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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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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북한산성 성제의 원인과 배경을 알아보고 이것이 북한산성의 보존활용을 위해 추진중인 세계유산등재에 활용 가능한 논리를 제공하기 위해 쓰였다. 북한산성은 국가의 보장지처로 숙종대 전면 신축된 성곽으로 당시의 축성술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 산성이다. 한양도성의 개축 직후 축성된 북한산성은 한양도성에서 태동한 소성석 쌓기 축성술이 전면적으로 채택되었다. 소성석 축성술은 조선후기 고용노동의 성립과 더불어 완성된 새로운 축성방식으로서 이전시기의 축성방식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성곽의 성제는 북한산성의 축성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산성은 처음 축성된 이후 한번도 전면수축을 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초축당시의 성제를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표본이다. 따라서 북한산성은 조선후기 성제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물로서의 역할을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북한산성의 성벽은 전축, 반축, 반반축, 지축여장 등 서로 다른 높이로 축성되었다. 그리고 여장은 철여장을 갖춘 지점과 평여장으로 축성된 지점으로 나뉘고 있다. 이러한 성벽 높이나 여장 구조의 다양성은 북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해 사용된 화포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북한산성을 수비하는 화포는 조선의 전통적인 총통류를 배제하고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불랑기, 목모포, 위원포 등의 화기를 사용했다. 성벽높이가 낮아지게 된 배경으로 화포의 효율적인 활용을 위한 것으로 파악했고 평여장은 화포사용으로 인한 아군끼리의 피해를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았다. 논문에서 밝힌 바를 종합해 볼 때 북한산성은 조선의 전통적인 산성방어방식과 외래계 화포가 결합된 조선후기의 독창적인 산성이다. 북한산성은 동 서양의 문물교류가 조선에 미친 영향을 축성사적으로 증명하는 증거물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 37) 三軍門의 군사를 동원하여 축성하였으며, 조선후기 발달된 축성기술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고고학적 조사사례가 적어 체성 이외의 성벽관련시설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편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된 배수시설 치성 墩臺 등 성벽관련시설을 중심으로 축조수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남한산성 강화산성 수원화성 지방 산성과 비교하여 시기에 따른 축조기술의 변화와 중앙의 기술이 지방 산성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였으며, 북한산성이 갖는 축성사적 위치를 도출하였다. 배수시설은 대체로 유사한 형태를 보이면서도 암반층을 굴착하여 성벽 하단부에 수구를 조성하고 있어 지형을 고려한 발달된 축조기술을 볼 수 있다. 치성은 이전보다 길게 돌출되는 변화가 보이며, 도성과 그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산 정상부에 배치되었다. 돈대는 성벽과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며, 조선후기 중국 城制의 영향으로 강화도 일대에 도입되어 수원화성의 공심돈으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요소로 이해할 수 있다. 1716년(숙종 42) 지방에 수축된 상당산성에서는 지형에 따라 체성의 높이가 다르게 나타나 북한산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기술의 전파는 전문 석공집단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북한산성은 조선후기 축성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에 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이나 도성과 관련이 깊은 곳이며, 전란에 따른 피난처, 국난 극복을 위한 보장처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 산성은 최근까지 4차례, 행궁지는 6차례 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많은 조사성과를 거두었고, 이는 문헌자료에 기록된 규모와 구조, 축조 및 운영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를 적지 않게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북한산성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대개는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축성 목적과 과정, 남아 있는 현상에 대하여 다룬 예가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2013년부터 북한산성 성벽과 성랑지, 치성, 돈대, 수구에 대하여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행되었고, 중흥산성의 성벽도 확인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2010년 이후부터 심포지엄이나 학술세미나가 7차례 정도 열리면서 점차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고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행궁지조사와 연구는 북한산성과 함께 다루어져 왔는데, 2009년 행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이 수립되었고, 그에 따라 2011년부터 정밀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결과, 내 외전지와 내 외 행각지, 추정보각지 등이 확인되었고, ‘己巳’ ‘辛訓’ ‘戎’ ‘別右’자 등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행궁지를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도 2회 개최되었으며, 학위논문도 집필되고 있다. 가장 시급하게 이루어 져야 할 연구는 발굴성과를 분야별로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인데, 여기에서는 네 가지로 나누어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북한산성의 축조기법을 보다 면밀하게 연구해야 하겠다. 둘째, 축성에 참여한 기술자와 사용된 도구 및 장비의 발전 양상 연구가 전통건축사적인 관점에서 진행될 필요가 있다. 셋째, 숙종대 축성된 지방 산성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도 필요하다. 넷째, 출토 유물과 관련된 연구와 분석이 진행되어야 한다.
승영사찰은 승려들의 예불공간과 군영공간을 갖춘 사찰로 조선시대 후기에는 산성 등 주요 방어 거점이 되는 곳의 사찰을 의미하며, 사찰을 세우고 승려들이 머물면서 산성방어를 담당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러한 사찰은 산성 내 수구나 성문, 암문 근처에 입지하여 성곽 내에서 취약한 부분을 수비하고, 승군이 훈련하는 곳으로 각종 무기를 제조하거나 보관하는 전투의 기지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승영사찰에 거주하는 승도는 임무에 따라 역할이 나뉘므로 승영사찰은 산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북한산성 내 승영사찰의 공간 구성은 대부분 사동중정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전각을 구성하고 있는 반면 일부는 지형적 특성에 맞게 다른 공간배치 유형을 보이고 있다. 승영시설과 예불공간이 분리되었으며, 특히 승영사찰의 독특한 기능적 특징인 군기창고의 공간이 추가적으로 형성되었다. 화약무기 등을 보관·관리하는 군영공간의 형성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특징은 중흥사와 부왕사지에서 명확히 드러나며 이는 남한산성의 한흥사지에서도 유사하게 확인된다.
본 논문은 북한산성 축성 배경으로 축성에 직접적인 역할을 한 승려들의 활약을 주목하였다. 이를 밝히기 위해 북한산 승탑의 현황과 주요 승탑의 양식 특징을 살펴보고 승영사찰과 관련된 승려들의 역할과 위상을 승탑의 미술사적 의의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현재까지 북한산에 건립된 승탑은 12기가 확인되는데, 고려후기와 조선후기에 주로 건립되었다. 태고사, 봉성암, 승가사, 부왕사, 진관사, 국녕사 등 주로 승영사찰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승영사찰에서 활약한 승려의 부도임을 알 수 있다. 팔각원당형 승탑은 태고사 원증국사탑과 봉성암 성능대사탑이며 대부분 조선후기 석종형 승탑이다. 태고사 원증국사탑은 고려 말과 조선초기 석조미술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어 시대성을 보여주고 있다. 팔각원당형 승탑 가운데 ‘석종형’ 탑신을 채택한 최초의 승탑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고승의 승탑으로 석종이 유행한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성능대사탑은 전반적으로 간략화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어 조선후기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北漢誌』와 『重興遊記』 기록을 통해 당시 북한산성에 주둔했던 승려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사찰 관리를 위해 머물렀던 승려들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승영사찰 내 승려들의 활약을 살펴본 결과 계파 성능 외에도 보경 사일, 성월 철학 등 북한산성 도총섭을 지낸 승려들과 진국사의 승장 풍일은 당시 왕실사찰인 용주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임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북한산성 축성 배경으로서 승려들의 활약과 위상을 승탑의 미술사적 의의 측면에서 살펴본 결과 당대 승영사찰 승려의 높은 위상과 활약이 분사리 승탑의 건립배경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글은 요동과 길림, 서북한지역 청동기시대 묘제의 권역별 분포와 문화성격 및 단계별 변화상 등에 관한 검토이다. 본문에서는 해당 공간역의 청동기시대 묘제를 총 6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주요 특징을 정리하였다. 1. 요동반도권은 크게 6단계에 걸친 변화상을 보인다. ①단계는 쌍타자1기문화(기원전 20~19세기)로서 적석총이 주요묘제로 사용된다. ②단계는 쌍타자2기문화(기원전 18~15세기)에 해당되며 토광묘와 옹관묘, 고인돌 등이 조성된다. ③단계는 기원전 14~11세기 무렵의 쌍타자3기단계로 적석총과 고인돌이 공존한다. 그리고 ④단계는 기원전 10~8세기 무렵 강상유형(적석총)·쌍방(탁자형 고인돌)·동산유형(개석형 고인돌)이, ⑤단계는 기원전 7~4세기무렵, 누상유형(적석총)·패방유형(고인돌)·상마석상층유형(토광묘)이, ⑥단계는 윤가촌유형(기원전 3~2세기)의 묘제로 토광묘와 석곽묘가 확인된다. 2.요동북부권 역시 6단계에 걸친 변화상을 보인다. ①단계:기원전 18~17세기 무렵, 마성자문화 1기(동굴묘), ②단계:기원전 17~15세기, 마성자문화 2기(동굴묘), ③단계:기원전 14~11세기, 마성자문화 3~4기(동굴묘, 석관묘), ④단계:기원전 10~8세기, 신성자유형(개석형 고인돌)·이도하자유형(석관묘), ⑤단계:기원전 7~4세기, 신성자후기(고인돌)·이도하자후기유형(석관묘), 정가와자유형(목·토광묘), ⑥단계:기원전 3~2세기, 산용(고인돌)·상보촌(석관묘)·보산유형(고인돌) 등이 전개된다. 3.서류송화강유역권은 4단계의 변화상을 보인다. ①단계는 기원전 11~10세기 무렵의 서단산유형 출현기(석관묘), ②단계는 기원전 9~8세기, 서단산유형 전기(석관묘, 고인돌), ③단계는 기원전 7~4세기, 서단산유형 중기(석관묘, 고인돌), ④단계는 기원전 3세기, 서단산유형 후기(석관묘, 고인돌)로 이어진다. 4.두만강유역권은 흥성문화 중후기(기원전 16~13세기), 유정동문화 전기(기원전 12~9세기), 유정동문화 후기(기원전 8~3세기) 등 3단계의 변화상이 간취되며 묘제는 모두 석관묘이다. 5.대동강유역권은 4단계로 나누어 변화상을 살폈다. ①단계(기원전 13~10세기), 팽이형토기문화 1기(탁자형 고인돌, 석관묘), ②단계(기원전 10~8세기), 팽이형토기문화 2기/미송리유형(탁자형 고인돌, 석관묘), ③단계(기원전 7~6세기), 팽이형토기문화 3기/미송리후기(고인돌, 석관묘, 석곽묘)유형, ④단계(기원전 5~3세기), 팽이형토기문화 4기(고인돌, 석관묘, 석곽묘)이다. 6.압록강유역권은 3단계의 변화상을 보인다. ①단계:기원전 10세기 무렵, 신암리유형 Ⅱ기, 공귀리유형 1기(석관묘), ②단계:기원전 10~9세기, 신암리유형Ⅲ기/미송리·공귀리유형 2기(동굴묘, 석관묘), ③단계:기원전 7세기, 미송리후기유형(동굴묘, 석관묘)이다.
본 논문은, 한강본류역과 북한유역에 위치한 청동기시대 취락 중, 일정 정도의 규모가 되는 근접한 거리에 위치한 취락을 대상으로, 마을의 구성요건(주거지, 환호, 수장의 거처, 생산시설, 묘제)을 토대로 취락의 특징을 검토하여 취락간의 지역적 연계망을 상정 및 분석함에 목적이 있다. 이러한 지역적 연계망에 대한 분석을 함에 있어, 집단의 리더를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였다. 김포 양촌 취락은, 분산된 취락으로 단위별로 서로 구조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소사동유적과 그 주변 취락(용이·죽백동·현촌유적), 양교리 일대 유적, 그리고 거례리·용암리·원천리 유적 역시 그 일대의 중심이 되는 취락을 中心으로 서로 네트워크가 잘 이루어진 구조로 파악되었다. 이들 취락의 유사점은 서로 1㎞ 내외의 왕래할 수 있는 정도의 가까운 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5개 영역의 취락군의 기능적 네트워크를 검토하였는데, 이 중 2가지 측면에서 영역별로 흥미로운 점이 관찰된다. 첫째, 2개 영역(소사동→용이·죽백동, 거례리→용암리)에서 한 곳의 초기 집단이 그 주변에 영향을 끼친 사례를 검토하였다. 이는, 초기 정착민이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인구가 증가하여 주변 집단의 번성을 자극하는 예가될 수 있겠는데, 소사동 일대와 거례리 일대가 해당된다. 둘째, 분산된 영역에 주거군이 다수 분포하는 경우인데, 양교리, 양촌, 당동리 일대 유적이 해당된다. 취락의 규모로 보았을 때, 양촌>양교리>당동리순으로 볼 수 있지만, 각 영역별로 체계적인 구조를 이루는 취락을 검토했을 때는, 양교리>양촌>당동리순으로 확인되었다. 이 중 양촌 유적이 수장의 지도 아래, 가장 체계적인 취락의 시스템을 이룬 것으로 파악하였는데, 광장, 작업전용 공간, 공간활용부지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취락의 구조 체계를 이룬 것으로 분석되었다.
초기 고구려의 기층문화를 검토하기 위한 선행조건의 일환으로 소자하와 부이강 유역의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중요 유적에 대하여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집터 유적은 대부분 소자하와 부이강의 샛강 옆의 산기슭에 위치한다. 그 이유는 이곳의 지형조건이 높다란 산 사이의 계곡이므로 강 언저리에는 자연제방이 형성될 수 없는 지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집터의 입지는 망화문화와 관련 있는 유적과 비슷한 양상이다. 왕의구 1호 집터에서는 찰흙으로 벽을 만들고 양쪽 벽 위에 판자돌을 덮은 외줄 고래와 아궁이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고래와 아궁이의 구조는 취사나 난방과 관련이 있는 시설로 초기 고구려의 주거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한 자료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화덕 시설은 출입문과 대칭되는 쪽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왕의구 1호 집터는 같은 방향에 있어 주목되며 이것은 유적 주변의 지형을 고려한 것이다. 토기는 홍갈색 토기와 니질의 회색 토기가 함께 찾아져 2시기에 걸쳐 문화층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니질 계통은 연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소황구 유적에서는 다리 모양의 큰 손잡이가 찾아졌는데 만든 방법은 고구려 초기의 토기 제작과 비슷하여 문화의 연계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철기는 쇠괭이, 쇠낫, 쇠삽 등 농기구가 대부분이고 가끔 화살촉과 낚시 바늘이 찾아졌다. 무덤으로는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조사되었는데 고인돌의 분포 관계를 보면 소자하유역에서는 탁자식과 개석식이 모두 조사되었지만 부이강에서는 개석식만 보고되었다. 이것은 고인돌의 전파 과정에 따른 시기 문제와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부이강유역의 고인돌은 무덤의 구조와 껴묻거리를 볼 때 기원전 3세기쯤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무덤의 구조에서는 하협심(탁자식)과 용두산(개석식) 고인돌의 돌무지시설이 특이하다. 그것은 기능적인 것보다 무덤의 형식 변화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초기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선행 묘제로 해석되며 환인 망강루 유적과 비교된다. 무덤에서 찾아진 껴묻거리를 보면 돌널무덤에서는 미송리형 토기와 마성자문화와 연관 있는 토기가 찾아졌다. 고인돌에서는 비교적 늦은 시기의 토기와 안테나식 청동손잡이 철검, 청동방울 등이 조사되었다.
평양지역에 있던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퇴출된 이후의 상황을 추적하였다. 낙랑군은 대릉하 하류인 랴오닝성 금주시 지역으로 옮겨가 설치되었다. 낙랑군은 전연, 후연시기 이 지역에 존재하다가 북연시기에 이르러 랴오닝성 조양시 지역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전연ㆍ후연ㆍ북연시기 행정군으로 존재한 낙랑군의 실체를 낙랑태수, 조선현령 등의 관직명을 통해 확인하였다. 북위시기인 462년경에 樂浪郡은 樂良郡으로 개명되었다. 낙랑군은 444년에 설치되었다가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폐치되었고 이후 정광(520~525년)에 복치되었다. 낙랑군은 537년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이때는 허베이성 보정시 지역으로 옮겨져 설치되었다. 한편 낙랑군은 허베이성 천진시 지역에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북위시기 행정군으로 존재한 낙랑군의 실체를 낙랑태수, 낙랑중정 등의 관직을 통해 확인하였다. 낙랑주민은 북연의 멸망직전에 대거 북위 영역으로 옮겨졌다. 대표적인 것이 허베이성 진황도시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이주해 온 낙랑주민 등을 중심으로 하여 낙랑군 속현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낙랑군소속이 아니라 다른 행정구역에 소속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예로서, 북평군 조선현, 요서군 함자현, 낙랑수성이 있다. 그리고 천진시 지역에 연국낙랑 낙도현 등이 있다.
대통사는 527년 백제 웅진기 공주지역에 창건되었다. 일제강점기 가루베 지온에 의해 ‘대통’명 인각와가 수습된 이후 대통사(지)는 현재 백제사의 중요한 논쟁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까지 대통사를 입증할만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2018년 공주시 반죽동 197-4번지 유적에서는 ‘대통’명으로 볼 수 있는 인각와를 비롯해 수막새와 암막새, 소조상, 치미, 토기 등 다양한 백제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내림마루나 추녀마루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완형의 마루수막새도 한 점 수습되었다. 수막새는 화판의 판단부에 따라 크게 7가지 형식으로 분류되었다. 이 중 창건와로는 판단원형돌기식을 비롯한 판단융기식, 판단돌기식, 판단첨형식, 돌대식 등이 추정되었다. 창건 수막새의 문양은 연화문이 주류를 이루었고, 일부 판단융기식, 판단첨형식, 돌대식 등은 그 동안 한성기~사비기 등의 백제유적에서 검출된 바 없는 초출 자료로 파악되고 있다. 수막새의 문양 계통은 대부분 남조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사찰 창건과 관련하여 남조 장인의 백제 파견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장인 파견은 비조사 창건과 관련하여 백제의 장인이 일본에 파견된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대통사지의 탐색 작업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대통사지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의 형적이 드러날 날도 머지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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