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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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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본격화된 역사전쟁의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결과가 자리한 곳에는 언제나 정치투쟁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30여 년간의 역사전쟁은 정치적 주류 자리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세력 간의 치열한 정치투쟁 권력투쟁의 궤적과 함께했다. 그러므로 역사전쟁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곧 민주화 이후 30여년 만에 이뤄진 보수에서 진보로의 주류 교체의 과정에서 역사, 즉 역사-정치담론이 수행한 정치적 역할을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발한 역사전쟁에서 ‘진보의 전사’로 싸웠던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지금 여기’에서 성찰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짚어보는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그동안 역사전쟁에 대한 축적된 연구 성과들을 기반으로 1987년 민주화 전후부터 오늘날까지 치열한 정쟁 속에 보수에서 진보로의 정치적 주류의 교체가 이뤄지는 과정과 역사전쟁이 얽혀 있음에 주목해 그 전개 과정을 다섯 국면으로 나누어 재해석하고자 한다.
동북공정은 2002년 2월 말 베이징에서 “동북변강 역사와 현상 계열 연구 공정” 제1차 전문가위원회가 개최되면서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의 죽음과 문화대혁명의 종결, 중국의 개혁 개방과 1992년 한중 수교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북중관계도 변화하였다. 이러한상황 속에서 중국의 연구자들은 과거에 금기시되었던 중국 동북(만주)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기시작하였고, 한중 수교 이후 양국 사이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상이한 역사인식의 충돌이 일어나게되었다. 이 시기 북한을 비롯한 한반도 정세에 대한 현실적인 우려를 하게 된 중국 당국은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의 3차례의 보고서를 기초로 2000년 중국공산당 중앙의 결정에 따라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이 중심이 되어 동북지방의 공산당 전선부와 동북 3성 성정부, 사회과학원, 각급 연구기관들과 협력하여 공정을 준비하였고, 2001년 10월 동북공정이 승인되었다. 동북공정은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의 주임이었던 마다정(馬大正)과 리셩(厲聲) 등이 주도하였다. 중국사회과학원 산하의 변강사지연구중심은 동북공정의 과제 선정과 관리, 청대 당안 자료 정리, 해외 연구 번역과 데이터 베이스 구축, 학술회의 개최와 연구 성과 출판등을 전반적으로 관리하였다. 2019년 1월 중국사회과학원은 고고연구소, 고대사연구소, 근대사연구소, 세계역사연구소, 역사이론연구소, 중국변강연구소 등 역사 관련 6개 연구소를 아우르는 중국역사연구원을 출범시켰다. 중국은 중국의 국가적 위상이 상승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거시적인 역사 이론을 제시하려는것으로 보인다. 동북공정으로 증폭된 중국 중심의 역사인식은 최근 중국의 부상과 일대일로에 따른 국제질서의 변화와 함께 과거 중국과 이웃국가의 관계를 유교를 중심으로 한 조공책봉체계나 한자문화권등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본 논문은 현재 일본의 역사수정주의가 전후역사학 논쟁과 함께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에이르기까지의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핵심으로 다룬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논쟁은 전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오다가 소위 1982년 중국, 한국과의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를기점으로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여 각 국의 네셔널리즘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표면화되었다. 1965년 이에나가(家永)교과서 제3차 재판에서 문제가 된 오키나와전의 주민희생에 관한 역사기술로 오키나와 문제가 역사문제의 표면으로 나왔고, 난징대학살의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한국과 일본과의 전선을 만들어 갔다. 특히 헌법개헌을 가장 큰 목표로 세웠던 아베정권은이 역사적 쟁점을 적극적으로 표면에 부상하여, 2014년부터는 ‘역사전’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갈등구조를 형성하여, 국내외적으로 일본의 네셔널리즘을 강화해갔다. 아베정권과 발 맞추고 있는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은 한국과의 역사갈등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 부정의 핵심논리, 즉 소위 강제연행과 성노예의 표현이 시작된 것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내부의 진보세력이 만들어낸 것으로 정의하고, 아사히신문을 타겟으로 공격하여 일본의 시민사회의 전반적 우경화를 이끌었다. 이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는 국제 무대를 대상으로 소위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일본 메이지 시대의 정치적 영광과 경제적 성취를고양시키는 한편, 난징대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관련해서는 유네스코 회원국이자 분담금 1위 국가의 위상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규정 개정을이끌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이 주창하는 것이 ‘역사가 국가 간 정치적 이슈가 되어서는 안되고 인류 보편적 역사인식’이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중국과 한국이고, 이를 막고 있는 것이 일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제국을 경험한 유럽국가가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일본과 아시아,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역사전’은그간 전쟁 책임 논리 하에서 식민지의 문제, 식민지 지배의 책임의 문제가 은폐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본 고에서는 고고학 자료에 남아있는 기호를 중심으로 흉노 이전 유목사회가 가지고 있는자신들의 독특한 문자체계를 증거를 살펴보고 그 문자 체계가 어떻게 유목제국의 형성에 기여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유라시아 유목사회에서 최초로 문법체계를 갖춘 글자는 기원전 4세기경카자흐스탄의 이식(Issyk) 고분에서 보인다. 초기 흉노 사회의 형성에 사카문화의 확산이 관련되어 있음을 고려하면 사카문화의 문자체계가 흉노 문자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흉노는자신들이 만들어낸 독특한 탐가를 사용했음이 귀족 고분의 출토 유물과 암각화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흉노의 문자는 사카문화에서 유입된 투르크문자와 유사한 기호의 형태와 그림문자와유사한 형태로 양분된다. 이것은 언어학계에서 주장하는 투르크어계와 몽골어계로 양분된 흉노의 이중적 언어체계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흉노는 체계적인 문법에 기반한 문자 체제로 발전시키는 대신에 탐가와 같은 기호로만 주로 사용했다. 이것은 글자에 대한 무지가아니라, 그들의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히 기호체계를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탐가를 새겨 넣은 노용울 출토 칠기에서 보듯이 흉노의 상층부는 오히려 탐가체계를 계속 활용함으로써 중국문화로의 동화를 막으려 했었다. 흉노의 탐가는 두 계통으로 세분되어서 투르크어계와 몽골어계로 나뉜 그들의 언어 체계와도 유사하다. 흉노 사회의 붕괴 이후 그들의 기호 체계는동유럽의 훈족과 그들의 영향권으로 확산되었고, 투르크 카간에서 새로운 문자가 등장했다. 이와같이 중국 사서에 기록된 유목민은 글자를 몰랐다는 기록은 고고학적 자료로 볼 때 사실과 다르다. 글자는 유목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글자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맹신하기에는 고고학적 자료에서는 유목민 사이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문자 또는 문자와 유사한상징체계를 운용했음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부여 금동 가면은 부여의 왕성 소재지인 길림시 동단산 일대에서 출토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일본인들에 의해 수집되었으며, 현재 4점이 확인되고 있다. 부여 금동 가면의 형태적 특징으로는전형적인 북방계 얼굴과 상투 튼 머리를 들 수 있다. 주조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용도는 신에게제사를 지내고 길흉을 점치는데 사용되었거나 혹은 최상위층의 무덤이나 제사 관련 유구에 부장용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 금동 가면 기원은 형태적으로 고조선 혹은 예맥계 문화에서 사용되던 얼굴형을 그대로따르고 있으며, 제작기법상에서도 거푸집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지의 청동기 제작 기법을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재질적으로는 황금을 숭상하던 북방초원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수 있다. 후대로의 전승은 부여 멸망 이후 북표 라마동 고분군에서 그 흔적이 확인된다.
314년 대방군 멸망 이후의 추이를 고찰하였다. 요서 지역으로 옮겨간 대방군과 멸망한 자리에남겨진 대방군에 대한 문제이다. 대방군에 살던 주민들은 낙랑군에 뒤이어 4세기 전반 요서지방으로 옮겨갔다. 그 곳에 대방군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후 대방군은 전연 후연 북연시대까지존속하였다. 북위시대에 들어와 대방군은 폐지되고 대방현이 설치되었다. 대방현은 영주 낙량군소속(요령성 조양시 지역)이었다. 이후에는 이주해가서 남영주 영구군 소속(현 하북성 보정시지역)으로 존재하였다. 대방현은 명목상으로나 존재할 정도로 규모가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였다. 대방현은 556년 북제 시대에 이르러 행정구역 개편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고구려는 대방군을 멸망시킨 이후 즉시 직접적인 행정지배를 추진하지 않았다. 이 지역에는잔존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일부는 독자세력을 형성하면서 존재하다가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그 세력은 지역의 특수성에 바탕을 두고서 벽돌무덤이라는 묘제를 채용하였으며, 일부 세력가는대방태수와 같은 관직을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대방군은 멸망했지만, 이후 역사의 전개과정에서대방군 관련 인식이 기억되고, 계승되었다. 대방군 관련 관직과 작위 명칭이 고구려, 백제,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다. 한반도 중북부지역이라는 대방군의 위치인식은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까지 계승되었다. 한편 전라도 남원지역의 과거 역사에 대방군을 끌어다가 편입하려는 시도가 고려시대 이후에 나타났다. 물론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요서 지역으로 이주해 살다가 중원의 역사 속에 용해된 대방 낙랑군 주민은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 땅에 남겨진 대방군은 그 계승인식이 후대까지이어지다가 우리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 흡수되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첫째, 3·1운동을 설계했던 ‘설계자’ 한위건과 지역 간 정보를 전달해주었던‘전달자’ 정재용에 관한 사료를 분석하는 것이다. 계획자 한위건과 연관된 법정자료를 분석하고전달자 정재용의 활동을 역사적으로 소개하는 것과 동시에 3·1운동과 관련한 두 사람의 활동에대해 역사적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둘째, 독립선언서 낭독자가 누구인지를 논할 때 한위건과 정재용이 거론되는데, 핵심 논쟁을 분석하여 선언서 낭독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한다. 한위건은 1·2차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운동의 성공을 위해 학생들 참여를 독려하고 선언서 배포에도 관여하였으며 격문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정재용은 3·1운동의 또다른 설계자였던 박희도를 도와 지역 간 정보 및 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로 인해 두 사람 모두선언서 낭독에 대한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두 사람에게는 낭독과 관련하여많은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특정 인물에 대한 가능성은 논의할 수 있지만, 구체적 확정에는 미흡한 점이 있음을 밝혔다.
본 연구는 『한국 고대·중세 군사제도사』에 대한 비평 논문으로서 그중에서도 한국고대 군사제도를 바라보는 연구서의 시각을 검토하고 분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앞으로의 고대 군사제도에관한 연구들이 나아가야할 방향과 과제를 제언하고자 하였다. 본서는 한국고대 군사제도를 중세로 편입하는 시도를 한다.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시대구분과는 달리 삼국의 군제가 보다 발전적인모습을 가지고 있었음을 제언하였다. 또한 군제에 관한 사료 분석 방법론을 논하며 부족한 사료안에서도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 방법론과 시각을 통해 고대군사제도사의 다양한 논의점들을 분석하여 저자만의 논지를 전개해 나갔다. 본서는 거시적인시각에서 한국 군사제도의 연속성을 탐구했다는 점과 척박한 연구 환경 속에서 군사제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다만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일부 세부적인 한계점들도 확인된다. 앞으로 한국 고대 군사제도 연구자들이 함께 고민해야할 점들을 추슬러 제언해 본다.
이 글은 전쟁을 통해 5~7세기 삼국의 국경 변동 양상을 검토한 장창은 저 『삼국시대 전쟁과 국경』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나아가 저서를 통해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검토해보고자 한 것이다. 특히 5세기 이후로 전쟁을 거듭하였던 삼국 간에 그어진 ‘전선’을 곧 ‘국경’으로 치환하고자 하였던 저자의 시각과 이것에 기반하여 전개된 정밀한 논의를 따라가면서, 그와 같은 문제의식과 연구 방법이 제시하는 사학사적 의미를 짚어보고자 하였다. 끝으로 앞으로의고대 ‘국경’에 대한 연구가 이를 ‘공간’으로 바라보고 ‘변경’ 혹은 ‘접경 공간’으로 인식하여, 그공간 위에서 삶을 영위하였던 주민집단에 대한 연구로 전환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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