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기관 내 간행물

  • 간행물 내 검색 검색
  • 간행물 또는 권/호를 "-전체-" 선택하시면 통합 검색이 가능합니다

백산학보

검색결과 :
17
전체선택 Endnote Refworks
개성 만월대 발굴은 남북이 역사무대를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의미있는 사업이었고, 그러한연장선상에서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은 그것을 디지털 환경으로 구현해내는 것이다. 10여 년간진행되어 온 만월대 발굴조사 사업은 남북공동의 이해 나아가 문화유산 교류협력사업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남북교류사업의 일회적 이벤트적 한계를 넘어 지속적 상설적 제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민관 협력이 결실을 맺은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2020년 12월 개통예정인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의 콘텐츠 추가 구축 및 이용활성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은 지난 2017년 ‘개성 만월대 유물자료 정리사업’, 2018~2020년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디지털아카이브 구축사업’을 진행한 결과로개통되었으며, 생산 단계에서부터 디지털 포맷으로 생성된 기록들이 구축 대상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은 매우 주목받을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은 남북 교류가 여러가지 부침을 겪는 현실을 감안해볼 때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한중심추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한편,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은 자료의 보관이라는 일차적인 목표에서 나아가 여러 방면으로의 활용을 염두에 두고 추가 구축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구축 초기단계에 해당하는현재 시점에서 향후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의 아카이브를 어떠한 방향으로발전시켜 나갈 것인지에 대한 뚜렷하고 명확한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점에 유념하여 아카이브 내 디지털 전시, 가상 박물관 구축,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추진및 관련 콘텐츠 탑재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콘텐츠를 추가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용활성화 방안도 살펴보았다.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은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구축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향후 개성에고려박물관 건립을 위한 여러 계획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만월대 디지털기록관’ 은 향후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 및 융복합 연구 등 높은 확장성과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있다는 점에서 활용 가치가 높다. 적절한 추가 콘텐츠 개발 및 여러 이용자 계층의 기호를맞춘 활성화 방안을 통해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이 해당 분야 연구자에게 도움으로 주고, 남북교류의 상징으로서 기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현재 여러 박물관들은 다양한 유구와 유물, 유적을 모두 망라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콘텐츠를 구축함으로써 여러 계층의 이용자 접근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은 고려 왕궁이라는 단일시대의 궁궐 유구만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일부 사용자만의접근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물론 깊이 있는 연구와 콘텐츠의 제작으로 이어질수 있지만, 아직 그에 대한 구체적 논의와 성과물 제작은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일반 다수의접근을 유도하기 위한 방안이 요구되며, 그러한 방안의 하나로서 최신 IT기술을 이용한 자료의적극적 활용과 제작이 필요하다. 따라서 국내외 박물관 및 미술관의 홈페이지 내 디지털 자료의 구축과 IT기술을 적용한사례들을 살펴보고, 이를 비교 분석하여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의 적용 가능성에 대한 기술적방안을 파악하였다. 또한 기록관 내 실제 자료를 이용하여 IT기술의 적용을 통한 3D 콘텐츠물의 제작 가능성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콘텐츠 제작은 유구의 3D화를 우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방대한 이미지 자료를 바탕으로 할 수 있다. 여기에 일부 구축된 자료의 누락에 따른제작물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3D스캔 자료를 이용하여 3D 유구의 고도화를 진행할 수 있다. 이렇게 구축된 콘텐츠 자료는 웹VR 및 XR방식 등의 홈페이지 제작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접근을 유도할 수 있으며, 나아가 가상유적 전시관 및 가상 박물관의 모습과 체험 형태의홈페이지로 전환할 수 있다면 만월대 디지털 기록관의 접근과 활용은 높아질 것이다.
기존의 라키비움에 대한 논의는 주로 아카이브기능을 하는 기록관의 영역이 확장하는 과정에서 도서관과의 관계, 나아가 전시라고 기능을 가지고 있는 박물관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논의는 이미 아카이브가 일정한 수준으로 구축되어 있는문화유적과 관련된 분야에서도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조사와 연구도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라키비움 구축이 현 단계에서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새롭게 구축된 만월대 디지털 전시관과 관련하여 확장시켜 보았다. 그 과정에서 디지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은 라키비움을 구축하기에충분한 여건이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미 대부분의 자료가 디지털화되었고, 나아가 해당유적에 대한 디지털 트윈화도 시도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접근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개성의 만월대 문화유적은 현재의 상황에서 실제로는 접근하기 어렵지만 디지털기술을 이용한다면 개성이 아닌 또 다른 장소, 즉 가상공간에 존재하면서 그 안에 다양한정보가 체계적으로 사용자에게 제공될 수 있는 최근 다양한 분야에서 새롭게 논의되고 있는메타버스적인 접근이 가능한 곳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디지털 트윈기반의 라키비움에서사용자들은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세계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가 준비 중 입니다.
문화유산 디지털지도체계 구축을 위한 제언
김범철(Kim Bumcheol),최종택(Choi Jongtaik),최진무(Choi Jinmu),홍밝음(Hong Balkeum),박주영(Park Juyoung),나선민(Na Sunmin),김혜정(Kim Hyejung),이민영(Lee Minyeoung)
白山學報 第118號/ 2020
95-116 (22 pages)
인문학>역사학
초록보기
공공기관의 디지털공간에 공개된 문화유산 관련 (공간)정보가 과도하게 소략하여, 문화유산을 체계적ㆍ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점을 지적하면서, 그 문제해결의 일환으로 ‘디지털지도체계’ 구축을 제안한다. 디지털지도체계는 개별 문화유산에 대한 속성 데이터베이스, 공간정보에 의거해 작성되는 디지털지도, 외부 情報源과의 연계체계를 포괄하는 지도체계이다. 본고는 새로이 구축될 ‘체계’가 탄력성을 담보하면서 기존의 디지털공간보다는 훨씬 많은정보를 포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울러, 실제로 디지털지도체계가 구축되는 상황에서설명문의 작성, 체계의 구성 및 관리방식에 대한 몇 가지 학술적ㆍ기술적 사항들을 제안한다.
안성천 유역의 구석기 조사는 특정 계기를 바탕으로 탐색기, 개시기, 발전기, 확산기로구분할 수 있는데, 탐색기 이후 개시기-발전기-확산기의 시간적 범위는 대단히 짧은 편이다. 탐색기는 안성천 유역 내 구석기의 분포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지점에서 구석기의수습이 진행되었던 2003년 이전의 시기이며, 개시기는 2003년 평택을 시작으로 수원·안성·화성·천안 등 여러 지역에서 구석기 조사가 진행되기 시작하는 2003~07년까지의 기간이다. 발전기는 핵심적 유적이 조사되고 이를 통해 이 지역 구석기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2007~11년, 마지막으로 확산기는 구석기 조사가 이루어지는 지점의 공간적 범위가더욱 확대되는 2012년에서 현재까지이다. 안성천 유역의 구석기 조사는 크게 네가지 측면에서 그 성과가 정리되었다. 첫째, 유적의입지와 지형적 특성이 확인되었다. 둘째, 비교적 활발한 토양·퇴적물 분석 등 자연과학의적용을 통한 유적 형성 환경이 추론되었다. 셋째, 유물층과 그 시간적 편년의 설정이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구석기공작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통해 우리나라 구석기공작의 일양상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향후 기존 구석기 조사의 문제와 한계를 극복하여 안성천 유역 구석기 조사의 성장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정가와자유형은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가 요동지역으로 전이되어 형성되었다는 측면에서 십이대영자문화의 하위유형으로 이해되고 있다. 과거부터 주목받았지만, 많은 관심이나중요도에 비해 정가와자유형만을 연구주제로 한 연구성과는 매우 부족하다. 여기서는 이를감안하여 정가와자유형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그 변천 과정을 규명하고 대외 교류및 사회 관계를 중심으로 그 확산 과정을 재검토하였다. 정가와자유형은 처음에는 심양 일대를 거점으로 발전하였으나, 나중에는 요양-본계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발전한다. 정가와자유형의 문화요소들은 대개 요서지역과의 교류 과정에서수용되었는데, 높은 기술 수준이 요구되는 청동유물 외에 토기문화와 매장문화까지 전이되는양상으로 보아 단선적인 물적 교류 외에 인적 교류까지 있었다고 생각된다. 정가와자유형관련 유물들이 요동~북한지역은 물론 내몽고와 산동반도까지 확인되고 있어 가장 광범위한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가와자유형의 발전 과정은 전국시대 이후 심양-요양 일대에서 천산산맥 일대를 거쳐북한 방면으로 점적으로 확산되어 네트워크가 강화되는 양상으로 요약된다. 정가와자유형의시공간성이 전기 고조선과 관련되는 문헌 기록과 부합되며, 문화 내용의 통시적인 계승성과공시적인 확장성이 강한 점을 고려하면 고조선과 관련되는 물질문화로 볼 수 있다.
이 글은 한·중·러 국경지역의 두만강유역, 綏芬河流域, 러시아 연해주 남부지역에 분포하는 단결-크로우노브카 문화와 중부지방 중도유형문화의 관련성을 적극 수용하는 입장에서작성되었다. 먼저 단결-크로우노브카 문화의 출현지였던 두만강유역의 변화양상과 지역성을살펴보기 위해서 북한에서 발굴보고된 자료를 비롯하여 그동안 연구자들이 크게 주목하지않았던 북한학자의 지표조사 자료, 일제강점기의 수집·발굴 자료,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유리건판 자료 등을 새롭게 검토하였다. 두만강 중상류지역(내륙지역)은 청동기 후기 柳庭洞類型에서 단결-크로우노브카 문화로 변화하지만, 두만강 하류지역(동해안지역)은 얀콥스키 문화가 쇠퇴한 후에 단결-크로우노브카문화가 유입되었다. 이것은 자연지리 환경의 차이와 함께 두만강유역 초기철기문화의 지역성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단결-크로우노브카 문화는 내륙지역에서 동해안지역으로 확산된다. 중국과 연해주의 수분하 수로를 따라 동해안으로 확산되는 루트와 무산, 회령, 종성 일대에서 나진, 웅기 일대로확산되는 두만강루트가 상정된다. 또한 단결-크로우노브카 문화요소는 牧丹江 중류지역의東興文化와 河口遺存, 삼강평원지역의 鳳林文化에서 확인되며 그 확산 시기는 기원전 2세기후반~기원전후, 기원후 3세기로 각각 추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중도유형문화 유적에서 확인되는 단결-크로우노브카 토기를 통해서 동해안루트, 철령 및 추가령루트, 내륙루트 등을 상정하였고, 이 경로를 따라 두만강유역 단결-크로우노브카 문화가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유입되었을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駕洛國記」는 비록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가락국을 이해하는데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이다. 「가락국기」에는 가락국의 건국 과정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수로왕의 제사와 관련한기사이다. 이 글에서는 수로왕 제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수로왕의 능·廟 조성과 그성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수로왕이 세상을 떠나자 殯殿인 殯宮을 세워 왕의 시신을 한동안 모셨다가 그 곁에 능을조성하였다. 「가락국기」에 보이는 ‘首陵王廟’의 首陵은 수로왕의 시호가 아니라 陵號이며, ‘廟’ 라는 용어에는 사당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首陵王廟는 수로왕의 능과 사당을 아우르는복합적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며, 나아가 수로왕의 陵域 내에 수로왕의 사당이 위치하였음을떠올리게 한다. 「가락국기」에는 가락국의 역대 왕을 首陵王廟에 모셨고, 해마다 다섯 차례 정해진 날짜에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首陵王廟가 종묘와 유사한 성격을 띠었음을 단적으로보여준다. 首陵王廟는 正寢의 역할을 한 廟房과 그 곁에 위치한 便房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시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면서 首陵王廟는 일종의 가락국 종묘와 같은 기능을 할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본고는 미호천 중상류의 백제 취락과 성곽, 생산시설 등의 유적에서 확인된 우물 및 집수시설을 대상으로 구조 및 축조기술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동반 유적과 유물의 편년을 살폈다. 이를 통해 우물 및 집수시설의 변천양상을 3단계로 제시하였다. 미호천 중상류의 백제 우물 및 집수시설은 사용된 재료가 토기ㆍ목재ㆍ석재로 다양하며, 평면형태는 Ⅰ-방형계, Ⅱ-원형계로 분류되며, 단면형태는 a-수직형, b-사선형으로 분류된다. 제1기는 3세기에서 4세기 전엽에 해당한다. 목곽집수시설-Ⅰa형식과 土器造집수시설-Ⅱa 형식은 진천의 취락 및 생산유적에서 확인되었다. 목곽집수시설은 ‘井’자형의 결구방식으로선사 이래로 제작되었던 귀틀집의 축조방법과 유사하며, 토기조집수시설의 대형옹과 내부의토기편은 축조 및 사용시기를 보여준다. 이 조합관계를 주변 유구와 비교했을 때, 백제의영역화 과정이 재지세력과 상호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보인다. 제2기는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에 해당한다. 제1기와 같이 목곽집수시설-Ⅰa형식과 토기조집수시설-Ⅱa형식이 유지되고 있으며, 증평의 추성산성과 진천의 농경유적에서 석조우물-Ⅱb형식이 새롭게 축조되고 있다. 이 시기는 ‘井’자형과 변형된 ‘ㅂ’자형의 결구방식을보이는 목곽집수시설과 토기조집수시설의 조합관계, 새롭게 등장하는 석조우물의 조영은 미호천유역에 대한 백제의 중앙양식 기술과 물질문화가 직접적으로 반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3기는 5세기 후엽에서 6세기 후엽에 해당한다. 목곽집수시설은 Ⅰa형식이 진천의 취락유적에서 확인되며, ‘ㅁ’자형의 결구방식을 보인다. 그리고 백제의 퇴축 및 고구려의 미호천유역점유과정에서도 유지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제3기 이후 미호천유역은 본격적으로 신라의 영향권에 접어들면서, 신라의 석조우물과 석축집수시설이 관방유적을 비롯한 다양한 유적에서축조되고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일어난 자연재해는 기상재해와 지질재해, 생물재해로 나누어살펴볼 수 있다. 이 중에서 농경과 관련된 가뭄과 홍수, 서리, 우박과 같은 기상재해와 메뚜기피해나 역병과 같은 생물재해가 백성들의 삶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 자연재해에 대한 대책은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시혜적인 측면이 강했지만, 백성들의 처지에서는 당장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국가나 사회로부터 어떤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도재해 극복의 방법이었지만,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국가의 구제를 받지 못하면 다른 나라로 도망하기도 하였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도적이되기도 하였다. 산천에 제사를 지내거나 기도를 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는 인신매매나 유아 살해 등도 자행되었다. 자연재해는 농사를 망치고 흉작으로 이어져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역병에 걸리는 등 악순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민간에서자연재해에 대응하는 최종 목표는 기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 연구를 통해 자연재해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과 국가에서 내놓은 대응책이 일반적으로 어떤 경향성을 갖는지와 보편적인 방안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자연재해의 발생과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 등에 대해서도 살펴봄으로써, 자연재해가 촉발한문제가 당시 사회에 끼친 영향이 무엇이었는지도 대략 밝혀보았다.
불국사는 통일신라시대, 더 나아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찰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선행연구를 통해 불국사는 화엄불국토를 구현한 사찰임이 밝혀졌다. 본고에서는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건축물들이 화엄불국토의 어떤 부분에 해당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했으며, 또 불국사의 중심불전에는 어떤불상들이 봉안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고찰하였다. 불국사는 사바세계와 연화장세계의 경계인 석단 위에 자리한다. 석단의 아래쪽에는 연화장세계를 떠받치는 향수해가 있는데, 향수해를 건너 大梯(백운교, 청운교, 칠보교, 연화교)를올라야 연화장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대제는 모두 52단의 계단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화엄경』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52단계의 보살도를 상징한다. 부처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뜻의佛門(자하문)의 양 옆에는 누각 형태의 주초로 된 누각(범영루, 좌경루)이 있는데, 이는 연화장 세계의 세계해를 상징한다. 그리고 『법화경』 「견보탑품」에 근거한다고 알려진 두 석탑(석가탑, 다보탑)은 해인삼매를 통해 드러난 연화장세계를 조형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불국사고금창기』 등 관련 문헌자료들을 검토해보면, 불국사의 중심불전에 봉안된 주존불상은 사찰의 역사성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예배존상이므로 통일신라시대의 주존불상의 도상적 전통에 따라 조성되었다고 추정된다. 즉 현재 대웅전에 주존으로 봉안된 석가오존불상중에서 제화갈라보살상, 미륵보살상, 가섭존자상, 아난존자상은 조선 후기 도상체계를 따르는새로운 도상을 나타낸 것이지만 같은 시기에 조성된 불상과는 달리 주존 석가모니불상을 설법인을 결한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조선 후기에 불상을 조성하면서 통일신라시대의 주존불상과같은 모습으로 재현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극락전의 주존불상과 함께 조합을 이루어 불국사 중심불전(대웅전, 극락전) 구역은중생들이 직접 접할 수 있는 佛外向의 화엄불국토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었을 것이다. 이는석가모니의 근원적인 깨달음의 세계인 佛內證의 화엄불국토를 구현한 석굴암 본존불상과 대비되는 것으로 결국 불국사와 석굴암은 국토해와 세계해로 구성되는 화엄불국토를 유기적으로구현했다고 이해된다.
본 연구는 발해 상경성 외성 성벽 위에 남아있는 흔적을 근거로 발해시기 성벽에서의 여장존재와 그 모습을 추론해 보고자 했다. 연구의 진행 순서로 제Ⅱ장에서는 여장의 개념과 조영기술 발전을 조선시대 수원화성과 남한산성을 본보기로 정리해 보았다. 여장의 조영방법을고찰해 봄으로써 그 이전시기와는 어떠한 차이가 있으며, 발전된 기술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파악해 보았다. 제Ⅲ장에서는 고구려와 고려시기 성곽 가운데 여장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유적을 정리하여 발해와 비교하는 기준틀을 설정하였다. 제Ⅳ장에서는 상경성 외성의 규모와구조방법을 기존 문헌을 통해 파악하고, 이어 연구자가 확인한 여장 흔적을 소개하였다. 제Ⅴ 장에서는 각 시기별로 확인된 여장의 모습을 통해 발해 상경성 외성 성벽 위에는 어떻게생긴 여장이 존재했을까를 추론하여 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결과 발해 상경성 외성 성벽 위에는 폭 1m 내외, 높이 1.3m 정도의 여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장 길이는 타와 타구로 구별된 선진화된 여장이아니라 고구려나 고려의 경우와 같이 일정 거리를 연속적으로 유지하였을 것이다. 또한 재료가벽돌이 아닌 석재로 여장을 쌓았으므로 사혈과 같은 구멍을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발해 상경성의 외성 성벽은 지금의 모습과 높이가 성벽의 마지막이 아니라 체성벽 위에 여장까지 군사적 방어력을 충분히 갖춘 성곽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는 조선의 대민 인식을 국왕의 법 인식과 법률 시행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조선사회의 산적한 과제를 해결하고 진전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그 사회의 합의, 즉 법률로귀결되었다. 따라서 안정적인 법 시행은 개혁의 일관성과 관련되었고, 이는 곧 인민들로 하여금 국가의 개혁 방안을 신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조선은 經典과 史書의 제도를 검토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춰 채택하고, 이 제도가 안정적으로실현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했다. 안정적 실현을 위해서는 법적 안정성 확보, 다시 말해 법의지위를 확고히 해주는 것, 법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것, 법의 취지와 내용을 인민에게 알려주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인민들을 대하는 국가의 방식이 일방적인 통보 및 집행에서쌍방향 소통을 지향했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민에게 법 시행 뿐 아니라 법의 취지를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따라주기를 바랬다. 독법령은 전 인민을 대상으로 한 법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며, 조선 초기 국가의 대민 인식을 잘 보여주는 제도라 할 수 있다. 법과 제도에 대한 민의 충분한 이해와 그에따른 민의 자발적 준수, 이것이 법을 잘 아는 민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면서도, 조선이민에게 信義를 구축하고자 한 이유였다. 주목되는 것은 민 스스로도 자신의 위상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적극적인 정소나불만 제기 등은 국가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다. 결국 민들은 스스로 자신의 위상을 자각하고 있었고, 국가는 그러한 민의 위상에 기반하여법을 제정하고 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한 명나라 식자들의 평가와 인식 정도는 명의 대조선 외교와 군사정책의 전략과방향을 설정하는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명나라식자들이 조선을 어떻게 인식했는가에 대한 부분은 ‘文’뿐만 아니라 ‘武’의 입장도 주목해야한다. 본고에서는 그간의 연구를 수렴하면서 15~16세기 어떠한 요소들이 착종되어 조선 군사력 이미지가 조성되었는지 짚어보았다. 첫째 명은 조선을 ‘고구려의 후예’로 인식하며, 우월한 군사력을 이어받았을 것으로 보았다. 명 사신들도 조선을 고구려의 후예로 보며 사행길에 소감을 남겼다. 둘째 명나라와 여진은조선이 片箭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궁술에 능하여, 명의 요동 군사나 여진족들보다조선의 군사력이 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셋째, 16세기 중반 조선 조정은 일본의 눈치를 보지않고 ‘寧波의 亂’에 연루된 일본인 범죄자를 명나라에 압송하였는데, 이 일도 조선 군사력이일본 우위에 있다고 믿게 했다. 조선 군사력에 대한 이미지와 기대는 1592년 임진왜란 초반 일본의 거침없는 공격에 무너지는 조선의 모습을 보고 무너져 내렸다. 임진왜란 이후 명의 조선에 대한 군사력 인식은달라졌지만, 15~16세기 동안 명은 조선을 예의를 갖춘 문명국은 물론, 군사력도 갖춘 나라로보았던 것이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는 풍속화, 도석인물화, 기록화 등에서 기녀, 시녀, 여염집 아낙, 여선(女仙), 여협(女俠) 등에 이르는 다양한 여인상을 그려내 여성인물화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이전 시대의 화가에 비해 양적으로도 많은 여성상을남겼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전래된 화보나 선배화가들의 작품들을 참고하여, 자신만의화풍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는 시대양식이 되어 동시대 및 후대 화가의 여성인물상에도 지대한영향을 미쳤다. 이같은 중요성에 주목하여, 본 논문은 김홍도의 여성인물상을 살펴보고, 조선후기 여성인물화에 그가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 고찰해보았다. 김홍도의 여인상은 도상적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명대 사녀화풍의 미인상과 풍속화 속에등장하는 조선식 여인상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김홍도는 『군선도병』, 〈사녀도〉 등의 작품에서 중국 사녀화풍의 여인상을 그렸는데, 중국화보나 판화, 선배화가들의 도상 등을 참고하여습득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화풍으로 재해석하여 표현하였다. 이전의 도상들을 단순히 모방한것이라 아니라 여인의 얼굴형과 이목구비를 한국적 정서에 맞는 친근한 이미지로 변화시켜표현했다는 점이나 구도나 배경, 인물의 자세 등에서 변화를 주어 자신만의 스타일로 차별화해서 표현했다는 점이 그 예이다. 한편, 김홍도는 풍속화나 기록화 등에서 조선식의 여인상을 다양하게 표현하였는데, 크게어염집 아낙과 기녀로 나눌 수 있다. 유교적 이미지가 강한 가사노동에 집중하는 여성상은전 시대에도 그려졌지만, 김홍도에 의해 상업이나 수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까지 확대해서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 여인들의 감정이나 표정 등까지도 세밀하게 관찰되어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었다. 또한 김홍도의 기녀상은 이전에 기록화에 비해 화면상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커지고, 여러 주제에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등장하여, 이후 신윤복에의해서 단독 제재로 발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같은 김홍도의 여성상들은 김득신과 신윤복, 이재관, 유운홍, 백은배 등 동시대 및 후대화가들의 여성인물화에 주제 및 소재, 기법과 형식면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민화로까지 저변화되어 지방화가 및 무명화가들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답습되어 하나의 시대양식이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인 학문의 체계를 갖추게 된 일본 고고학은 초기부터 대만, 조선등의 식민지 고고학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 고고학에서 시작된 선사시대에대한 관심과 여러 학술적 논쟁들, 고분 발굴이 제한되어 있는 일본 고고학의 한계 등으로인해 대만과 조선은 일본 고고학에 있어 절호의 고고학 필드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본 고고학은 동아시아에서 학문적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제국주의 고고학’과 식민지배의 정당성을확보하기 위한 ‘식민지 고고학’의 성격을 모두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고고학 조사는 대만과 식민지 조선에서 모습이 전혀 다르다. 조사의 결과는 식민지 고고학의 전형이지만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 완전한 ‘타자’ 일수는없었던 식민지 조선, 역사적 관계가 전혀 없기에 결국은 일본의 관학 고고학에서 관심이 멀어지고 일반인의 조사가 중심을 이루게 된 대만 등, 당시 일본 고고학의 관심 및 일본 고고학이식민지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식민지 고고학의 모습이 결정된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의 제국주의 고고학의 전체 모습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다양성의 배경과 그 흐름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대만 고고학의 형성과정을 일본고고학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아 일본 제국주의 고고학, 식민지 고고학이 가지고 있던 다양성을 검토하였다.
순창 성황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을 간직한 郡縣祭儀라는 특징을 갖는다. 1992년에전북 순창에서 발견된 「성황대신사적현판」(국가민속문화재 제238호)에는 13세기에서 19세기까지 600년간 성황제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16세기 중엽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국의 군현에 330개나 되는 성황제가 확인된다. 하지만 그 가운데 현재 관련 자료가온전하게 남아 있는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런 점을 감안할 때, 「성황대신사적현판」은 순창의성황제와 지역사회 연구는 물론이고 한국 성황제의 변천과정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사료라는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성황신은 군현 단위의 지역을 지키는 고을의 수호신이다. 성황을 모시는 사당을 ‘성황당’, ‘성황사’, ‘성황묘’라 하고, 성황을 모시는 제단을 ‘성황단’이라고 불렀다. 순창 성황제는 단오절을 전후로 처음에는 산성대모를 성황신으로 모시다가 15세기에 들어와 薛公儉으로 전환되었다. 13세기 말에 여러 차례 封爵과 함께 國祭로 중시되던 성황제는 조선에 들어와 유교식 삭망제로 바뀌었다가 조선후기에 다시 단오절에 시행되는 등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그러다가 향리 주도로 오랫동안 유지되던 성황제는 근대 이후 점차 무속인이 주도하는 방식으로바뀌었다. 그 결과 고을축제로 시행되던 성황제는 점차 그 기능이 약해져 祭儀보다 단오 행사인 두령정이 물맞이, 단오난장, 응양정 그네뛰기 등에 더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사라져갔다. 순창의 「성황대신사적현판」이 주는 가치는 성황제의 유래와 변천을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옛 성황제의 모습을 되찾는 기회를 제공한다는데 있다. 특히 단오절에 순창의 대모산성과읍치 성황사, 그리고 읍치 내에서 지역민과 함께 베풀어졌던 성황제는 고려 이래 지방의 행정구역이 어떻게 지역공동체로 유지·전승되어 왔는지를 엿보게 해 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로써 볼 때, 순창 성황제는 순창이 간직해 온 소중한 유산인 동시에 오늘의 순창이되살려야 할 새로운 문화라는 점에서 오래된 미래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