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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상고사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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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에서 공백과 단절의 문제는 단순히 편년만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 고고학 방법론과도 연결된 거대 담론이므로 한국고고학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할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필자는 각 지역에서 논의되고 있는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공백문제를 검토해 보았다. 특히 호남지역에서의 논란은 공백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고학 편년을 수정하여야 한다는 입장과 기존의 편년관으로 연속적인 문화양상을 설명하려는 입장 사이에서 생긴 것이다. 고고학에서 공백인 이유로는 우선 고고학 자료의 부재와 유적의 미조사로 볼 수 있다. 즉 사람들이 살지 않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와 유적이 파괴되거나 미조사로 인하여 고고학 자료가 없는 경우가 있다. 다른 이유로는 고고학 연구자의 인식 틀인 연구방법 론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즉 형식분류를 바탕으로 하는 편년법과 고고학 자료를 해석하는 과정에 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공백과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고학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방치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축인 편년과 공간축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합리적인 문화해석이 시도되어야 한다. 고고학 연구자들은 과거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충분한 고고학 자료를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제공받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 연구자들은 과거 문화의 편년적 양상뿐 아니라 문화 변천을 비롯한 다양한 측면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고고학의 시대구분에서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의 사이를 메우는 것은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 시대이다. 고고학계의 지지도가 높은 이 시대명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자들은 김원용이 『한국고고학개설』을 저술하면서 창안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연구사를 따져보면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 라는 시대구분명은 일제강점기에 구사된 ‘금석병용기’에서 분화된 용어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고고학에서는 죠몬시대를 잇는 야요이시대를 ‘금석병용기’라고도 했는데 이 시대 명을 한반도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다. 아직 청동기시대를 인지하지 못했던 당시의 연구자들은 이 금석 병용기를 전후기로 나누어 전기는 ‘한반도가 중국문화의 영향을 조금 받던 시기’라 설명하였고 후기는 ‘중국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는 시기’라고 하였다. 야만의 신석기시대가 중국 문화의 전래로 인해 비로소 문명화의 길을 걷는다는 이해이다. 전기는 만주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주조철기 등이 부분적으로 출현하는 시기이고 후자는 낙랑군의 설치로 완전한 식민 지배가 이루어지는 시대라고 하였다. 해방 후 김원용은 그 전기를 초기철기시대라 하였고 후기를 김해기로 고쳤다가 원삼국시대로 바꾸었다. 지금까지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시대구분명을 둘러싼 논쟁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해방 이후의 연구사만을 취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 대안도 모색될 수 없었다. 일찍이 김원용은 해방 후 우리 스스로 확보한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개설서를 쓰는 한계를 토로한 바 있다. 그리고 이후 자료가 늘어나면 그 내용을 합리적으로 수정하라고 후학들에게 요구하였다. 이제 초기철기시대와 관련하여 방대한 신자료가 확보되어 청동기시대와의 구분도 애매해진 실정이다. 더 이상 일본 관학자들이 일본열도의 문화변동을 설명하는 과정에 붙여서 고안한 초기철기시대와 그 연대에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해방 후 북한학계의 주도로 금석병용기에서 분리시킨 청동기시대를 포함하여 중국 정사 (正史)에도 기록된 ‘고조선’을 한국고고학의 시대구분명으로 어떻게 산입할 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이 글은 중국과의 교류 범위를 한반도 북부와 내륙으로 한정시키는 현재의 접근법이 환황해권의 사회상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는 문제의식 하에, 동아시아 해상실크로드와 광역교류망의 출현이 한반도 남부 정치체 형성과 발전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해상실크로드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당시 동아시아 사회의 대표 교역품이었던 구슬을 검토하여 한반도 서남부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해상교역의 성격을 파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해상교역의 출현이 서해안 일대 정치체들의 출현과 성장에는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해상 교역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지역사회의 변화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검토 결과, 한반도 서남부지역 해상교역망은 동아시아 해상실크로드의 연장선에 있고 원삼국시대 들어 새로이 발생하는 동-서 지역성은 환황해권 교역망의 운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교역항의 운영은 배후지의 출현, 내륙 재분배중심지 또는 도시교환중심지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사회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물류의 유통과 교역권을 통제하는 정치체의 출현을 야기하였다. 그 리고 재지사회는 동-서 지리·환경적 차이에서 오는 불균형한 사회기반에 상응하여, 내적 여건을 고려한 경제시스템을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지역 간 상호의존도가 높아지는 효과를 가져와 정치체들 간 협력·경쟁을 통해 공존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를 가능케 한 주 요인은 교류네트워크의 강화이다.
정창원 남창에 소장된 가위는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사례와 크기, 형태, 기능면에서 거의 동일하며 신라제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후 중국에서 이와 유사한 가위가 발견되어도 여전히 신라제품이라고 강하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본문은 필자가 제기한 세 가지 질문, 즉 정창원 가위의 제작지, 전래과정, 상징성에 대한 답을 추적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정창원 가위의 제작지에 대해서는 가위 자체의 기능과 정창원 가위만의 특수한 기능이라는 두 가지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을 진행하였다. 우선 가위 자체의 기능은 기존의 연구방법과는 달리 가위 전체로 연구대상을 넓혔으며, 『일본서기』 등 문헌기록들도 비교자료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 8세기대 까지 일본의 가위는 백제에서 정식으로 파견된 재봉사가 들고 간 가위와 한반도 도래인의 가위 등 한반도 가위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정창원 가위만의 기능, 다시 말해 초 심지를 자른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결과, 7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양봉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밀납초 생산이 불가능하였으며 더나아가 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도 일본은 여전히 신라로부터 촛대, 밀납 등 밀납초와 등잔을 구매한 사실을 주목하였다. 결국, 8세기대 신라로부터 밀납초, 촛대를 구매한 일본은 이들과 세트를 이룬 심지 제거용 가위 역시 신라로부터 수입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정창원 가위는 신라제품인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다음으로는 신라 가위가 언제, 어떤 경로로 동대사로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래과정을 고찰하였다. 필자는 752년 전무 후무한 대규모 신라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한 이유 중 하나로 제기된 동대사 노사나대불의 개안식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기존 학설과는 달리 신라사절단은 대불개안식 당일이 아닌 두 달이 지난 후 동대사를 방문하였던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신라사절단이 개안식에 참석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방문한 이유를 추적하는데 주력하였다. 추적 결과 752년 신라사절단이 방문한 동대사는 완공된 사찰이 아니라 각종 건물들의 공사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필자는 건물공사가 절정에 이른 동 대사는 각종 자재, 용품들을 대량으로 필요로 하였을 것이며, 신라는 물품을 공급하기 위해 신라물건을 가지고 갔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정창원의 가위 역시 당시 조동대사사가 구매 한 신라물품 속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마지막 장에서는 가위가 정창원 남창에 보관된 이유와 상징하는 의미를 추적하였다. 필자는 기존 학계에서 남창에 보관된 물품들은 북창의 성무천황의 유품과는 의미가 달리 성무천황과 관련이 없다는 견해에 강한 의문을 던지면서 이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고대 동아시아에서 가위는 여성, 더나아가 음양사상의 陰사상을 내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음양사상은 북창에 소장된 성무천황의 유품에서도 강하게 확인되었으며 더나아가 음양사상은 도교사상과 결부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도교사상은 고대 동아시아 무덤에서 사후세계관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필자는 이러한 개념과 발맞추어 정창원 가위는 촛불과 세트를 이루는 물건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문헌기록과 실제 무덤 속에서 촛불과 등잔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애도하는 제의와 장송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필자는 성무천황의 각종 장례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촛불과 가위는 성무천황과 관련성이 강하며, 장례의식이 종료된 이후에는 정창원에 보관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이국적 물건, 특히 권력을 장식하고 증강시킬 수 있는 물건일수록 그 물건을 갖고 싶은 욕망은 커지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신석기시대부터 먼 곳까지 물자가 이동했다. 그러나 교역이 있었다는 것과 교역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교역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 이상으로 교역을 방해하는 요소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고대 사회에서의 원거리 교역, 특히 국경을 넘는 교역은 이동 중의 안전 및 교통수단 그리고 숙식 등 상당한 각종 비용이 필요했다. 3세기 이전 동아시아 대외 교역에서 이러한 비용을 초과하는 막대한 이익을 찾기 힘들다. 결국 그 비용을 상쇄할 만한 별도의 정치적 목적이 개입되어야 항상적인 교역이 가능했다. 즉 중국 황제의 천하 질서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막대한 경비를 부담해 가며 주변의 소국들의 조공을 재촉하였고, 이 과정에 참여한 상인들이 변경의 胡市 등지에서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른바 使行 교역 시스템이 갖추어 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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