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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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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한성기 중국과의 문화 교류에 대하여 그동안에는 西晉(265~316년) 및 東晉(317~420년) 과의 교류에 대해 많이 주목하였다. 본고에서는 이 시기와 함께 始祖仇台전승을 통해 後漢 (25~220년) 公孫氏와 曹魏(220~265년) 시기까지 중국과 문화 교류의 폭을 조금 더 넓혀보고자노력하였다. 그리고 5호 16국(304~439년) 시기 前燕(337~370년)과 前秦(351~394년)과의 교류양상도 살펴보고자 하였다. 475년의 웅진 천도 이전에 이루어진 남조 劉宋, 북조 北魏와의 문화교류도 간단히 알아보았다. 그 결과 후한 공손씨, 조위 시기는 백제를 비롯한 마한 제국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중국과문화 교류를 시작한 시기로 판단된다. 백제와 서진의 문화 교류는 기존에 알려진 施釉陶器가아니더라도 청자 狮子形器와 虎子, 낙랑계 토기와 그 영향을 받은 백제 토기의 등장으로 살펴볼수 있었다. 백제와 전연, 전진 등 5호 16국과의 교류는 관련 자료가 빈약하여 적극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상정할 필요가 있다. 백제와 동진은 황해 바닷길을 통한공식적인 문화 교류가 매우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도자기, 과대, 초두, 쇠뇌, 토기 등에서 그양상이 광범위하게 보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백제와 劉宋(420~479년)의 교류는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따라 고구려에 비해 활발하지못했지만, 易林 , 式占, 弩機(쇠뇌), 元嘉曆이 도입되었고, 개로왕의 신하들이 劉宋으로부터 將 軍號를 받기도 했다. 백제와 北魏(439~534년)의 교류도 문헌 기록과 함께 서울 풍납토성 출토연화문 와당 등을 통해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본 논문은 백제가 중국과의 교섭에서 남조보다는 북조 왕조와 교섭을 추진한 목적과 그것이가지는 의미 등에 대해서 검토해 본 것이다. 백제는 전통적으로 중국과의 교섭에서 대부분 남조왕조를 통해 신문물을 수입하였기에 남조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한성백제시기 개로왕대와 사비시대 위덕왕대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교섭에서 벗어나 북조 왕조와 교섭을 추진하였기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개로왕은 북위 효문제에게 표문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표문의 내용은북위에게 고구려를 쳐야 하는 명분을 주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다 보니 표문의 내용이 과장되고허위로 볼 수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이와 같은 내용을 보낼 수밖에없었던 것은 직면한 문제 즉 고구려의 군사적인 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북위가건국된 이후에도 그리고 또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였을 때도 사신을 보내지 않다가 느닷없이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벌의 명분을 표명한 것은 이와 같은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로왕의 이와 같은 대북위 교섭은 황제의 거절로 끝이 났으며 결국 고구려의 군사적공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개로왕은 남조 일변도의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북조와의 외교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진정성이 결여된 외교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지못하였다. 더 나아가 개로왕은 중국의 북조 정권이 남조 정권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 것을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였던 결과에서 이와 같은 일이 빚어진 것이다. 또한 개로왕대 대중국 외교를 담당한 관료들은 남조 일변도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던 실무 주역들이었으므로 북조 정권과의외교 정책의 경험이 부족하였기에 그다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할 수 있다. 사비 시기 위덕왕은 또다시 북조 왕조와 교섭을 재개하였다. 당시 고구려나 신라는 이미 북제와 교섭하여 책봉을 받은 상태였기에 백제로서는 상당히 늦게서야 대중국 교섭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남조 왕조의 진과 북조 왕조의 북제에 각각 사신을 파견하여 남조 일변도의 외교정책에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그가 북제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고구려를 염두에 둔 행위였다기 보다는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무엇보다 컸다. 물론 중국 대륙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한 것과아울러 국제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남조의 진뿐만 아니라 북제와의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그리고 북주가 화북을 통일하자 곧바로 사신을 보냈으며 다음 해에도 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관계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북주가 들어선 다음 단 한 번의 사신 파견으로그쳤으나 백제는 두 번이나 사신을 파견한 것에서도 그 사정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 개로왕과 달리 위덕왕의 이와 같은 북조 왕조와의 교섭은 이후 통일왕조 隋로 이어진 중국의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개로왕의 실패를 거울삼아 위덕왕은 북조 왕조와의 교섭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였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백제의 북조 왕조와의 교섭에서 사행로는 서해 횡단항로가 주로 이용되었다. 물론 개로왕대와위덕왕대 사신들의 출발 장소는 상이하지만 바다로 나아간 이후 대체로 서해 횡단항로를 이용하였고 새로운 항로의 개척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능허대는 백제시대 외국 사신의 출항과 입항이 이루어지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능허대와 그 주변은 대규모 도시 개발로 인해 현재는 원지형을 거의 살필 수 없다. 따라서 선박 장소로서의 능허대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의 해결을 위해 고지형분석 방법을 이용한 능허대와 주변의 지형을 살핌으로써 선박장소로서 능허대의 가능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고지형분석은 미시적이고 거시적 관점에서 지형의 3차원 판독을 진행하였으며, 이와 함께3차원 지형 모델링 복원하여 해수면의 변동 분석을 같이 실시함으로써 능허대와 주변 일대의선박장소로서의 적합한 지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방법을 바탕으로 고지형 분석을 실시한 결과 능허대와 그 주변은 구릉지와 야트막한 미고지성 지형으로 이루어진 모습을 살펴볼수 있었으며, 동쪽의 청량산에서부터 발원한 구유로가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을 확인하였다. 더불어 능허대의 동쪽 사면에 접한 곳으로는 선박의 정박이 이루어질 수 있는 넓은 집수지성지대와 함께 작은 어선의 입출항이 가능할 수 있는 갯골 등의 흔적도 파악하였다. 이러한 분석결과를 통해 능허대는 배의 정박 장소보다는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 좋은 장소로서의 기능이 우선하였던 것으로 이해되었고, 오히려 선착장으로서의 지형은 능허대의 동쪽, 고지도에 표시된 한진의 지명이 있는 지형이 유력할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물론 능허대와 주변의 지형들은 항만의 자연 입지 조건에 부합하는 모습이 명확하고 물자와 인력이 이동하기에 좋은 자연지형을 갖추고 있어 경제적 조건의 항만 입지와도 일치한다. 이러한 입지조건 파악을 통해 백제및 중국 사신들의 사행 이동로의 지형도 같이 파악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이동의 방향 등도살펴볼 수 있었다.
기원전 126년 濊君南閭는 28만 구를 거느리고 요동군에 내속하였다. 이 사건은 한나라와고조선, 그리고 흉노 등을 포함한 지역 정세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시고조선의 멸망, 그리고 한사군의 설치 및 이치로 이어지는 일련의 변화에 있어 도화선 역할을했다. 하지만, 그동안 이 사건은 주로 위만 정권 혹은 한 무제의 입장에서 파악해왔다. 본고에서는예군 남려의 입장에서 그가 우거를 이반하여 요동군에 내속한 이유와 그 결과로 추진된 창해군의설치와 폐치 과정을 살폈다. 아울러 같은 지역 내에서 현도군이 설치되는 과정, 그리고 압록강중상류 유역 주민들의 성장에 따른 이른바 ‘夷貊所侵’에 의해 구려 서북으로 이치하는 과정 및그 의미를 추적하였다. 예군 남려 세력의 중심지는 동옥저 세력이 위치했던 함경남도 함흥 지역일 가능성이 높으며, 예군 남려 세력의 요동군 내속과 연동하여 설치된 창해군의 군치 역시 동일한 지역으로 보는것이 자연스럽다. 외신의 지위에 있던 위만 정권이 더 이상 入見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 되자, 위만 정권의 간접 지배 권역 안에 있던 예군 남려는 이에 대한 타개의 과정에서 요동군 내속이라는 방안을 선택했다. 같은 시기 요동군은 상인 彭吳를 통해 교역로를 개통하고자 하였고, 이는 滄海郡의 설치로 이어졌다. 창해군의 설치는 예군 남려와 요동군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물린결과였다. 한편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예맥 지역에는 玄菟郡이 설치되었다. 현도군은 이후夷貊의 침략을 받아 서북 방면으로 치소를 옮긴다(제2현도군). 제2현도군의 ‘동계’에는 幘溝漊가설치되었는데, 이는 요동군과 위만 정권이 외신체제에 서로 합의한 이후, 동이 지역에서 지역의대표 세력에게 중국의 문물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토착민들의 협력을 이끌어 냈던 것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樂浪土城에서 출토된 암키와 수키와 수막새의 제작방식을 검토하고, 그 전반적인 양상에 대해 정리하였다. 암키와 수키와의 제작은 성형틀을 사용하지 않는 ‘무틀성형기법’ 과 ‘원통형 성형틀’ 사용법으로 구분되며, 수막새는 雲文의 와당문양을 유지하되 다양한 접합방식이 구사되었다. 이것은 漢武帝이후 즉 前漢중 후기에 漢式조와방식을 도입한 결과로, 後漢 代및 北魏六朝의 새로운 기술요소들은 유입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주목되는 점은 진한을 와범압날식시문법(수막[S]), 미구 성형방식과 같이 주변지역에서 찾을 수 없는 낙랑만의 제작방식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낙랑은 중원의 조와기술을바탕으로 그 기술적 범위 내에서 독자적인 생산 환경을 전개시켜 나갔다. 그러한 가운데 와범압날식시문법과 같이 주변지역에서 찾을 수 없는 기술요소가 나타나게 되며, 이것은 낙랑 내부의생산 환경 속에서 독자적인 제작방식을 정착해나간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낙랑의 조와기술은 백제 한성기로 비교적 충실히 유입된다. 다만, 낙랑의 조와기술이 그러하였듯, 백제 한성기의 조와기술도 수용하는 상황에서 그 기술정보를 받아들이면서변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약 4세기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동아시아에서는 다양한 기와제작방식이 등장 변용되었고, 각 지역 나름의 기법으로 정착하였다. 전한대에 걸친 한식 조와기술의 수용 이후 후한을 거쳐북위와 육조에 이르기까지 조와기술의 새로운 양상이 낙랑 내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한반도 내의 백제로 그 교류의 방향이 전환되었던 상황은 당시 낙랑의 정치적 인식과도 연결될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은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사비에서 개최된 국제회의를 ‘사비국제회의’라 명명하고 그 회의의 개최를 둘러싼 한반도 남부 정세의 전말을 검토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정리할 수 있다. 541년 봄, 신라가 탁순국을 공격하여 병합하였다. 이는 ‘안라국제회의’의 결과였던 수년 동안의 안정이 깨진 것을 의미했다. 그러자 백제는 안라를 비롯한 가야제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1차‘사비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다만 이 회의에 신라는 참여하지 않았다. 백제는 개최된 회의에서 탁순의 멸망이 신라의 외침보다는 내부 분열에 그 원인이 있음을들었다. 이는 신라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문제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다름 아니었다. 안라는 백제의 회의에서의 미온적 대처에 불만을 품는 동시에 백제의 군령 성주 배치에 내재된침략 의도를 경계하여 ‘임나일본부’를 사주하여 신라와의 교섭을 진행하였다. 이에 백제는 안라를 비롯한 가야 제국의 親신라화를 경계하여 각국의 旱岐들을 설득하는 한편 왜에는 신라와의 교섭에 나선 ‘임나일본부’의 本處송환을 요구하였다. 544년 2월에 안라에서 다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다시 사비에서 2차 ‘사비국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탁순의 멸망에서 비롯된 가야제국의 안전보장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백제와 가야제국이각기 회의를 통해 얻으려 하는 바가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안라와 ‘임나일본부’는고구려와 통모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려 하였다. 548년 고구려의 독산성 공격은 그 결과였다. 그러나 백제는 신라와의 군사협력을 통해 방어에 성공하였고, 오히려 안라와 ‘임나일본부’의 의도가 백제에 드러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왜가 백제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당시한반도 남부 정세에서 안라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그 결과 백제의 가야제국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6세기 이래 가야제국의 균형외교를 상징하던 국제회의는 운영의 동력을 상실했다.
본 논문은 북한산성 관련 고전시가에 주목해 북한산성 지역의 가치 도출과 관광활성화 방안을도출하는 데 목적이 있다. 북한산성 관련 고전시가 가운데 북한산성 지역의 가치를 도출할 수있는 고전시가를 선별하여 스토리텔링으로 가공하는 작업을 했으며, 이러한 작업을 통해 북한산성 지역의 브랜드 가치 도출을 시도하였다. 현재 고전시가를 활용한 스토리텔링 개발과 이의연장선상인 문화콘텐츠 활용에 관한 연구는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 흐름에 발맞춰북한산성 관련 고전시가를 통해 스토리텔링을 개발해 이를 활용한 방안을 제시한다면 문화콘텐츠의 원천소스를 확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산성의 관광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다. 현재 북한산성에 관련된 고전시가는 경기문화재단의 북한산성문화사업팀에 의해 조사, 번역되었으며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연구자료를 활용해 스토리텔링 소재로 개발 가능한 고전시가를발췌하는 작업을 했다. 북한산성 관련 고전시가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시가는 사찰관련 고전시가라는 점에 주목해, 사찰을 주제로 한 고전시가를 선별해 스토리텔링을 개발하고이를 통한 활용 방안을 모색하였다. 활용 방안으로는 지역 브랜드를 도출하여 관광 테마 및 콘텐츠를 구축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북한산성 지역의 브랜드를 사찰관광지로 도출하였으며, 이에 걸맞은 관광 테마 및 콘텐츠 안을 제시하였다. 이 논문을 기점으로 아직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북한산성 관련 고전시가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1980년대 이래 吉林과 그 주변의 고고학 성과는 부여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이글은 2016년 영문으로 출간된 마크 바잉턴의 동북아시아의 고대국가 부여: 고고학과 역사적기억 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는데 그 일차적 목적이 있다. 나아가 그 연구가 한국과 동북아 고대사연구에 제시하는 새로운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해보고자 한다. 특히 부여와 고구려, 백제의건국신화가 특정 시기의 사회적 필요성에 따라 고안된 신화에 불과하다는 저자의 해석을 기억연구와 관련하여 되짚어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상기하게 되는 고조선 연구의 본질적 취약성도함께 지적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반일 종족주의 출간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 즉 ‘반일 종족주의 사태’를 분석하고, 그 식민주의적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아가 대중적으로 확대 재생산된반일 민족주의 신화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사 연구의 탈식민 과제를 제언하고자 했다. 2019년 7월에 출간된 반일 종족주의 는 비슷한 시점에 불거진 한일 무역갈등과 맞물려 큰화제를 몰고 왔다. 각계각층에서 거센 비판이 쏟아져 나왔지만, 한국에서 10만 부 이상, 일본(일어판)에서 30만 부 이상이 판매되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이 현상을 ‘반일 종족주의 사태’라고명명하였다. 이 책은 학술서와 대중서, 정치적 선전물 사이에서 줄타기했다. 특히 정치적 선전물의 성격이 강한데, 이는 책의 핵심개념인 ‘종족주의’가 레토릭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아울러 한국사 연구 전반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연구 성과를 자의적으로 전유했고누락했다. 자가당착적인 서술도 많았다. 그런데 한편으로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조선총독부 고서분서설, 만주 고토회복론에 입각한 대고조선론 등이 대중적으로 유포 소비되고 있다. 반일종족주의 와 같은 역사인식이 확산된 배경의 하나였다. 이제 일국사적 시각의 확장은 물론이고, 마이너리티 문제나 생태환경사와 같은 대안적 역사서술이 요청된다.
이순신의 북방유적은 함경도의 동구비보와 건원보 그리고 조산보와 녹둔도 등이 있다. 이중경흥부에 속한 조산보와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에 위치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왜구와 여진족을방비하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녹둔도의 경우 지금은 러시아 연해주와 연육화되었지만, 일제강점기까지도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활동하였던 지역이다. 녹둔도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순신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이순신이 역임했던 관직이 바로 동구비보와 건원보의 권관, 조산보의 만호와 녹둔도의 둔전사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북방지역 활동은 임진왜란 때의 업적에 비하여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이는 임진왜란관련 사료에 비해 북방활동의 자료가 영세하기도 하고, 북방활동 당시 이순신의 활약이 비교적소략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간 녹둔도는 역사 지리적 측면에서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나, 그 고고학적 조사는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지대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전무할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북한의 함경북도나선시와 경원군에 소재한 조산보와 건원보 등 이순신의 북방유적까지 그 대상을 넓힌다면, 그동안 한반도 남부에 머물렀던 이순신의 활약상이 한반도 및 동북아에도 선양될 수 있는 계기가되리라 생각한다. 이렇듯 남한과 북한의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의 북방유적을 조사 대상으로 하기때문에, 남북 간의 협력과 소통은 보다 원활해질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국제적인 공조 하에서러시아를 매개로 시도되는 남한과 북한, 러시아의 첫 공동조사인 만큼, 남북 교류와 학술 연구의새로운 모델이 제시 되었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향후 이순신의 북방활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더불어 동북아 평화공동체의 형성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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