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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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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4선설화 중 영랑설화에 초점을 맞추어 강원도 지역에서 전승되는 지명유래설화를 살핀 글이다. 대표적인 전승지역으로 금강산 영랑점, 고성·간성 영랑호를 들 수 있다. 영랑점은 영랑의 所遊處정로로만 전해지고 있어 그 내용이 매우 단편적이다. 이에 비해 영랑호는 조금은 풍부하며, 영랑의 여정은 금강산에서 고성 삼일호를 거쳐 간성 영랑호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변이도 영랑점에 비해 다양하다. 영랑설화를 살펴보면, 4선이 함께 등장하거나, 영랑·술랑, 영랑·安詳, 혹은 영랑만을 언급한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영랑·南石만 등장하는 기록은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인들은 4선 중 永郞과 述郞의 위상을 安詳·南石보다 높게 평가했다고 생각된다. 영랑설화의 변이는 세 가지 과정으로 나누어 살폈다. 첫째, 기존 설화에 새로운 話素를 덧붙이는 사례를 볼 수 있다. 둘째, 기존 유물이나 유적을 끌어들여 설화에 덧붙이는 사례이다. 셋째. 다른 설화와 결합되어 새로운 설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구전설화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변이과정을 거쳐 화랑 영랑을 신선 영랑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16세기 조선중기에 이르러 신선 영랑을 기정사실화하였는데, 이 시기는 四仙설화에서 신라4선이 조선의 현존인물로 대체되고 있는 시기와도 일치하고 있다.
본고는 大屋德城(1882-1950) 저술과 연구활동, 그의 불교문헌학과 『고려속장조조고』의 내용, 그리고 그 가운데 제시된 고려불교 인식이나 이해 등을 검토하였다. 大屋의 주요 연구성과는 첫째, 고려 교장에 대한 연구인 1936년 『影印高山寺本 新編諸宗敎藏總錄』, 1937년 『高麗續藏雕造攷』이다. 이 연구는 『교장총록』의 전존 최고본인 高山寺藏本을 영인하였고, 교장에 대한 첫 종합연구서이다. 교장이 동아시아 한문불교문화권에 유통된 상황을 상세히 분석하는 한편 전존 자료를 영인하여 수록하였기 때문에 서지 및 불교문헌학적 의의가 크다. 또한 의천의 사상 및 신앙에 대해 고려·송·요의 다양한 사료를 통하여 종합 정리한 점에서 고려 불교의 효시적 연구로서 그 가치가 있다. 둘째로는 해인사장 고려대 장경 보유판을 비롯한 사간판에 대한 서지 및 불교문헌학적 연구이다. 이 연구는 교장 연구의 일환이지만, 보유판과 사간판의 국내외 유일본을 찾아 소개하는 등 동아시아불교사에 기여한 바 크다. 大屋의 고려나 조선불교사에 대한 이해는 논고가 없어 분명치 않고, 고려불교와 사상에 대해서는 의천의 사상과 신앙, 의천의 선종관 및 고려 선종과 관련된 논고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연구는 동아시아 한문불교문화권의 고려교장의 중요성에 주목하여 국내외 자료를 발굴하고 영인하여 소개하는 한편 종합 정리하여 교장의 불교문헌학적 가치와 의의를 구명한 효시적 연구이다. 이를 토대로 고려시대 의천의 사상을 비롯한 고려 불교에 연구의 장과 토대를 마련한 점에서 그 의의는 크다. 한편, 『高麗續藏雕造攷』의 서문에서 보듯이 제국주의 침략에 호응한 시대와 역사인식의 한계가 있다. 특히, 그의 불교사 서술은 일부의 단편적인 사료만을 활용하였기 때문에 고려불교사 이해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 질서가 확립되던 16세기 중·후반 禮安지역에서 활동했던 梅軒琴輔의 생애와 향촌사회 활동을 살펴본 것이다. 이 시기는 재지사족 층에 의해 자신들 주도의 향촌지배질서가 확립되던 시기였다. 退溪李滉의 문인이었던 금보는 스승의 학술 활동 및 향촌사회 활동을 적극 보조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금보의 행적은 16세기 중·후반 향촌사회의 일단을 이해하는데 좋은 사례가 된다. 우선 금보의 奉化琴氏가문은 여말선초 사족 가문으로 성장하였으며,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많은 관인을 배출함으로써, 지역의 명문 閥族과 婚班을 형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봉화금씨 가문의 세거지는 관향을 비롯해 예안·安東·榮川 등지로 확대되었다. 이에 금보도 혼반이었던 眞城李氏가문의 사위가 되어 예안으로 이주하게 된다. 금보는 이황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출처관을 계승하여 관직에 뜻을 두지 않은 채, 향촌에서 처사적 삶을 지향하면서 학문 연구와 향촌사회활동에 전념하였다. 금보의 향촌사회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퇴계학맥에 대한 계승 의식과 이를 매개로 한 교유 관계이다. 금보는 스승에 대한 존모 의식을 바탕으로 陶山記考證과 靜存齋箴考證을 저술하였으며, 이황 사후에는 각종 추숭 사업을 주도하였다. 또한 유람과 교유를 통해 학문적 동질감뿐만 아니라, 향촌사회 문제에 대한 공감대도 함께 형성해 나갔다. 두 번째로는 예안 지역에서 교육·교화 시설을 확충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금보는 1572년 禮安鄕校중수에 간여하였으며, 1567년에는 易東書院건립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황 사후에는 陶山書院공사를 맡았는데, 이들 시설은 예안 지역에서 재시사족 세력을 부식하는데 구심점이 되었다. 세 번째는 향촌자치기구인 留鄕所 및 溫溪洞約활동이다. 이에 앞서 이황은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을 위해, 예안 유향소의 운영 규정인 ‘鄕立約條’를 제정하였다. 또한 동리 내질서 유지와 재지사족 간 결속력 강화를 위해 운영된 온계동약에 간여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금보 역시 예안 유향소의 향원과 온계동약의 유사로 있으면서 재지사족 중심의 지위 유지와 질서 확립을 위해 힘쓰기도 하였다.
이 글은 평양 3·1운동의 역사적 원류를 추적한 것이다. 조선시대 서북은 중앙정부로부터 ‘배제와 소외’의 지역일 뿐이었다.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었던 서북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해 경제적으로 삼남지역을 능가하고 있었다. 또 자작농이 발달했다. 양반 세력이 약했던 사회적 조건 역시 서북의 ‘양민’이 근대적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됐다. 서북인이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하는 것은 청일전쟁 후였다. 청일전쟁의 와중에서 평양 주민들에게 교회는 ‘민중의 피난처’로 부상했다. 청에 압박에서 벗어난 서북인들은 교회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어 나갔다. 1898년 독립협회의 평양지회 설립은 평양의 근대적 역량을 변모케 하는 원동력이었다. 평양지회는 전국 지회 중에서 규모도 가장 컸고 힘도 강력했다. 독립협회 평양지회가 활발해지면서 이들의 정치의식과 사회참여도 눈에 띄게 신장되어 갔다. 천도교는 평양 3·1운동의 기획과 대중화 단계에서 기독교와 더불어 한 축을 담당했다. 동학은 1896년 이후 교단의 중심지를 서북으로 이동하면서 조직 기반을 강화해 갔다. 동학은 1904년 민회운동을 벌이며 서북인들의 정서에 더욱 접근해 갔다. 1905년 12월 천도교로 개칭한 뒤 서북에는 평남에 6개의 대교구, 평북에 8개의 대교구가 설치되면서 세력이 더욱 확장됐다. 이로서 서북은 더 이상 변방이 아니라 문명화를 이끌어낼 혁명적 장소이자 정신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평양에서 설립한 대성학교는 서북의 근대 교육과 계몽운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대성학교는 설립 초기부터 서북인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1910년대 평양에서는 1913년 송죽형제회, 1914년 기성볼단, 1917년 조선국민회 등 비밀단체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 단체들은 계몽운동을 통해 양성된 주체라는 점에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1910년대 서북의 독립운동은 계몽운동을 계승하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이처럼 서북의 민족역량은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모여 대하를 이루듯이 1919년 3·1운동으로 모아져 나갔다.
젠더가 역사인식론이자 새로운 방법론으로 도입되면서 여성체육에 대하여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게 되었다. 본고는 여성사적 시선에서 여자체육의 도입과 전개를 통하여 성 역할의 변화를 살피고자 하였다. 개화기에 여학교를 통하여 여자체육이 도입되었고 교육제도로 정착되었다. 서양의 근대 문명에 압도된 지식인들은 충군애국과 부국강병의 맥락에서 장래의 어머니인 여성의 체력을 강조하였다. 일제시기에 여자체육은 체조와 경기로 구성되었고 과외활동으로 운동부 활동이 있었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거쳐 일어난 스포츠 붐 속에서 여성체육도 성장하였다. 도입기의 체육이 체조 중심으로 학교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1920년대 이후에는 경기를 중심으로 하면서 학교 밖으로 확장되었으며, 여학생 중심의 체육에서 기혼여성을 포함하는 등 사회체육으로 진전되는 모습도 나타났다. 1930년대에는 종래부터 해오던 정구, 탁구, 농구, 야구 등 구기 종목 외에 등산, 수영, 빙상 등의 종목이 인기를 얻었다. 또 조선여자체육장려회가 결성되었고 사회에 진출한 엘리트 여성들에 의하여 설립된 여성단체에서 사회체육의 형태로 여자체육이 확대되었다. 조선인들은 조선신궁경기대회 같은 종합체육대회에 참가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여자체육이 실시되면서 성 규범에도 일정한 변화가 생겨났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여자체육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민족의 2세를 위해서 여자체육을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스포츠를 통한 민족의 재현과 단합을 도모하는 민족주의는 민족 내부를 경계 짓고 여성에게 모성으로서 역할을 부여하였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취미, 유희의 일부로 개인적인 견지에서 운동을 생각하기도 했다. 또 여자경기가 활성화되고 남성의 영역에 도전하는 여성들이 생겨나자 여성에게 어느 정도의 운동을 허용할 것인가, 정상적인 아름다움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연약함보다 운동을 통해 얻은 건강미가 현대 여성의 아름다움이라고 하여 종래의 여성미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여성미를 잃지 않는 선에서의 운동을 해야 한다거나 여성미와 모성에 적합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논의가 생겨났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건립(1952)에는 여러 지역 조선인 세력의 기여가 있었다. 해방 후 연변에서는 과거 민족해방운동을 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세력화되었다. 그들은 연변 조선인들을 조직해서 현지의 국민당 지지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자치주 건립을 위한 초보적인 길을 닦았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견제를 받았고 그 다수가 북한으로 가버렸다. 해방 후 길장 지구에서도 과거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던 조선인사회주의자들이 또한 세력화되었다. 그런데 국민당 군대가 이곳을 공격 점령하게 되면서 이들은 이동해야 했다. 다수는 북한을 선택했고 일부가 연변으로 이동했다. 길장 지구 출신들은 파괴된 조선 민족 교육을 재건하는데 앞장섰고 결과적으로 튼실한 조선족자치주 건립에 공을 세웠다. 북만주에서도 해방 후 조선인들이 세력화되었는데 만주를 평정한 중국공산당은 이 북만주 조선인들을 연변으로 오게 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자치주 운영의 주요 책임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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