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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상고사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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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사회복합화의 진전은 정치경제의 기반이 되는 잉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수장층의 정치권력 확대전략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잉여의 수집과 관리가 취락 간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취락네트워크의 구조적 특징이 사회복합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인과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영산강중류역과 여수 반도 지석묘사회를 대상으로 사회 네트워크 분석(SNA, Social Network Analysis)을 실시하였다. 두 지석묘사회의 취락체계는 계층적 구조를 형성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경우, 최상위 중심취락은 취락 간 네트워크 조직 내에서 자원과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하위취락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공간상의 차별적 지위는 취락 간 계층관계 형성과 사회복합도 진전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가설을 전제로 네트워크 중심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영산강중류역 지석묘사회의 최상위 중심취락은 네트워크상에서 자원·정보 확보에 유리한 근접중심성과 변화에 따른 효과를 크게 거둘 수 있는 위세중심성, 중개자 역할을 보여 주는 매개중심성이 높은 구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것은 최상위중심지가 지역네트워크상에서 잉여나 정보의 흐름을 효과 적으로 통제하고,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근거로, 영산강중류역에서는 네트워크 조직 내의 공간적 우위성이 계층적 취락구조의 형성과 사회복합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여수반도에서는 네트워크 중심성이 낮은 구역에 최상위 중심취락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각 중심취락을 핵으로 하는 국지적 단위들이 연계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단위지역의 지석묘사회가 각기 다른 네트워크 구조를 이루고 있었고, 이에 따른 사회복합화 양상도 달랐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농업잉여를 기반으로 하는 영산 강중류역 수장사회는 네트워크상의 공간적 우위가 취락 간 계층관계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집단지향적 성향의 사회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교역시 스템이 운용되었던 여수반도 지석묘사회는 국지적 단위가 독립적으로 연계된 네트워크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개인지향적 성향의 사회로 상정된다.
한국의 세형동검문화는 발전Ⅰ기말·발전Ⅱ기초에 일본열도로 파급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일본열도의 야요이문화는 전기에서 중기로 전환된다. 청동유물의 조합과 형식학적 특징으로 보아 일본열도세형동검문화의 원류지는 한반도 중서부·서남부지역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세형동검문화가 일본열도로 파급되는 경로를 파악하기 위하여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의 고고학적 연구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학적 연구를 토대로 전근대시대의 한일 교류관계를 살펴보았다. 전근대시대의 한일 교류관계는 세 번의 교류 활성기와 두 번의 소강기가 있다. 제1교류기는 신석기시대 조·전기로 한반도 남동해안-쓰시마섬 서안-이키섬-서북 규슈로 이어지는 경로를 통해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청동기시대 전기까지는 교류가 소원해졌다. 제2교류기는 청동기시대 중기에 시작되는데, 경상도 남해안에서 서북 규슈로 지석묘 등이 파급되면서 야요이시대가 개시되는 것과 관련된다. 초기철기시대에는 한반도에서는 전라도까지, 일본열도에서는 북부 규슈까지 교류가 확산되며, 삼국시대에는 국가 간의 관계로 확대된다.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고려시대 전기까지 약 300년 동안은 교류가 다시 침체된다. 제3교류기는 고려시대 중기인 13세기 초부터 조선시대까지인데, 왜구의 침구로 시작된다. 왜구의 침구는 한반도 남동해안을 시작으로, 점차 전라도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어서 제2교류기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이 당시의 남해항로는 고려시대 조운로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출전 및 회군로에서 보듯이 연안항로를 주로 이용하였다. 세형동검문화 유적·유물의 분포양상과 전근대시대 한일 교류관계에 대한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세형동검문화의 일본열도 파급경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세형동검문화는 한반도서남부에서 남해의 연안항로를 따라 낙동강 서안에 이르고, 여기에서 쓰시마섬 서안과 이키섬을 거쳐 북부 규슈로 파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고는 옥황묘문화의 편년을 검토하여 새로운 편년안을 제시하고, 그 편년안을 기준으로 옥황묘문화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옥황묘문화의 족속은 산융족과 백적 등으로 견해가 나뉜다. 산융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는 대부분산융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산융문화(본고의 옥황묘문화)가 西周中期 혹은 春秋前期에 개시하였다고 주장하고, 산융설을 반대하는 연구자는 대부분 고고자료를 근거로 春秋中期부터 옥황묘문화가 개시하였다고 주장한다. 족속 문제를 배제하고, 고고자료만으로 분석한 결과, 옥황묘문화는 동남구유형 및 낙타량유형과 분리되고, 상한 연대는 春秋中期이다. 또한, 유물의 상대연대와 조합관계 를 고려할 때, 총 5단계로 구분이 가능하다. 각 단계의 연대는 제1단계가 春秋中期, 제2단계는 春秋後期前半, 제3단계는 春秋後期中半, 제4단계는 春秋後期後半, 제5단계는 戰國前期에 해당한다. 옥황묘문화는 몇몇의 하위유형으로 구성된다. 제1단계부터 제3단계까지는 다양한 문화요소가 공존하는 전기옥황묘 사슴유형(前期玉皇廟 鹿類型)이 옥황묘문화의 중심이며, 제3단계에 등장하여 제4단계에 옥황묘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는 후기옥황묘 말유형(後期玉皇廟 馬類型)도 있다. 후기옥황묘 말유형은 재지적이며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다. 전기옥황묘사슴유형이 옥황묘문화 전기에 유행한 유형이라면, 후기옥황묘 말유형은 옥황묘문화 후기에 유행한 유형이므로, 옥황묘문화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에서 재지적이며 독립적인 사회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계기는 전기옥황묘 사슴유형에 속하는 집단이 옥 황묘문화를 이탈하였기 때문이다. Tandroy족을 통해서 옥황묘문화의 사회를 추론한 결과, 그 사회는 피장자를 위하여 동물을 죽이며, 소규모 사회집단 혹은 혈연집단을 중심으로 무덤이 군집되고, 동시에 무덤이 연속적으로 배열된다. 이를 통해 옥황묘문화 내 소규모 지배 집단들과 그들의 혈연관계에 속하는 사람들의 지위와 장송의례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옥황묘묘지를 중심으로 조성 되던 옥황묘문화의 무덤들은 하위 지파의 성장에 의해 새로운 묘지가 조성되고, 필자는 이를 근거로 옥황묘문화의 하위유형 내에서도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소집단, 즉 계파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다.
왕궁과 대형분이 보여주는 도성의 경관이라는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고구려 왕도였던 안학궁과 대성산성 일대의 고분을 검토하였다. 지리 조건에 따라 안학궁,대성산성 일대 고분군은 대성산 고분구역과 광대산 고분구역으로 나뉘며, 대성산 고분구역은 안학궁을 기준으로 서편과 동편 고분군으로 세분되어서 고분군별로 고분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검안치 등을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고분은 동분이혈합장 무덤도 있지만, 대다수는 동분동혈합장 무덤이며 석실 평면은 방형 현실과 중앙연도, 장방형 현실과 우편재연도 순으로, 천장은 평행삼각고임이 선호되었다. 그리고 뉘어쌓기와 회미장, 목관 안치 등 축조와 마감처리, 그리고 주검안치와 매장방식에서의 정형성이 확인되었다. 이를 기초로 대형분의 특징과 시공적 추이를 살폈다. 안학궁,대성산성 일대에 대형분이 등장하는 4세기 중엽부터 대형분의 조영이 끝난 6세기 전반까지 기간 중의 대형분은 서평양보다 통구분지의 대형분과 평면구조와 축조방식 등의 특징을 공유한다. 대형분의 시공적 추이는 벽화와 출토 유물, 석실 구조의 변화와 분구와 석실의 규모를 기준으로 한 위계별 추이를 살핀 결과, 대형분은 4세기 중엽 이후 안학궁 서편의 고산동 일대에서 먼저 등장하여 5세기대까지 고산동일대가 대형분의 중심지가 되나 5세기 말을 지나면서 대형분의 중심은 안학동, 로산동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6세기에 들어서면서 광대산 고분구역이 대형분의 중심지로서 토포리, 호남리 고분군이 최상위 고분군이 되었다. 6세기를 경과하면서 광대산 고분구역이 대성산 고분구역을 대체하여 대형분의 중심지가되고, 대형분 간의 안정적 위계분화를 보이는 것을 광대산 고분구역이 평양 이도 후 국내세력의 이주에 따라 새로 형성된 묘역의 결과로 해석하였다. 평양으로 이주한 국내 세력이 압록강과 평지, 우산이 그리는 국내도성 경관과 유사한 지형조건을 가진 광대산 일대를 묘역으로 선정함으로써 안학궁·대성산성 시기의 도성 경관은 국내성과 대형분이 그리는 국내도성의 경관과 유사하였을 것이다.
말갈은 한국 고대사에 있어 중요한 존재인 만큼, 그동안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異見이 많다. 지난 수십 년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견해들이 나온 이유로는 말갈 관련 기록의 소략, 문헌사학과 고고학간의 괴리, 관련 기록이 여러 문헌에서 산발적으로 파악되는 양상 등을 꼽을 수 있다. ‘가야’를 비롯해 소위 ‘영산강세력’ 등 『三國史記』에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여타 정치체와 마찬가지로 말갈 역시 자체 기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三國과 관련하여 문헌에 등장하는 빈도수는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말갈의 존재를 증명해줄만한 뚜렷한 고고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기록의 부재를 고고자료가 충분히 메워주고 있는 가야·영산강세력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 말갈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에 혼선을 주는 요인으로는 여러 문헌에 말갈의 단편적인 흔적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말갈 관련 문헌기사를 통해 말갈의 특징을 짚어낸 뒤 이를 지역별로 구분하였다. 다음으로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南進 결과 ‘당연히’ 고구려의 영토로 인식되어 온 ‘강원도’ 지역의 말갈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황해·경기도 지역의 말갈이 백제 건국 초부터 相爭을 거듭했던 것과 달리 강원도 지역의 말갈은 처음부터 고구려에 귀속되어 고구려 멸망기까지 행동을 같이 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에 강원도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고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기존의 말갈 인식을 재검토하고 ‘강원도 말갈’의 정체성 및 고구려와의 遭遇 이후 말갈 사회의 변화 등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월성 해자 출토 씨·열매류, 화분분석을 통해 AD 5~6세기대 월성과 그 주변지역의 식생경관을 복원하고, 고대인들은 식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해자와 북측 주변지역의 식생경관을 구성하는 식물군의 생육장소를 논의할 수 있었고, 구체적인 추정 복원도로 표현하였다. 해자에 자랐던 가시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수생식물군락, 호안 목제 구조물, 그리고 목제 구조물 바깥쪽의 해자 수역에 맞닿은곳은 습생식물대로 이루어진 공간이 존재했을 것이다. 보다 북측으로는 인간활동의 영향으로 형성된 터주식물군 중심의 초지가 펼쳐지고, 그 배후에는 월성 북쪽을 흐르는 발천 주변으로 느티나무·느릅나무류가 주된 하안림(河岸林)이 분포하는 공간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신라왕경의 광역 식생경관의 변화양상과 고대인의 식물이용상에 대해 논의하고, 이것에 관련된 구체적인 복원그림 작성을 위해 앞으로 밝혀야 할 중요한 과제들을 추출해 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생육장소를 구체화시킨 식생경관 복원도 작성의 시도는 향후 월성을 포함한 신라왕경경관을 밝히기 위한 토대가 될 것이다
도기장군은 그동안 시대별로 도기를 집성·연구하는 과정에 포함되거나 중·근세 자료에 한정되어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다보니 장군의 원형인 고대 도기장군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남한지역 출토 고대 도기장군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시기나 국가·지역별 차이를 파악하기 위한 형식분류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고대 도기장군의 변천은 3단계로 구분되었다. Ⅰ단계는 도입기로, 4세기 중후엽부터 5세기 중엽까지로 편년된다. 제작 과정이 복잡한 A형(양측면 둥근형)의 도기장군이 가장 먼저 확인된다. 그 다음 양측면이 대칭을 이루는 A형 도기장군의 특징을 따르되, 제작 과정을 단순화시킨 B형(양측면 편평형)의 도기장군이 등장한다. Ⅱ단계는 성행기로, 5세기 후엽부터 8세기 전엽까지로 편년된다. A형과 B형이 이어지면서 양측면이 대칭을 이루는 특징을 따르지 않고 제작 과정을 단순화시킨 C형(한측면 편평형)의 도기장군이 제작·사용되어 다양한 형태의 도기장군이 공존하게 된다. Ⅲ단계는 쇠퇴기로, 8세기 중엽부터 조선시대 이전까지로 편년된다. 더 이상 A형의 도기장군이 나타나지 않으며 C형의 도기장군만 제작·사용된다. 그리고 국가별로 도기장군의 형태가 구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 권역에서는 주로 견부와 저부가 원저단경호의 저부와 같이 둥글고동최대경에 비해 경경(脛徑)이 좁은 형태의 도기장군이, 신라·가야 권역에서는 견부와 저부가 원통형을 눕힌 것 같이 직선을 그리고 동최대경에 비해 경경이 넓은 형태의 도기장군이 제작·사용되었다. 한편, 백제에서는 장군의 기원으로 볼 수 있는 견형호(茧形壶)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특별한 액체를 저장·운반하는 목적으로 도기장군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신라에서는부장하는 음식을 담는 용기, 즉 제기로 사용된 듯하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는 고신라의 도기장군과 다르게 일상생활에서 액체를 저장·운반하는 목적으로 도기장군이 사용되었으 며, 크기가 다양해지면서 특별한 액체가 아닌 소변과 장과 같은 다른 액체도 담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소는 인간 사회 발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가축 중 하나로서 농업을 기반으로 한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이 때문에 소가 가축화 된 시기와 그 확산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일은 전통 사회 형성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현재까지 동물고고학 및 유전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소는 약 1만여년 전 세계 각지에 널리 분포했던 야생 소 중 일부가 근동지방 및 인도에서 각각 가축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두 지역 소는 각각 (혹 없는) 소(Bos taurus ) 및 인도혹소(Bos indicus ) 인데, 이 중 우리가 볼 수 있는 혹 없는 소는 모두 근동지방 사육 소의 후손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근동지방 외 다양한 지역에서 야생 소 사육이 별도로 시도되었거나 야생 소의 유전자가 사육 소에 소수이지만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도 있다. 본고에서는 근래 동아시아 지역에서 새로이 발견된 야생 소 유전형에 대한 보고와 사례를 살펴보고 이에 따라 향후 우리나라 옛 소 뼈 개체에 대한 연구 검토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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