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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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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후석 천관우가 거둔 고조선과 삼한 연구의 성과와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천관우는 연구 활동 전반에 걸쳐 현실에 바탕을 둔 참여의식과 일반 대중을 위한 역사학을 중시하면서철저한실증과거시적통찰을추구했다. 또한민족주의사관에입각하되세계사와연계된 객관적인 입장의 역사교육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조선후기 실학 연구에서 출발하여 여말선초의 군사ㆍ토지 제도사, 3ㆍ1운동과 해방 10년사등으로확장했으며, 1970년대 초 『신동아』에 연재한 「한국사의 조류」를 통해 본격적으로 고대사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1982)를 발간하여 새로운 한국고대사 체계를 제시했으며, 이 책은 고대사 분야의 일반 대중서로서 효시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천관우가 고조선사ㆍ삼한사 연구에 집중한 것은 연구 외적으로 가택연금과 감시로 인한 활동제약 및 자료 활용의 한계에서 연유하지만, 근본적으로 일제의 식민사학 중에서도 특히 임나일본부설 왜곡을 극복하고 가야사 복원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는 북삼한이 남삼한으로 정립되는 과정, 곧 고조선에서 삼한으로 이어지는 ‘한( )=조선계(朝鮮系)’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실상을 추적했다. 실제로 단군 및 기자조선의 실체를 비롯한 위만조선의 국가적 성격, ‘삼한 이동설’에 입각한 삼한의 기원과 성립, 삼한 제국(諸國)의 위치 비정, 삼한-삼국의 고대국가 형성 문제 등 관련 주요 과제의 해명을 위해 노력했다. 천관우는 단군조선을 국가성립 이전의 단계로 상정했으며, 단군신화를 선주 어렵민(고아시아인)과 후래 농경민(북몽골인)의 동화 교체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다. 기자조선과 관련된 ‘은인(殷人) 기자동래설’은 서기전 12세기 후반에 전개되었던 동이계 기자족의 동방 이동 사실로 파악했다. 기자의 후손을 내세운 ‘조선후’의 칭왕 사실에 주목하고, 고조선-연나라의 각축이 전개되었던 서기전 4세기 후반을 한국사상 고대의 개막으로 설정했다. 그리하여 『사기』에 보이는 ‘조선ㆍ진번’의 실체는 ‘북삼한’이며, 이때 ‘조선’은 대동강 하류의 마한족, ‘(북)진번’은 요하하류의 진ㆍ변한족을 합칭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 ‘진국’은 삼한 총연맹체가 아니라 북진번계의 일부가 남하하여 한강 하류에 머물렀다가, 이후 부여계 백제에게 밀려 남하해서 사로국ㆍ구야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다고 했다. 『삼국지』 한전의 ‘진왕’은 진국과 무관한 존재로서 당시 유력했던 백제국과 사로국의 왕을 각각 칭하는 동명이체(同名異體)로 상정했다. 나아가 그는 ‘영역’ 확대를 국가형성의 중요 요소로 꼽아 ‘부족-성읍국가-영역국가’라는 발전단계를 제시하였고, 정복활동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고조선 및 삼국의 국가형성기를 종래의 통설보다 소급 적용했다. 그의 연구는 기자 전승의 재해석 문제를 비롯하여 목지국 위치 비정이나 삼한 토착사회의 실상에 대한 접근 등에서 일부 한계가 지적되기도 하지만, 광복 이후 고조선 및 삼한 연구가 한 단계 발전하는데 중요한 밑돌이 되었다고 본다.
千寬宇의 조선시대 연구는 後期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시기에 따라서 세 단계 정도로 나누어서 살필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1953년 이전까지의 시기, 두 번째 단계는 1954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의 시기, 세 번째 단계는 1960년대 후반 이후의 시기인데, 이렇게 살펴보면 그가 조선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에서 천관우는 조선 후기의 역사와 근대의 관련성을 찾으려는 시각으로 연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유형원은 근대정신의 內在的 胚盤의 역할을 담당한 ‘실학’을 체계화한 인물로 규정되었다. 두 번째 시기에서 천관우는 첫 번째 시기와 달리 조선 후기의 ‘실학’과 근대와의 관련성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드러내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글에서 유형원과 홍대용의 사상 및 학문은 유학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짙었다. 이런 인식상의 변화는 조선 후기의 역사와 근대를 연결해서 이해하려는 연구 시각이 아직 학계 내에 보편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천관우가 제시한 ‘실학’의 개념과 성격에 대해서 학문적인 비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시기에서 천관우는 ‘민족의식’과 ‘근대지향의식’이라는 용어로써 ‘실학’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면서 다시금 조선 후기의 역사와 근대의 관련성을 탐구하는 시각을 회복하였다. 여기에는 60년대 이후 본격화한 민족주의의 고조와 내재적 발전론의 학문적 담론이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실학’의 개념이 모호하다는 비판에 대해 학문적으로 대응하려던 천관우 자신의 문제의식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첫 번째 시기의 시각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진전된 학문적 모색이었다고 하겠다.
후석 천관우(後石 千寬宇, 1925~1991)는 1950~1970년대 신문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날리고 언론자유 수호와 정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언론인이자 한국사 연구에 매진했던 역사학자였다. 언론인으로서의 천관우의 행적은 거의 모두 알려져 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다. 이 글은 언론인 천관우를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 역사ㆍ글쓰기ㆍ독자라는 세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논의를 전개했다. 우선, 촉망받는 역사학도였던 천관우가 왜 기자가 되었는지를 살폈다. 천관우는 6ㆍ25 전쟁기에 피란수도 부산에서 기자가 되었다. 이를 두고 우연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우연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천관우는 장지연ㆍ박은식ㆍ신채호ㆍ안재홍 등 민족주의 사학자 겸 언론인을 선망하면서 역사학에 입문했다. 이 과정을 통해 신문은 현재의 역사라는 인식을 갖춰 나갔다. 이런 인식이 그를 기자라는 직접으로 이끈 것이다. 천관우는 결국 역사학도였기 때문에 기자가 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천관우는 언론자유 수호와 민주화 운동에 매진했다. 또한 역사에 대한 식견과 통찰로 끊임없이 신문칼럼을 집필했다. 칼럼을 통해 천관우는 신문 글쓰기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신문 독자와 역사를 공유했고 미래를 함께 고민했다. 그가 신문 칼럼을 정착시킨 것도 역사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역사와 신문을 동일시했던 천관우는 동시대의 사람들, 독자들과의 소통을 늘 고민했다. 그것이 역사학 연구의 바람직한 방향이고 신문의 가치이자 효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관우는 이러한 관점을 신문의 에디토리얼 지면 활성화와 한국사 대중화로 구현했다. 한국사 대중화는 그가 지속적으로 해온 칼럼 쓰기와도 상통한다. 한국사 대중화에 있어 신문은 가장 효과적인 매체이기도 했다. 언론인 천관우에게 역사-글쓰기-독자(대중)의 세 가지 측면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신문이라는 마당을 통해 한 곳에서 만났고, 현실 속으로 나아가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관점은 역사였다. 천관우에게 역사와 신문은 하나였다. 그가 언론인으로 글을 쓰고 활동을 하든, 역사가로서 역사를 연구하고 집필을 하던 그에게 언론은 역사였고 역사 또한 언론이었다. 역사-글쓰기-독자(대중)의 관점으로 볼 때, 천관우는 자신의 역사학적 관점을 끝까지 일관되게 지키면서 그것을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구체적으로 구현해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 이 글의 의의를 두고자 한다.
소년기에 이미 천재로 이름이 높았고, 젊은 시절에 이미 한국의 언론계를 이끌었던 언론인이자 뛰어난 국사학자였던 천관우. 그는 한때 대단한 문화적 전통과 자부심을 가졌던 고을이지만 지금은 제천에 합쳐진 곳 청풍 출신이다. 천관우는 고향에 대한 이중적인 감성을 가졌다. 성장기에 명성있는 양반 가문이 아닌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열등감이 있었다. 강한 자부심을 느꼈던 고향이 제천에 합병되고, 결국은 수몰되는 경험을 거치면서 분노도 일었다. 이런 것들이 결국 그가 반골 기질의 지사로 이름을 얻게 된 바탕이 되었다. 천관우는 언론활동, 민주화 운동을 통해 독재정권에 맞섰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결국, 그는 오늘날 제천시가 시민 정신으로 내세우는 의병 정신과 잘 부합하는 인물인 셈이다. 흔히 지역에서 태어난 특정 인물을 기억할 때 그가 가진 명성과 업적을 강조하지만, 그들의 치열했던 삶을 자신의 삶과 비추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논문은 비교연구를 통해 고구려 갑옷과 말갑옷의 고유양식과 생산기법의 특징에 대해 밝히고 이로부터 고구려시기 요서지역 고분들의 국적을 재해석하였다. 고구려 갑옷은 갑편양식과 연결기법 및 갑옷양식 등에서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영향과는 무관하게 고조선 갑옷 생산기술을 계승하여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이웃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들과 이후 청동기시대 고조선유적에서는 장방형의 뼈갑편이 줄곧 출토되어져 한민족이 오랫동안 뼈갑옷을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중국의 경우는 뼈로 만든 갑옷을 생산했다는 문헌기록은 물론 유물도 출토된 바가 없다. 장방형 갑편 양식은 고조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중국의 갑편은 고조선의 영향을 받아 춘추전국시대부터 장방형의 모습을 보인다. 중국은 춘추시대에 철갑을 생산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철갑의 출현은 전국 말기에 와서 둥글린 장방형의 철갑편을 그대로 이어서 만든 투구가 발굴되었을 뿐이다. 진제국시대의 갑옷은 대부분 가죽으로 만들어 졌는데 그것도 앞가슴과 등 부분 및 어깨만을 방형 또는 장방형 가죽편을 평면적으로 연결하여 덮는 양식이었다. 중국은 철갑이 서한시대에 비로소 보급되기 시작한다. 武帝 이전까지 군대는 보병이 위주가 되며 철갑도 크게 보급되지 못했다. 무제시대에 이르러 흉노와의 전쟁으로 개갑 무장한 기병의 수가 크게 증가하며 갑편 양식도 대형 철찰갑에서 비교적 세밀한 양식의 어린갑으로 발전한다. 여전히 가죽갑옷은 철갑옷보다 많이 사용되었다. 이 시기는 고조선이 붕괴되어가는 시기로서 이 같은 무제 때의 군대장비의 변화는 고조선 붕괴 요인의 한부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갑옷생산기술을 이어 보다 발달된 철갑옷을 활발히 생산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고구려 갑옷의 특징과 같은 시기 중국 및 북방지역의 갑옷과 비교해보면 그 수준에서 큰 차이를 가진다. 중국은 삼국양진시대 군대에서 일률적으로 같은 모습의 筩袖鎧를 입었고, 남북조시대에 오면 기병이 군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裲襠鎧가 생산되었다. 이 같은 중국의 용수개와 양당개에서 보이는 양식의 특징을 지닌 갑옷을 착용한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와 실제 출토유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고구려는 군대의 구성과 역할에 따라 매우 다양한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찰갑편의 형태와 크기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갑옷의 양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고구려와 신라 및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철투구들은 그 구성 찰갑의 양식이 대부분 장방형이고 연결부분을 청동장식 단추로 하여 장식효과도 함께 하고 있다. 이 같은 청동장식단추의 장식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고조선 청동투구만이 갖는 특징으로 고구려로 이어진 것이다. 고구려 갑옷과 말갑옷의 고유양식 등을 통해 분석된 여러 내용들로부터 조양지역의 서기 3세기부터 서기 4세기 중엽 이전까지 조성된 무덤들의 국적을 재해석할 수 있었다. 즉 이 시기에 만들어진 조양지역 여러 무덤들의 국적은 북방민족이 아닌 고구려임을 재해석했다. 이 무덤의 주인들은 고구려 동천왕시기 부터 고국원왕이 재위 12년에 환도산성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지금의 조양지역을 중심한 평양성에 살았던 고구려 왕족들이었다. 이 조양지역의 여러 무덤들에서 출토된 복식유물들은 갑옷은 물론 금제관식과 금동 마구제품 등을 비롯하여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고구려 왕족만의 고유양식과 특징을 보여준다.
이 글은 ‘원삼국시대’ 한강유역에서 보이는 토기와 철ㆍ철기의 생산에 대한 재검토이다. 토기는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낙랑계토기를 검토하였다. 경질무문토기의 출현은 외부 기원설과는 달리 청동기시대 환동해선사문화권역 안에서 이루어진 상호작용 속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았다. 타날문토기의 출현은 원주 반곡동유적 출토품 통하여 낙랑군 설치 이전인 전국계에 토기가 국지적으로 출현 또는 반입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낙랑군 설치 이후 한강유역에 출현하는 낙랑계 토기의 제작 집단은 유이민일 가능성을 재확인하였다. 경질무문토기 제작 전통은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 다음에도 북한강유역에서는 지속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철기는 한강유역에 분포하는 마을에서 철을 생산하는 제련유구가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철기의 형식학적 분류를 통하여 외부로 부터의 반입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적어도 철 생산 유적의 확인과 철기의 금속공학적 분석이 병행되어야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철기 생산 유적은 한강 상류지역에서 주로 확인되고 완제품과 철소재를 생산하던 거점 마을은 가평 대성리유적, 춘천 우두동유적, 연천 삼곶리유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거점 마을에서 유통된 완제품과 철소재는 하위마을에서 간단한 철기를 제작하거나 수리를 한 것으로 보았다. 아울러 단야구나 소구경송풍관만 동반되는 주거는 단야 장인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원삼국시대’ 철 생산은 변진한(弁辰韓)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지만 평택 가곡리유적이 확인되어 지금의 경기 남서부지역일 가능성을 검토하여 보았다. 한편, 이조돌대철부의 형식 분류는 인부의 가공으로 인한 변별의 어려움과 중앙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철부가 생산되었음을 증명하지 않는 한 동아시아 지역의 철부를 일관되게 분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본고는 서산 부장리고분군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에서 함께 조사된 기지리, 예천동유적 출토 유물의 분석과 비교연구를 통하여 한성기 백제 지방사회를 구성한 재지집단 내의 문화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한성기 백제 지방사회 내 다양한 행위 주체들의 지역상과 백제 중앙과의 관계 속에서 지방사회 내 집단간의 지속적인 사회ㆍ문화적 상호작용에 대하여 추론해 보았다. 서산 부장리유적권에서 출토된 유물 중 금동관모와 같은 한성기 백제의 위세품과 백제양식 토기문화는 백제 중앙과 지방사회의 적극적인 정치적 관계에 의한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구묘 내에 부장된 공헌용기의 기종분석 결과 토기는 기종이 일부 변형되지만 단경호 계통과 목이 있는 공반용기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목관 내 철정의 부장전통도 부장수량에 있어서 점진적인 변화상은 있으나, 재지 상장의례에 기반한 공헌물 구성의 변화 없이 지속적으로 재지전통 문화가 공유되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즉 부장리유적권 내에서 중심묘제를 이루는 분구묘는 在地社會의 전통적인 묘제로서 지속적으로 조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副葬된 공헌유물의 구성에 있어서 재지의 상장례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특징은 한성기 백제의 지방사회를 구성한 서산 부장리유적권 내에서 재지사회의 喪葬禮가 집단 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전통질서에 기반하여, 한성기 백제 지방사회의 문화적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서산 부장리유적권에서 확인된 한성기 백제 지방사회는, 재지전통을 유지한 상태에서 백제 중앙과 위세품을 중심으로 하는 형식적인 위계와, 재지사회의 전통적 상장례와 사회적 관계가 용인되는 비공식적인 자율적 질서가 작용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유자이기는 3세기 후반부터 6세기대에 이르기까지 신라 및 가야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목곽묘를 비롯한 적석목곽묘, 석곽묘, 석실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묘제에서 수습된 바 있다. 이는 신부와 공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부의 경우 나무를 끼울 수 있도록 아래 부분이 동그랗게 말려있다. 유자이기는 그 동안 많은 선학들에 의해 의기로 설명되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왕 및 왕릉급, 혹은 상위계층에 해당되는 일부 고분에서 이러한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것이 의기나 하나의 상징물이었다면 동 시기, 같은 묘역의 고분에서 함께 출토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다양한 행차용 장엄구가 등장하였다. 예컨대 고분벽화 및 석굴사원의 행렬도를 보면 노형을 비롯한 월형, 선형, 도형 및 월, 창, 산개 등의 장엄구가 몇 개씩 표현되어 있다. 이것들은 주인공의 기호에 따라 행차 시마다 선택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러한 장엄구는 백제 한성기 및 일본 고분시대의 무덤 외부에서도 일부나마 출토된 바 있다. 5~6세기에 해당되는 신라 및 가야의 유자이기도 출토 사례로 보아 그 성격은 행차용 장엄구로 추정된다. 이는 위에서 제시된 여러 형태의 장엄구 뿐만 아니라 판상철기나 궐수형 철모(혹은 철겸) 등과도 함께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유물의 출토상황으로 보아 목재로 된 행차용 장엄구는 무덤 주변에 장식하고, 유자이기와 같은 철제품은 무덤 내부에 부장하였음을 추정케 한다.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에는 ‘궁골’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왜 지명이 궁궐과 관련이 있는 궁골일까. 이 글의 시작점이다. 궁골과 관련하여 적어도 3개의 구전이 존재하고 있고, 대부분 고려 기황후와 관련된 것들이다. 자료를 고찰한 결과, 궁골은 조선전기 오척의 딸로 명나라 황궁에 진헌된 吳공녀의 출생지인 것으로 나타났다. 태종~세종 연간에 명나라 진헌된 조선의 공녀는 모두 7차례이다. 진천인 오척의 딸은 4차 때 공녀로 간택되어 명나라에 입궁하였고 당시 나이 12세였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사찬 기록물인 『성호사설』, 『오주연문장전산고』, 『해동역사』 등은 공통적으로 ‘진천인 오척의 딸이 선덕제의 후비이자 명나라 제 7대 황제 경태제의 생모가 되었다.’라고 서술하였다. 『속통고』만 다른 내용을 서술하였다. 그러나 吳공녀의 얼굴이 화상(畵像)으로 그려져 국내 전해진 점과 명나라 내관 윤봉(尹鳳)이 그녀의 생부를 황친(皇親)으로 직접 지칭한 점 등은 그녀가 선덕제의 후비이자 경태제의 생모였음을 반증하고 있다. 吳공녀의 가문이 현달한 점도 크게 주목된다. 吳공녀의 삼촌 5형제는 모두 현감 이상의 품관에 오르는 등 입신출세하였다. 이것은 황친 오척에 대한 배려일 가능성이 높다. 이 글은 공녀 역사와 지역사 확장 차원에서 미시적으로 접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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