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기관 내 간행물

  • 간행물 내 검색 검색
  • 간행물 또는 권/호를 "-전체-" 선택하시면 통합 검색이 가능합니다

한국사학사학보

검색결과 :
8
전체선택 Endnote Refworks
본 논문은 제왕운기를 이해하기 위한 전 단계로 쓴 이승휴 관련 문헌자료에 대한 기초연구이다. 현재 한국 사학의 병폐인 문헌실증 사학과 배타적인 민족주의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승휴(1200~1300) 관련 자료에 대해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의 문집인『동안거사집』과『고려사』열전의 이승휴 전기자료를 다루었다. 그의 문집은 5권 중 4권이 시집이고 1권이 산문인 잡저로 되어있다. 지금까지 이승휴 연구자들은 이 문집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잡저 중에 있는 촌거자계문에 대한연구가 아직 없다. 촌거자계문은 그가 57세에 파면되어 고향 삼척으로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던 시기에 작성되었다. 이는 자신이 경계할 바를 기록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을 분석해보면 23개 항목으로 되어 있고, 이는 자식들에게 준 교훈의 글이다. 그래서 이를 가훈으로 규정했다. 가족을 확인하기 위해 세 아들의 나이를 추정하였다. 가훈인 이 글에서는 자식들 간의 우애, 효도, 충성, 입신양명 등을 강조하기보다는 촌락생활에서 이웃과 잘지내기, 양보, 겸손, 청정, 마음 공부를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의 가훈과는 크게 다르다고 이해했다. 마지막 제23항은 결론에 해당한다. 여기서 모든 일에 겸손하고, 참을 것(忍)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가훈은 유교적 요소보다는 불교적 요소가 많이, 그리고 강하게 언급되었다. 또한 이승휴의 자료 중 문집 자료와 원부(1220~1287)의 묘지명 간에 충주목에서 만난 시기가 어긋난다. 본고에서는 사료의 외형적, 내용적 비판을 통해서 1241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승휴가 살았던 13세기는 고려 사회에 커다란 변혁기였고, 최대의 위기였다. 고려와 원나라의 대립관계는 고려 국왕인 원종의 세차례 출국으로 평화공존관계를 수립하였고,고려의 국민은 원과 고려의 2중국가 체제하에서 살았다. ‘원간섭기’로 칭하는 이 시대의 역사를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 측면의 양면에서 보아야 역사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논했다. 이 시대 국민의 생활은 더 안정적이었다. 고려사회는 유교와 불교, 도교, 민간 신앙이 자유롭게 행해져 다원적인 사회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불교를 올바로 인식하지 않고는 고려사회의 사회, 문화, 습속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을 논했다. 이를 위해서 불교를 배척하는 분위기에서 써진『고려사』에 대한 사료비판을 거쳐야 그 역사적 실상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음을 논했다. 이승휴는 1273년 원 세조가 황태후와 태자를 책봉하는 식에 참석하여 축하하는 사신단의 한 사람으로 파견되었다. 이승휴는 사행 중에 지은 시를 그의 생전에 ‘빈왕록’으로 편집해 두었던 것이 그의 문집에 전한다. 이승휴의 뛰어난 시를 짓고,훌륭한 문장력으로 원나라 지도층을 감복시켜 고려사신단이 원 세조를 세번이나 접견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원나라 태후와 태자의 책봉을 축하하는 예식은 고려의 관례대로 하도록 하였음을 빈왕록은 전해주고 있다. 이때 이승휴는 원나라에 가있던 고려의 태자 충렬왕을 만나는 인연을 가졌다. 그 다음해 이승휴는 원종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사신으로 다시 원 나라에 가서 태자를 모시고 돌아왔다. 충렬왕 대에 그는 간관 직에 임용되어 정치적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충렬왕 주위에 포진한 측근 세력에 의해 6년 만에 파직되어 57세로 삼척에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때 그는 10년간 1000 상자의 불경을 읽어 불교에 심취했다. 이때 그가 지은 촌거자계문과 제왕운기는 사상적으로 상호 깊 은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초기에는 원나라를 정통을 인정하고 원나라의 치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고려말에 도입된 원대 성리학의 영향, 고려말 지식인들이 가지고있던 형세 중심의 화이관, 세종대 용하변이 강조 등 때문이었다. 성종대에는 남송대 주자학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호안국의 『춘추호씨전』이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남송대 주희와 호안국으로 대표되는 종족 중심의 화이관과정통론은조선성종,중종대를거치면서지식인들에게확산되었으며,이를바탕으로 선조대 김우옹의『속강목』, 정구의『역대기년』등 정통론에 입각한 중국사 서술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김우옹의『속강목』은 당시 송원사 교재로 주로 활용되던 상로의『강목속편』을 자신의 정통론에 입각하여 수정하고, 원나라의역사는정통이아님을밝혔다. 김우옹은 상로의『강목속편』이 주자의 義例와 합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 비판하고, 『속강목』을 편수하였다. 『강목속편』에서 정통으로 인정되었던 원나라를『속강목』에서는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권12에 해당하는 원나라 역사의 많은 부분이 산삭되었다. 김우옹은『속강목』에서 원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1293년(원세조 지원17년)~1368년(원순제 지정28년)까지의 기록에 대해 세년은 分注하여 작은 글씨로 기록하였으며, 국호와 묘호는 쓰되 군명 대신 이름을 적어 원이 정통이 아닌 무통임을 드러내었다. 또한 황제와 고위관직 등 원나라의 기본적인 동정 이외에 재이나 원말의 반란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여 원이 정통이 아니기때문에 치세가 불안함을 강조하였다. 다만 원나라의 황제를 ‘主’가 아닌 ‘帝’로 지칭하거나 황제의 즉위를 ‘立’이 아니라 ‘卽位’로 표현하였으며 황제의 죽음은‘崩’이 아니라 ‘?’로 표현함으로써 정통과 무통이 혼재된 표현이 등장한다. 김우옹은 1591년(선조 24) 11월부터『속강목』의 편수를 시작하여 1595년(선조 28) 3월에『속강목』을 완성하였다. 1771년(영조 47)에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의 명으로 내각에서 활자로『속강목』이 인쇄되었으며, 1808년(순조 8)에 성주의 청천서원에서 김우굉의 7대손인 김한동을 중심으로 초고의 오류를 바로잡고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속강목』에 주목한 것은 이항로를 비롯한 유중교, 김평묵 등의 화서학파였다. 유중교와 김평묵은 중심으로『화동강목』이 편찬되었다.『화동강목』은 원을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큰 뜻은 같았지만, 『속강목』이 원을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원사를 서술함에 주희의『강목』서법과 맞지 않은부분까지 엄격하게 수정함으로써 화이의 구분과 원의 무통을 강조하였다.
1589년(선조 22) 동인과 서인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여립의 역모가 고변되었다. 정여립의 역모는 기축옥사로 이어졌고 호남의 동인은 정치적으로 몰락하였다. 이후 동인에서 분립한 남인은 억울하게 희생된 동인에 대한 신원(伸?)을 추진하였다. 남인은 정여립의 역모에 대해서 재론하지 않았지만 정개청과 최영경 등의 신원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남인의 영수로 활약한 허목은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정개청에 대해 저술하고 자신이 직접 편찬한 문집 『기언』에 「세변(世變)」과 「유림(儒林)」이라는 항목에 편재하였다. 허목은 「세변」과 「유림」을 통해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희생되었던 것처럼 정개청도 사화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허목의 정개청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나주 등지의 호남의 사족에게 영향을 미쳤고, 나주의 사족이 주도하여 1690년(숙종 16)에 허목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였으며 1693년(숙종 19)에 미천서원이라고 사액되었다. 이후 나주의 미천서원은 경향(京鄕)의 남인이 결집하는 거점으로 나주 인근에 부임하는 남인 관리의 방문이 이어졌다. 또한 남인은 1706년(숙종 32)에 허목의 문집 『기언』을 간행하는 사업을 추진하여 1721년(경종 1)에 『기언』을 간행하였다. 미천서원을 방문한 남인 관리는 『기언』을 인쇄하여 소장하고자 하였는데 화순현령에 부임하였던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도 미천서원의 운영과 중수(重修)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도움을 받아 『기언』을 소장하게 되었다. 미천서원에서 『기언』을 간행하여 보급하면서 남인은 허목의 학문과 사상을 전수하였으며 정개청과 기축옥사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남인의 기축옥사에 대한 인식은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구체적으로 정리되었다.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동남소사』를 정리하면서 기축사화라고 평가하였다. 황덕길이 편찬한 『조야신필』에도 이러한 남인의 인식이 반영되어 기축사화라고 규정하였다.
숙종은 어제를 통해 정치적 이념과 사상을 공론화하려 하였고, 현실 정치의 주재자이자 교화의 주인으로 자신의 君師 이념을 표방하려 하였다. 나아가 군주의 위상이 재정립된 상태에서 공론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기 위한 장치로 어제를 활용하였다. 숙종의 어제 詩 577題 816수, 文 292편 중 회화와 관련된 제화시문은 시 82제 136수, 문 29편으로 14.9%에 이른다. 본문에서는 숙종이 제화시에서 추구한 지향점을 논의하기 위해 명에 대한 의리명분과 숙종 치세 동안 그의 제화 시문에서 관통하려 한 국정 운영의 방향을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 숙종이 명나라 황제의 서화, 중국 역대 고사화, 정충을 대표하는 충신들의 초상화, 그리고 지도와 천문도에 대해 지은 제화시가 갖는 다층적 의미를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첫째, 명 황실 서화 수집과 관제 숭배를 통한 명에 대한 의리명분의 강조, 둘째, 역사 감계화를 통한 왕도의 추구, 충신과 어진 인재상의 정립 등 국정의 주요 방향을 검토하였다. 셋째 지도 및 천문도의 제작 양상을 통한 숙종의 통치인식을 살펴봄으로써 숙종의 제화시가 갖는 다층적 의미를 좀 더 깊이 조명하려 하였다.
본 연구의 목적은 재미한인독립운동가 정한경의 당대사 인식을 그가 발간한 저서를 통해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1890년생인 정한경은 중부 네브래스카에서 석사를, 동부 아메리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쓴 석사 논문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및 일본의 침략적 외교를 규탄한 내용이었고 이는 『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한국이 일제강점기 이전 다양한 국가들과 조약을 맺고 있었으며, 일본의 침략으로 이 국가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미국에 처음으로 밝혔다는 점에 있어 의의가 있다. 또한 5천 장의 팜플렛과 1만 편의 정기간행물을 토대로 일제강점기 한국의 3·1독립운동과 일제의 식민지배 실상을 알리는 『The case of Korea』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집필하였다. 한국 내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획득한 자료와 저널에 실린 자료를 토대로 당시 일제의 폭압적인 한국 식민지배를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정한경은 박사학위 졸업식 때 이 책을 주제로 강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이 책이 보급되기에 이른다. 두 저서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단어나 표현들은 정한경이 작성한 독립청원서, 위임통치청원서,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대회 당시 발간 책자에 등장 한다. 1947년 『The Russians came to Korea』를 발간하여 미국의 한국 진주를 긍정하는 한편, 소련의 북한 진주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한국에서의 미군정의 통치가 매우 민주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던 반면, 북한에서 소련의 통치는 매우 억압적이었다고 판단했고, 남한내 공산주의와 북한 김일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그가 직접 경험한 한국근현대사의 통사(원저 『The Americans came to Korea』)를 저술하였고 이 책은 그의 사후 2000년에 발간되었다. 이 책은 민주주의 및 군사독재와 관련한 그의 비판적 시각이 담겨져 있다.
토크빌의 대작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신생국 아메리카 민주사회의 제도와 습속을 분석한 것이다. 토크빌은 아메리카에서 백인 사회 민주주의만을 본 것이 아니라 인종갈등과 노예제 등 민주주의의 그늘도 보았다. 토크빌은 노예제가 합중국의 미래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폐단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백인들이 완고하게 노예제폐지를 거부하는 한, 민주적인 자치행정이 자리잡은 남부에서는 법적으로 노예해방을 이룩하기가 불가능하다. 아메리카의 앞날을 비관적으로 바라본 토크빌은 아메리카 대륙보다는 오히려 카리브 해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해방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고 진단한다. 프랑스 식민지의 노예제 문제에서도 토크빌은 아메리카 남부의 노예제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줄곧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그는 노예해방 이후에도 식민지 산업이 유지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하며 노예소유자들에게 충분한 보상금을 지불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토크빌은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노예해방 문제를 어느새 국가의 전략과 이익이라는 차원으로 확장해서 다룬다. 그는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노예제폐지가 필요하며, 식민지의 산업과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잠정적으로 해방된 흑인들의 토지 매입을 금지하는 등 경제활동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식민지 경제의 발전과 백인 농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