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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강 하류의 사카치알리안, 우수리강의 세레미체보 유적 등에서 확인되는 동심원문 암각화와 이를 기반으로 그려진 얼굴모양암각화는 눈강 유역 백성 쌍탑 1기와 비교하면 9,000년 전께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 연해주와 강원도는 토기와 토우 등으로 보아 6,500~5,800년 전에는 하나의 생업권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남의 동심원문암각화도 두만강의 지초리유적을 거쳐서 환동해문화권의 간접적인 교류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영남의 동심원문 암각화 제작시점은 대부분 내륙에 취락유적이 생기는 시점으로 5,000년 전 이후의 가능성이 크다. 그간 환동해문화권의 범위는 연해주와 강원도를 중심으로 6,000~5,800년 전께 연해주와 강원도 양양 오산리 부근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6,500~6,000년 전 오산리 유적에서 아무르강 하류의 말리세보문화의 토기와 동물형토우가 출토되는 점은 이미 밝힌 바 있다. 또한 9000년 께 제작된 아무르강 하류와 우수리강의 동심원문암각화 및 얼굴모양암각화가 두만강 유역 및 5000년 전 이후로 영남에서도 간접적인 영향으로 보이기 때문에 9,000~6,000년께 아무르강 하류도 환동해문화권의 북부지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아무르강 중류 및 눈강 유역은 아무르강 하류와 교류한 지역으로 간접영향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후 청동기시대 3,100~2,900년 전께 연해주와 강원도의 활로가 다시 열리는데 시니가이문화가 강원도 영서지역 및 소백산맥 동쪽에 위치한 진주 남강 유역까지 확인된다. 그러나 진주 남강 유역을 환동해문화권으로 영입하기에는 좀 더 확정적인 증거가 있어야 할것이며, 현 상황에서는 환동해문화권의 간접교류지역으로만 볼 수 있다. 따라서 환동해문화권은 동북아시아에서 고립된 곳이 아니라 지역과 시간에 따라서 아무르강 중류, 눈강 유역 및 한반도의 영남지역까지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해주의 신석기문화는 동해안 오산리 부근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그 이남은 남부 고유의 신석기문화가 있는 가운데 교류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해주 신석기시대 사람으로 인해서 한국 신석기시대 고아시아족이 성립되었다는 관점은 성립될 수 없다. 신석기시대 환동해문화권의 성립배경은 대산맥과 바다를 매개로 한 생업권으로 생각할 수 있고, 동심원문암각화가 소백산맥의 동쪽 지역 영남에서 확인된 것은 환동해문화권의 사람과 어떤 교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 남부지역에 등장하는 최초의 철기생산은 기원전 2세기 대 동남부지역 주거지 내부에서 진행된 저온의 단야 공정이며 이후 늑도유적의 사례처럼 저온에서 고온조업을 아우르는 철기생산기술이 도입된다. 동시에 시기별 생산유구의 집중도도 달라진다는 점은 생산전문집단의 등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낙랑군의 설치와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한반도 서북부지역 이주민의 유입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세기 대 울산 달천유적에서 철광석의 채광이 이루어지는 점은 안정적인 철기생산 소재를 공급받기 위한 독자적인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더불어 철광석 채광을 시작하는 시기부터 제련 공정이 시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달천 광산의 개발 이전 철기생산소재의 유통은 요동지역 재지적 철기의 등장과 관련된다. 요동지역의 일부 유적에서 보이는 파편의 재가공 흔적과 시중 노남리유적의 괴련철을 생산한 제련로 존재는 안정적인 소재 공급처의 확보로 연결되며, 한반도 동남부지역 철기생산의 등장과 발전 배경이 된다. 이처럼 한반도 동남부지역 철기생산은 요동지역 재지적 철기생산기술과 소재의 유통을 배경으로 초보적인 생산이 시작되었고 이후 선진 기술의 도입과 함께 독자적인 제련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아직 직접적인 근거가 되는 유적이 적어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하며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등장을 기대한다.
본고에서는 제주지역에서 확인되는 서력기원전후∼5세기의 마한 관련 유물을 정리하고, 그 양상을 단계적으로 살펴보면서 마한소국과 고대 제주의 대외교류 양상을 파악해 보았다. 먼저 서력기원전후∼2세기초의 마한 관련 유물은 산지항유적 등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철경동촉, 중국 화폐, 동경 등 낙랑계 유물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의 낙랑계 유물은 서해안, 남해안의 도서와 해안을 따라 여러 주거지, 수혈유구, 패총 등에서 분포하므로 유적들의 지리적인 위치에서 낙랑에서 왜로 이어지는 교역 루트와 관련될 가능성이 크다. 제주지역 유물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만 제주지역이 연안에서 벗어나 있는 도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제주지역 사람들이 교역을 위해 가까운 연안지역으 로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 대상지는 가까이에 있는 큰 무역항인 해남 군곡리유적, 사천 늑도유적 등이며, 이 지역에서도 제주산 태토로 만든 토기들이 보인다. 따라서 제주지역의 낙랑계 유 물은 진·변한과의 교류로만 한정하기보다 가까운 마한지역의 해안이나 도서 지역에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 2세기 중·후엽의 마한 관련 유물은 용담동분묘로 대표된다. 용담동분묘에서 일괄로 출토된 궐수문장식의 철제장검, 이조돌대주조철부, 철모, 철촉, 판상철부형 철기 등은 시기나 출토량으로 보아 진·변한보다 경기서부지역의 마한소국과 관련될 가능성이 크다. 교류의 주체는 용담동분묘로 대표되는 세력이었을 것이다. 1∼2세기 제주지역이 호남이나 경기 지역의 마한소국과 교역한 상황은 『三國志』나 『後漢書』에 기록된 배를 타고 韓과 교역했다고 하는 州胡에 대한 기록에 반영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3∼5세기대의 마한 관련 유물은 종달리패총 등에서 보이는 호남서부지역과 관련되는 토기들이다. 이 시기의 어느 때부터 제주지역은 탐라로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남 마한소국과 耽羅의 교류는 초기에 마한 사람들이 들어온 흔적도 확인되지만 점차 제주지역 사람들이 주류가 되면서 5세기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 마한소국과 탐라의 교류는 정치적인 교섭보다는 앞 시기처럼 교역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명을 위한 燈器가 출현한 시점에 대해서는 현재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선사시대 주거지의 爐址가 취사와 난방의 기능과 함께 조명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국내에 전문적인 燈器의 출현은 낙랑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생각보다 많은 양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三國時代에 들어서면 燈器 종류가 늘어나는데, 크게 燈盞, 燈臺, 燭과 燭臺로 분류할 수 있다. 多燈式 燈盞은 中國 漢과 낙랑의 영향으로 출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상부에 4개에서 7개까지 많은 수의 盞이 부착된 특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내부에 효율적인 기름의 사용을 위한 管이 있는 특징이 있다. 종지형 등잔은 대량생산이 실시되어외부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내부에는 촉과 받침 등 연료의 효율적인 활용을 위한 시설이 존재한다. 다음으로, 효율적인 조명을 위해 燈臺는 필수적은 요소로, 서울 풍납토성과 고구려 쌍영총의 벽화에서 盞 부분과 받침대 부분이 결합되어 있는 형태가 확인되며 이는 晉의 영향이 추정된다. 이후 中國의 경우 南北朝時代에 들어서며 燈臺의 盞 부분과 받침대 부분의 분리가 확인되는데, 三國 역시 이러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현재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데 대부분 鐵製 또는 木製로 만들어진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燭과 燭臺 역시 기존의 인식과 달리 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원주 법천리와 평양 동산동의 동물형 청자가 주목된다. 燈器에 대해 세부적으로 알아보면 住居遺蹟 뿐만 아니라 古墳과 寺址에서도 출토됨을 확인할 수 있다. 古墳에서는 주로 副葬品의 성격으로 多燈式 燈盞이 출토되며, 일부 고분에서는 실제로 내부에서 조명을 실시한 것이 확인된다. 寺址에서는 다량의 등잔이 출토되는데 조명의 용도뿐만 아니라 供養品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住居遺蹟서는 다양한 燈器를 사용하는데, 生活容器를 燈盞 代用品으로 사용하거나 손잡이가 달린 종류를 통해 이동하면서도 조명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회에서 照明은 당시 구하기 어려운 기름을 소비하는 경제적 행위이며, 이러한 큰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일부 계층을 중심으로 실시된 문화적 행위였을 것이다. 또한, 어둠을 밝히는 기능적 의미 외에 亡者를 위한 부장품으로 사용되거나 燃燈供養의 의미를 보여주는 복합적인 성격의 유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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