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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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陝西~河北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詩經 韓奕篇의 追[濊] 貊을 漢代 이후 문헌에 보이는 요령 길림지역의 예 맥과 같은 실체로 보는 입장에서는 예 맥의 이동에 의한 고조선의 성립을 주장한다. 반면에 맥을 북방민족의 범칭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고구려 등장 이전 맥이 라는 실체는 없었던 것으로 본다. 전자는 이동의 흔적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呂氏春秋 恃君覽篇의 “非濱之東 夷穢之鄕”에서 ‘非濱’은 ‘北濱’이 아니라 ‘渭濱’의 誤記이 다. ‘非濱之東’은 위수가의 동쪽으로 東夷가 거주하던 지역이다. 사료의 시점도 전국시기[저술시 기]가 아닌 서주시기이다. 예는 선진시기 동이가 거주하였던 하북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었다. 이 예는 요령 길림지역에 거주하였던 예와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다. 따라서 고조선예족설은 성립되기 어렵다. 管子 小匡篇의 穢貉은 선진문헌에서 예와 맥이 연칭되는 유일한 사례이다. 관자 가 전국시기 이후에 재편집되는 과정에서 제환공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북벌 대상에 예맥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후대의 윤색 보입이다. 이러한 윤색 보입도 독자가 당대의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끔 사실에 기초해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런 사실을 통해 기인 기원전 7세기 중반 연칭으로서 예맥이라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연구는 안성 봉업사 3차례 발굴조사를 통하여 출토된 많은 문자기와들의 분석을 통하여 봉업사의 성격과 변천과정을 살펴본 글이다. 안성 봉업사는 통일신라시대 9세기경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세력들에 의해 현재 오층석탑이 있는 봉업사 이전시기에 ‘화차사’가 창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 인물인 “능달(能達)”명 문자기와는 왕건 즉위 후 궁예의 지지기반이었던 청주 세력과 죽주세력들을 견제하고 회유하기 위해 청주 출신인 능달을 이곳에 파견하였으며, 문자기와가 제작되던 925년에 이곳에서 봉업사의 불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음을 보여준다. 고려 전기 대규모 봉업사 중창과 함께 제작된 문자기와들은 봉업사의 역사적 성격과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기와에 지명이 기록된 “대개산(大介山)”, “죽주(竹州)”, “개차관(皆次官)” 등은 봉업사가 있는 안성 죽산의 옛 지명들이다. “개차관”에서 “개차”는 죽산의 고구려 지명이며, “서주관(西州官)”의 서주는 서원경인 지금의 청주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명문이 기록된 문자기와에서 그 종류와 개체 수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고려 전기 광종 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고려 광종 때 제작된 기와를 시기 순으로 나열하면 “병진(丙辰)”: 광종 7년(956)-“무오(戊午)” : 9년(958)-“신유(辛酉)” : 12년(961년)-“준풍(峻豊)” : 14년(963) -“건덕(乾德)” : 18년(967)-“기사(己巳)” : 20년(969)-“갑술(甲戌)” : 25년(974)이다. 봉업사 전체 지역에서 출토되는 문자기와들은 광종 7~25년(956~974)의 18년에 해당되는 시대이며, 고려 태조의 진영을 모신 진전사원으로서 봉업사의 창건시기와 상통한다. 진전사원으로서 봉업사의 대규모 불사가 이루어지는 시기는 광종의 개혁정책이 시작되고 이에 반발하는 호족들에 대하여 숙청 정책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봉업사 출토 문자기와를 통해 고려 광종의 개혁과 왕권강화 정책 등을 알 수 있다. 광종은 청주-죽주-충주로 이어지는 중부내륙지방의 세력들을 중심으로 하여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견제하였다. 광종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개혁에 지지 세력이던 죽산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와 국왕의 권위를 나타내고 또한 지속적인 민심의 확보와 배려차원에서 진전사원인 봉업사를 대규모 중창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국망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국외 독립운동 기지들이 곳곳에 마련되었다.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대인 興凱湖 부근에 있는 蜂密山, 만주 북간도 汪淸縣에 위치한 羅子溝, 러시아의 블라디 보스토크에서 조직한 勸業會, 북간도의 墾民會, 그리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가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1914년을 기점으로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일찍부터 국외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던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이 1914 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과 러시아와의 군사동맹관계가 형성되면서 크게 위축되자, 그 여파로 서간도가 새로운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한 것이다. 이런 정세의 변화에 따라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서간도가 새로운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 결과 일제 경찰도 이제 서간도가 한인 독립운동의 策源地 가 되고 있고, 그 중심에는 신흥무관학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하였다. 서간도의 독립운동 세력도 1914년이 甲寅年, 즉 호랑이의 해인 만큼 한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주변에 선전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신흥무관학교 측은 크게 군자금 모집과 인원 모집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을 집중하였다. 본고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이 독립운동 상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음에 주목하 고, 이 시기에 한정해서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변화상을 검토해 본 것이다. 특히 주목한 것은 당시 신흥무관학교와 주변 인물들 간의 인적 연계망을 구체적으로 발굴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통해서 신흥무관학교가 어떻게 그토록 장기 지속적인 활동을 할수 있었는지, 당시 신흥무관학교 인사들의 활동 범위는 어디까지였는지를 가늠해 보고자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동방아나키즘연맹체 조직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오스기 사카에가 가장 먼저 연맹체 조직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하지만 관동대지진과 그의 죽음으로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5년여 뒤인 1926년, 중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유기석이 다시 한번 연맹체 결성을 제안하였다. 유기석은 동방아나키즘세력의 통일된 기관으로 동아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자고 주장했다. 연맹체의 조직과 연대활동에 대한 구상은 곧 구체화 되었다. 먼저 화북지역에서 연맹체 조직을 시도하였다. 한국, 중국, 타이완, 베트남, 인도, 일본 6개국의 아나키스트들이 1927년 톈진 프랑스조계에 모여 A동방연맹을 조직하자 신채호가 이필현과 함께 한인대표로 참여하였다. 이후 신채호는 스스로 연맹체 결성을 위한 회의를 소집하고, 단결과 직접행동을 촉구하며 동방연맹을 결성하였다. 화남지역에서도 연맹체 결성이 추진되고 있었다. 먼저 유기석, 이을규, 이정규 등이 중심이 되어 재중공산무련을 조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28년 6월 14일 한국, 중국, 타이완, 일본 등 각국의 아나키스트들이 상하이에 모여 O.A.F.를 결성하였지만 곧 유명무실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화북에서 활동하던 중국,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O.A.F.를 찾아와 연대를 제안했고, 프랑 스조계에서 연석회의를 열어 함께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통해 화북과 화남에서 각각 추진되던 연맹체 결성과 활동이 화남지역으로 집중되었음은 물론 직접투쟁에 보다 무게중심을 둔 투쟁방략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북한의 문화유산 정책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 을공포하며 체계적인 제도 정비와 함께 실천적인 방안이 강구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추어 1963년 전국적 범위에서 력사유적 중요대상과 보존 위기 대상을 전면적으로 조사할 데 관한 문화성령 제16호 에 근거하여 전국적인 1차 현황조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1980년에 2차 현지조 사를 진행하여 모두 1,800여 건에 이르는 역사유적 조사자료 를 망라하였다. 먼저 역사유적 조사자료 는 북한 소재 문화유산의 신 구 자료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과 함께 자료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분단의 장기화로 북한에서 생산된 조사자료및 인쇄물 등의 접근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소책으로 역사유적 조사자료가 가지는 학술적 의미는 매우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조사과정에 촬영한 사진과 실측 도면을 방대하게 확보하였다. 대부분 1960~1980년대에 해당하며 일부 유적은 2000년대 후반의 사진도 포함되어 있다.그리고 북한 당국의 문화유산 관리원칙을 역사유적 조사자료 안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유형별로는 고인돌과 관방유적, 시기별로는 청동기시대와 조선시대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관방유적은 고대로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국난극복의 상징 으로 자리매김하는데 더없이 좋은 소재가 된다. 즉 외세와 싸워 이겨낸 민족적 자긍심 고취와도 연관되며 지배이데올로기에 효율적인 ‘인민 교양사업’의 일환으로 판단된다. 최근 남북 관계의 개선과 평화 분위기가 성숙함에 따라 개성 고려궁성(만월대) 발굴조사 재개, 철원 궁예도성 공동 발굴조사 합의 등 남북학술 교류사업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이 역사유적 조사자료 가 ‘歷史 共同體’라는 ‘民族의 同質性’ 회복에 또 하나의 단초가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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