많은 중국 연구자들이 역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쓰임새와 건축구조 측면에서 살펴본 결과 교통로를 이용하던 발해인들이 공공 목적으로 관리하던 다락식 창고로 보는 것이 더 타당성 있는 추론이 될 것이다. 또한 유적은 발해시기에만 이용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인 요금시기에도 계속적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건축 연구에서 부닥치는 문제 가운데 난제는 ‘용어의 애매성’이다. 관찬 사서를 기록한 사관이 중국의 經史를 섭렵한 官人 학자들이었기에 그들의 문장 속에 儒家的 세계관이 배어 있다. 특히 寢殿 관련 용어에는 聖君으로서의 君主에 대한 견해가 반영되어 있다. 침전 앞쪽에 별도로 마련된 小寢殿은 朝會에서 물러 나온 뒤에도 寢殿에 들지 않고 소침전에서 올바른 정치를 펼 방도를 궁구하는 성군에게 필요한 시실로 이해되었다. 정도전이 燕寢인 康寧殿과 便殿인 思政殿 사이에 小寢인 延生殿과 慶成殿을 좌우에 마주 보도록 배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강녕전은 王과 王妃의 침실을 갖춘 일상생활의 장소인 燕寢인 동시에, 王室儀禮를 거행하거나 승지와 대신들을 接見하고 政事를 의논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六寢은 왕의 침전 영역, 六宮은 왕비의 침전 영역을 뜻하지만, 둘 다 路寢(正寢) 1채와 小寢(燕寢) 5채를 앞뒤로 배치한 구성으로 똑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연침과 소침을 구별하여 경복궁 창건 설계에 반영한 것과 맞지 않기 때문에, 조선시대 전반기 경복궁 침전 사용방식을 이해하는 데 혼란을 일으킨다. 正寢이란 용어의 경우 사전적 정의와 실제 건물 사용 사이에 모순이 발견된다. 국가 의례서인 『오례의』에서 ‘正終의 장소로서의 정침’을 思政殿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사정전을 정침으로 삼은 예는 심지어 한 번도 없었다. 正終의 장소로서 경복궁 康寧殿을 정침으로 삼은 경우는 문종 사후가 유일하였고, 창덕궁 대조전은 성종, 인조, 효종, 철종, 순종 등 다섯 임금의 사후에만 정침으로 사용되었다. 史書와 번역서에서 말하는 연침과 소침, 육침과 육궁, 노침, 정침 등 조선왕조의 궁궐 침전을 서술하는 데 핵심적으로 사용된 용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의 역사상 실재한 침전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뿐 아니라, 후대의 연구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이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제주도의 동쪽에 위치한 정의현성의 변천과정과 구조에 대하여 문헌기록과 고지도, 『탐라순력도』, 일제강점기 지적도, 최근 고고학조사 결과 등을 바탕으로 살펴보았다. 정의현이 설치되는 초기 단계에 축성된 古정의현성과 현재 정의현성을 구분하여 성곽의 입지조건을 토대로 성곽이 옮긴 사유를 밝혔다. 그 결과 읍성의 입지조건 중에 식수 확보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성곽의 규모 및 구조와 관련하여, 古정의현성은 문헌기록이 부족하여 선행연구와 고고학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리하였으며 현재의 정의현성은 일제 강점기 당시 작성된 지적도 및 고지도, 사료에 나타난 성곽 규모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현재 정의현성의 축성방법은 평평하고 완만한 지형에 성벽을 협축하여 축성하였다. 그리고 『탐라순력도』를 바탕으로 성문, 치, 여장, 해자 등의 성벽 관련시설에 대해 그 원형을 검토하였다. 마지막으로 古정의현성은 1416년 이후에 축성되었고, 현재 정의현성은 1422년에 현재의 정의현성 위치로 이축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古정의현성이 치소의 기능을 담당한 기간은 채 6년이 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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