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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상고사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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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관방체계는 외교 및 무역로 뿐만 아니라 조세시스템 등과 연계되어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지방통치제도나 주변 정치체와의 근린관계 복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선결되어야 하는 연구주제이다. 발해의 교통관방체계는 고구려의 그것을 기초로 조직되었을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되어져 왔지만 관방유적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능하였는지 교통로의 실제 노정(路程)은 어떠하였을지에 대한 접 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존연구들이 문헌기록에 의존하여 유적기능을 해석하거나 유적분포도 작 성을 통해 교통로를 가늠해 보는 정도의 수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발해의 영토가 광대하여 연구주제별로 적정한 해상도를 가지는 분석단위를 설정하기 어렵고 유적기능이나 노정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위한 방법론의 개발이 부재했던 부분에서 야기된 것이다. 필자들은 발해의 교통관방체계에 대한 복원을 위해서는 경관고고학적인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계량지리학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는 GIS를 이용해 연해주 지역 의 관방유적에 대한 가시권 분석을 실시하였다. 분석을 통해 이 지역을 통과했던 고대 교통 로의 일부 노선과 관방유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추정해 보았으며 연해주 동 남부 지역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열수선(列燧線)과 지역 방어에 이용되었을 관방체계의 존재도 타진해 볼 수 있었다. 향후, 발굴 및 지표조사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연구결과가 검증되고 분석방법을 개선시켜 나간다면 중세 연해주 지역의 교통관방체계를 복원하는 연구에 있어 의미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동주시기 연나라 도성인 연하도의 토제예기 부장무덤에 대해서 현재까지 각 연구자들마다 각기 다른 편년안을 제시하고, 이러한 경향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상황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보다 객관적인 편년안을 도출하기 위해 연하도 생활유적에서 찾을 수 있는 무덤 출토 유물과 관련된 층위 정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연하도 토제예기 부장무덤의 상대서열을 정하고자 하였다. 또한, 주변 제후국 과의 비교를 통해 비교적 안정적인 편년안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연하도의 토제예기 부장무덤은 총 5단계로 구분할 수 있으며 유물조합과 주요 기종의 형 식 변화가 비교적 뚜렷함을 알 수 있었다. 1단계는 전국초엽, 2단계는 전국전기, 3단계는 전국중기의 이른 단계, 4단계는 전국중기의 늦은 단계, 5단계는 전국후기~진한교체기까지의 시간적 범위를 가진 다. 특히, 최근 한국학계에서 전국후기로 편년하고 있는 구녀대 M16은 4단계에 속하며 전국중기의 늦은 단계로 위치지우는 것이 안정적이다. 또한, 최근 진 통일기~진한교체기로 편년하고 있는 5단계 의 신장두 M30은 상한을 전국 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의 자료로서는 제일 적합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글은 동북아시아 초기철기문화의 변천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지역간 병행관계와 교류양상을 검토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먼저 수계와 고고문화적인 차이에 따라 제2송화강 중상류지역, 제1송화강 중류지역, 삼강평원지역, 흑룡강 중하류지역, 목단강 중하류지역, 한중러 국경지역으로 크게 구분을 하고, 시간성에 민감한 토기의 기종구성과 형식변화를 기준으로 지역 고고문화의 편년체계를 구축 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영내에서 확인되는 초기철기문화에 대해서는 종래의 연구보다 세분하였다. 동북아시아 초기철기문화의 병행관계와 연대 비정에 유용한 두형토기, 角狀把手土器, 시루 등의 토기류와 철부, 철촉, 五銖錢 등의 금속기 유물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초기철기문화는 크게 4기로 구분된다. 조기에는 우릴 문화 1기, 교남문화 1기가 확인되는데 철기가 공반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Ⅰ기에는 東康類型 1기, 團結-크로우노브카 문화 1기, 얀콥스키 문화 2기가 병행한다. 초기철기 문화 Ⅱ기 전반에는 단결-크로우노브카 문화 2기, 泡子沿文化 2-1기, 동강유형 2기, 東興文化의 병행관계가 성립되며, 초기철기문화 Ⅱ기 후반에는 폴체 문화 2기와 滾兎嶺文化가 동시기로 판단된다. 그리고 초기철기문화 Ⅲ기에는 폴체 문화 3기, 鳳林文化 1~2기, 연해 주 폴체 문화 1~2기, 河口遺存 등이 시기적으로 병행된다. 특히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의 초기철기문화 Ⅱ기에는 광역 교류망과 소지역간 교류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자의 사례로는 제2송화강 중상류지역의 포자연문화 요소가 흑룡강 중하류지역, 목단강 중하류역, 한중러 국경지역까지 영향을 준 것이며, 후자의 사례는 목단강 중하류지역과 한중러 국경지역, 삼강평원지역과 흑룡강 중하류지역 간의 물질문화의 상호작용이다.
본고는 호남지역 신석기시대 유적의 공간적 분포와 기후변화, 생태환경, 출토유물(석기구성) 등과 의 관계를 검토하여 호남지역 신석기시대 유적 동태와 전개과정을 검토한 것이다. 그 결과, 호남지역 신석기시대 조기 유적은 서남해안지역에만 한정되고, 남해안지역과 동일문화권을 형성한 점, 전기에는 남해안지역 영선동식토기문화가 파급되어 중남서해안지역까지 유적이 확대 됨을 재확인하였다. 중기 이후 호남지역으로 중서해안금강유역남부내륙남해안지역 문화가 동시 에 복합적으로 유입되는데, [남부내륙-호남내륙-중남서해안], [남해안-서남해안]으로의 두 문화파급 경로가 지배적이었다고 보았다. 한편, 중기에 호남지역 유적이 급감하는 현상은 [전기 말-중기]에 걸친 한랭화, 잡곡농경에 대한 정보인지, 남해안으로부터의 정보 단절이라는 복합적 요인에 따른 결과이며, 그 과정에서 토착 신석 기시대인들은 일부 패총으로 명맥을 유지하거나 내륙으로 진출하고, 남부내륙문화가 유입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호남지역 이탈이라는 선택을 강행하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복잡한 양상과 토착 신석 기시대인들의 선택이 한반도 여타지역과 차별화된 호남지역의 중기 모습을 낳았다고 추정하였다. 마지막으로 후말기에는 유적이 다시 증가하는데, 이는 남해안지역 및 남부내륙지역, 충 청지역으로부터 신석기시대 후기집단들이 유입된 결과로 보았다. 한편, 말기에 중남서해안 및 호남내륙지역에서 이중구연토기의 출토비율이 적고, 유적 수가 정체하거나 감소하고 있어 중기이후의 조기장을 중심으로 한 농경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서남해 안지역에서는 패총유적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데, 이 지역 조전기에 생업 근거지중간 기착지교류 거점지가 확인되었던 데 비해, 말기에는 모두 장기거주라기보다 생계를 위해 한시적으로 점유되었다고 추정하였다. 말기의 생업방식 변화는 농경 및 수렵에 대한 비중 이 더욱 약화되면서 이동성이 강한 생활로 복귀하였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호남의 신석기시대문화는 신석기시대 각 집단들이 오랜 기간 정착하여 이룩한 독특한 호남만의 문화라기보다 주변지역 문화에 연동하여 변동하는 역동적인 문화였다고 평가하였다.
현재까지의 발굴조사 자료에 따르면 遼寧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遼河 유역을 경계로 그 남북 지역과 동서 지역이 구분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夏家店下層文化에서 魏營子文化 단계를 거쳐 夏家店上層文化로 발전한 遼西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大凌河 유역과 대릉하 북쪽의 老哈河와 英金河 강을 따라서 유적이 밀집 분포해 있다. 최근 이들 遼西 지역 고고 자료 가운데 내몽고 영성현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하가점상층문화와 대 릉하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십이대영자문화를 두 개의 독립적인 문화 유형으로 보고, 山戎과 濊貊 또 는 古朝鮮으로 비정하는 문제를 두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논의에서 유념할 것은 시원적 小國에 불과한 山戎의 동쪽에 존재했다는 古朝鮮이 遼西 전역에 걸쳐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는지 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한국 고대사와 관련해 문헌 및 고고 자료를 종합해 보면 하가점상층문화가 분포하는 遼西 지역의 경우 山戎과 東胡의 문화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리고 『史記』 匈奴列傳의 5郡 설치 기사와 당시 에 설치한 燕秦 長城이 遼河 일대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멸망 이전까지 고조선의 중심을 遼西 지역에 비정하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요서지역은 기원전 2000년기 초에 하가점하층문화가 등장하면서 청동기시대로 접어든다. 하가점 상층문화가 기원전 2000년기 말부터 서랍목륜하와 노합하유역에서 발달하였고, 대소릉하유역에서 는 위영자유형에 이어 십이대영자문화가 등장한다. 십이대영자문화는 기원전 9~8세기에 등장해서 주변지역과 활발한 교류관계를 가지며 발달하는데, 전국 연문화가 기원전 300년경에 등장하면서 급 격하게 쇠퇴한다. 고고학적으로 십이대영자문화의 종족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문화적 연속성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십이대영자문화의 연속성은 요동과 길림성 중남부 및 한반도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세형동검문화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고대 우리 민족의 형성과 발전과 정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측 사료에는 중국 동북방에 있던 다양한 종족집단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하가점상층문화는 북방계 청동기문화라는 점에서 山戎이나 東胡로 판단되며, 십이대영자문화는 濊貊으로 추정된다. 先秦文獻을 보면, 서주 초기에는 맥과 예가 모두 확인되다가 서주 중후기부터 동주대까지는 맥만 확인되고, 전국 말~진한대에는 예가 다시 등장한다. 이러한 상황을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의 전개과정과 비교해보면, 십이대영자문화 의 종족은 예맥 중에서도 맥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십이대영자문화가 붕괴함에 따라 맥계 유이민들이 예의 지역인 요동과 길림성 중남부로 대거 유입하게 되면서 이 지역에서 예와 맥이 혼거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史記] 이후의 사료들에 예맥예맥이 혼재 하는 것은 요동지역에서 예와 맥이 융합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중국의 이른바 ‘東北’은 역사적으로 볼 때 줄곧 ‘중원’과 다른 독자적 문화가 발전한 지역이었다. 특히, 신석기시대 후기에 遼西 일대를 중심으로 번영한 紅山文化는 대형 積石塚과 독특한 형태의 토기, 옥기 등으로 말미암아 세간에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홍산문화는 기원전 4000년기를 전후하여 약 1500년의 시간에 걸쳐 요서 지역의 대릉하와 시라무렌하 일원을 중심으로 번영했다. 홍산문화는 후 기 신석기문화의 한 유형으로, 농업과 수렵 등의 혼합경제를 바탕으로 세련된 옥기를 제작하고 특징 적인 적석총을 건설하였다. 이 문화에서는 원시신앙을 배경으로 한 복합사회가 출현했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사유와 기술적 성취는 지역적 문화전통으로 수렴되고, 이렇게 형성된 문화 전통은 요서 지역뿐만 아니라 더 넓은 지역에도 다소간의 영향을 주었다. 홍산문화에 대한 이해는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 선사 고고학 연구에서 흥미로우면서도 유용한 작업이 될 것이다. 1980년대 이래 중국에서는 이 홍산문화가 ‘文明’의 출현을 알리는 여러 가지 지표를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중국의 ‘문명’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적잖이 등장하였 다. 이런 견해는 中華民族多元一體論의 기치 하에 지금의 변경지역까지 ‘中華’의 틀 속에 포 섭하고자 하는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반만년의 유구한 문명을 강조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려는 민족주의적 정서와 맞물리면서 중국에서 널리 수용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일 부 지식인들은 홍산문화의 의례용 옥기의 장식에 곰[熊]이 소재로 사용되었다든지, 아니면 고조선의 墓制가 홍산문화의 적석총을 계승하였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홍산문화를 한국의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홍산문화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홍산문 화에 대한 이해보다 오히려 그 문화의 계승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다분히 비학술적인 논의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홍산문화를 통해 입증하고자 하는 ‘문명’의 출현은 그 근거가 박약하다. 홍산문화의 사회는 아직 국가를 만들어 낼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황제 역시 근대에 들어서야 중화민족의 국조로 추앙받게 된 신화속의 인물로서, 그에게 특정한 시공간과 문화적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허구이다. 홍산문화가 우리 것인지 아니면 중국 것인지에 대한 논쟁 역시 본디부터 근 대 국민국가 성립 이후의 관점을 선사시대까지 무제한 확장한 소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다. 그보다는 홍산문화에 대해 자세하고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선사시대 동북 아 지역의 인류문화 발전 양상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유용하다. 홍산문화에 현실 적 요구를 담아 사실을 자의적이며 배타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자칫하면 역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신념으로 변질되어 현실사회의 각종 모순을 희석하기 위한 도구로 악용될 우려도 있다.
이 글에서는 중국 학계의 기본적인 연구방법론인 구계유형론이 근대 고고학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문화사 고고학과 이론과 방법론적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며 문제점과 한계 또한 공유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이러한 문화사 고고학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적 고고학 역시 고고학적 유형과 문화를 뚜렷한 경계를 가진 특정 종족 혹은 민족과 직접적으로 관련짓거나 그 종족 또는 민족의 영역으로 해석하는 등 많은 문제가 있음을 논의하였다. 특히 이러한 방식의 연구가 연구의 시작 단계에서는 필요할 수 있지만 최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정치적으로 오남용되었을 때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낡은 사다리를 걷어차고 보다 열린 자세로 다양한 연구과제와 이론 및 방법론을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김범철은 한국상고사학보 95호에 게재한 「貯藏, 剩餘, 指導權: 湖西地域 靑銅器時代 集團貯藏施設의 考古學的 理解」(김범철 2017)라는 글에서 필자가 이 주제와 관련하여 발표하여 왔던 글들에 대해 강도높은 비판을 하였다. 그 글의 의도와 성격상 학문적으로 논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학계의 심각한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긴급히 이 글을 작성한다. 주어진 지면이 제한되어 있어 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다룰 수는 없으므로, 초점이 되는 몇몇 사안만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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