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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상고사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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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연문화는 후홍산문화라고 불리면서 홍산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요서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마지막 문화로 알려졌다. 재지적인 성격과 함께 산동반도의 대문구 문화로부터 외부적인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남보력고토 유적의 발굴을 계기로 전혀 다른 지역 문화와의 관련성을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소하연문화의 특징으로 알려진 쌍구호, 동물이나 인물상이 부착된 토기, 두, 준,골병석인도 등과 함께 하요하유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뇌문토기와 편보문화의 토기도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원·첨저토기, 옥환과 옥벽, 머리에 착장된 장신구, 앙신직지로 매장된 합장묘 등은 소하연문화의 대남구유적과는 전혀 다른 정황인데 이를 구체적으로 비교하였다 남보력고토 유적의 원·첨저토기는 바이칼 유역의 세로보 문화와 유사하며, 옥벽 및 옥환, 골각제 장신구 등은 글라스코보 문화와 관련성이 깊다. 석인골병도와 두부용 장신구,두개골이 없는 채로 매장되거나 시신이 훼손된 점, 화장묘, 합장묘 등은 세로보 문화와 글라스코보 문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후홍산문화라고 여겨지던 소하연문화는 단순히 재지적인 문화발전이나 산동반도의 영향만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특히 남보력고토 유적의 문화상은 바이칼 유역의 세로보 문화(5000~4700B.P.)부터 글라스코보 문화(4700~4000B.P.)까지 계속해서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요서지역에서 초원문화의 영향이 이미 소하연문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은 한반도에서 고고학 조사가 시작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고고학에 대한 연구 흐름을 정리한 것이다. 한국에서 고고학 연구가 시작된 지 일제강점기를 포함한다면 100년 이상, 해방 이후부터로 보아도 70여년의 시간이 흘렀으며, 지금까지 2,000여개소 이상의 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고, 1,000여편이 넘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기간 동안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금석병용기의 개념의 폐기,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의 구분, 초기철기시대의 설정 등 고고학 연구의 대전제가 되는 시대구분이 이루어졌으며, 유물과 묘제 중심 연구에서 점차 사회상, 취락, 생업 경제에 대한 연구로 변해왔다. 해방 이후 청동기시대 및 초기철기시대 연구의 흐름에서 획기로 볼 수 있는 것들은 대학 박물관협회 발족과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개설(1961년), 『한국고고학개설』 발간(1973년), 송국리유적의 발굴(1975년), 신고고학의 수용(1980년대), 발굴 법인의 설립(1994년), 청동기시대 조기의 설정(2000년), 한국청동기학회 발족(2007) 등을 들 수 있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의 연구 흐름을 편의상 10년 단위로 나누어, 해방 이후 50년대의 고고학, 1960년대의 고고학(연구의 여명기), 1970년대의 고고학(정리의 시대), 1980년대의 고고학(연구의 활성화), 1990년대의 고고학(연구대상의 전환), 2000년대의 고고학(연구의 확장)으로 시기를 구분하고, 각 시기별 연구의 현황을 정리하였다. 그와 더불어 북한고고학의 연구 현황과 문제점도 검토하였다.
본 고에서는 연해주 세형동검문화와 관련한 최신 자료를 소개하고, 그 의미를 초기 옥저의 성장과정에서 고찰해보았다. 우스리스크시 일대에 집중하는 연해주 세형동검문화권은 바로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의 핵심적인 지역이며, 나아가서 기원전 4세기대에 등장하는 초기 옥저세력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연해주 남부의 초기 옥저 문화권에 형성된 주요한 네트워크는 현재까지의 출토 유물로 볼 때 크게 5개의 경로가 된다. 즉, 송화강중류의 초기 부여세력(니콜라예프카 촉각식 동검), 중원 의 三晉지역과의 요동반도-요동지역-압록강 중상류를 잇는 경로(니콜라예프카 칠원일근 및 장백현 인상여과), 연나라의 거점적 진출(요북~사평 일대를 잇는 연계 성지와 명도전),압록강 중상류의 상보촌 유형으로 대표되는 후기 고조선의 내륙을 통한 교역(아누치노 동검), 그리고 남한의 세형동검문화권과의 교류 등이다. 기원전 4~3세기대 연해주 지역 세형동검 관련 청동기 및 중국에서 유입된 유물들의 출토와 교역 네트워크의 형성은 기원전 4세기대에 급격하게 진행되는 후기 고조선의 영역화와도 맞물린다.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해서 요동지역 고조선은 상보촌 / 윤가촌유형으로 서황산둔유형은 초기 부여로, 남성리유형은 마한의 전신으로 통합되어서 사회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때를 기점으로 발해만 연안의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던 고조선의 대외네트워크는 백두산 일대 및 송화강유역, 연해주 등 내륙을 강화한다. 같은 시기에 요북에서 길림지역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에서 발견되는 소위 ‘연 장성’의 흔적으로 주장되는 연나라 계통의 성지 유적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흔적도 결국은 고조선과 경쟁하여 중국 동북지역 내류 일대와 교역을 하여 이득을 취하기 위한 거점이다. 기원전 4세기경에 원거리 교역을 중심으로 옥저세력은 당시 한랭해진 기후에 유리한 온돌과 잡곡농사 등을 도입하여 그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나아가서 초기 옥저 세력은 송화강 중류의 선부여 또는 부여세력, 나아가서 멀리 중원의 삼진세력과의 교역했음이 고고학적 증거로 밝혀졌다. 이 초기 옥저 세력은 한카호 남부~아무르만 사이의 라즈놀나야강에 거대한 취락을 만들고 잡곡농업에 기반한 안정적인 정착경제를 영위하였다. 이와 같이 최근 연해주에서 출토된 세형동검 및 전국~한대 유물을 통해서 한반도의 동북지역과 연해주 일대 변방의 고립된 세력으로만 여겨졌던 옥저문화권은 재인식되고 있다. 나아가서 사서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옥저와 고조선·부여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사서 자료가 매우 빈약한 부여와 옥저에 대한 고고학적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있다.
중부지방 원삼국~한성백제기의 취락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 농기구를 대상으로 출토 비율, 형태, 출토 유적 및 주거지의 특징을 분석하여, 국가 형성 이후의 농기구 양상의 변화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 결과 한성기에 이르러 농기구의 출토 양상에 여러 변화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었다. 주조괭이와 철겸의 출토 비율이 증가하였으며, 주조괭이는 이용 계층 또한 확대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세 종류의 농기구는 모두 형태적으로도 변화하였는데 삽날은 좀 더 세장해지고 주조괭이는 장방형, 제형, 八자형이 주를 이루게 되었으며 철겸은 직인의 비율이 높아졌다. 기경구인 삽날과 주조괭이의 경우에는 길이가 길어지고 지역적 차이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유사한 변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농기구의 분포 양상으로 보았을 때 백제 중앙의 전략적 행위에 의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국가형성에 따른 변화의 정치적, 경제적 의미에 대해 살펴본 결과, 출토 비율 및 형태적 측면의 변화는 농업 생산성 증대를 가능하게 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삽날과 쇠스랑과 같은 희소한 농기구의 분포는 백제 중앙과 지방 상위 취락 간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삼국시대의 석곽묘가 집중 분포하는 대구 가천동유적에서는 몇 차례의 발굴을 통해 상당수의 인골이 출토된 바 있다. 하지만 출토 인골의 형질분석 과정에서 일부 자료가 뒤섞인 정황이 확인되어 이를 재검토하였다. 재검토 대상은 ‘가천동 고분군’과 ‘가천동 추가 고분군’의 유적명칭에서 혼란이 야기된 1~40호 석곽묘 출토 인골과, 출토위치가 고려되지 않고 분석된 ‘가천동 고분군’의 50호 석곽묘이다. 1~40호 석곽묘 출토 인골에 대해 재검토한 결과, 기존 분석상 23기 석곽묘의 26개체를 ‘가천동 고분군’의 9기 석곽묘 9개체와 ‘가천동 추가 고분군’의 22기 석곽묘 22개체로 정정할 수 있었다. 또한 50호 석곽묘의 검토에서는 기존 1개체로 분석된 것을 주곽과 부곽에 각각 1개체인 것으로 바로잡을 수 있었다. 아울러 ‘가천동 고분군’과 ‘가천동 추가 고분군’ 두 유적 출토 인골의 기존 형질분석 결과에 새로이 정정된 부분을 반영하여 재정리해보았다. 그리고 50호 석곽묘 부곽에서 두개골편이 출토된 특이사례에 대해서도 순장이 아닌 전쟁, 의례 등과의 관련성을 제시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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