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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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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한문학연구(Dongyang Studies in Korean Classics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 발행기관 :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Dongyang Hanmoon Association)
  • 출처구분 : 학회
  • 간행물유형 : 학술저널
  • 발행주기 : 연 3회간 (발행월:2,6,10)
  • Print ISSN : 2005-7520
  • 등재정보 : KCI 등재
동양한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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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상징인 시사(シーサー)의 正體에 대하여
오키나와의 상징인 시사(シーサー)의 正體에 대하여
이성혜(Lee, Seong-Hea)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東洋漢文學硏究 第56輯 / 2020 / 5-30 (26 pages)
어문학>한국어와문학 / KDC : 문학 > 한국문학 / KCI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초록보기
일본 오키나와縣의 상징은 시사(シーサー, 獅子)이다. 그리고 이 시사의 유래는 오키나와 지역을 중심으로 하던 유구독립왕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이 시사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오키나와의 시사와 관련해서는 고고학, 민속학, 인류학 분야에서 몇몇 논문이 제출되었다. 이들 선행논문은 오키나와 시사를 모두 사자(lion)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문헌적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선행연구는 단지 현재 獅子舞가 연행되고 있고, 사자무 연행 때에 쓰는 사자탈에 王자를 써넣는 점을 들고 있지만, 사자탈에 王자를 언제부터 누가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즉, 선행연구는 ‘獅’라는 글자에 얽매여 시사를 사자(lion)로 상정하고, 시사가 유구왕국시대에는 왕의 권위와 권력의 표상으로 사용되다가 17세기 일본 사츠마(薩摩)에 의해 유구왕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왕궁을 떠나 일반 대중에게로 이동하였다고 보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강력한 힘을 상징하므로 많은 지역에서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는 유구왕국시대의 문헌인 한문학적 자료들이 검토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歪曲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중세 한자문화권에서는 왕권의 상징을 힘(power)에 두지 않고 德에 둔다. 유구 역시 중세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속한 나라로 중국과 冊封과 朝貢의 관계에 있으면서 유가사상을 받아들였다. 유가사상은 德을 내세우지 힘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유구의 역사를 보면, 유구는 사자(lion)와 같은 강한 힘을 원하지 않았다. 또한 분명한 것은, 유구 시사의 정체를 확인할 만한 한문학적 문헌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오키나와의 상징인 시사(シーサー, 獅子)의 정체는 白澤이다. 유구왕국이 택한 시사-백택은 덕이 있는 임금이 治世할 때에만 나타난다. 그리고 백택이 나타나면 모든 災害가 사라진다. 즉, 오키나와의 상징인 시사-백택은 과거 유구왕국의 통치철학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洪貴達의 外國 使臣과의 交流와 世界 認識
洪貴達의 外國 使臣과의 交流와 世界 認識
전민경(Jeon Min-Gyeong)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東洋漢文學硏究 第56輯 / 2020 / 31-55 (25 pages)
어문학>한국어와문학 / KDC : 문학 > 한국문학 / KCI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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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15세기 최고 지성인이었던 洪貴達의 국제 교류 양상과 세계 인식을 다루었다. 원접사 및 종사관의 자격으로 중국 사신 祁順·艾璞·王獻臣 등을 만나 교류하면서 그는 자국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었다. 베트남 사신들과의 교류에서는 조선과 베트남이 같은 유교국가라는 의식 아래 우호적 감정을 내보였다. 홍귀달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은 동일한 유교국가에 속했던 문인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서 함께 교류하기도 하였으나, 티베트와 같이 유교국가가 아닌 주변국에 대해서는 차별적인 태도를 보였다. 불교 국가인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홍귀달이 교류한 일본 승려 道誾에게 쓴 전송시에는 조선이 일본보다 우월한 유교국가라고 여기는 자신의 마음과 불교를 존숭하는 일본을 유교로 교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나 있다. 유럽 및 아프리카까지 그려져 있는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확인할 수 있듯 조선 전기의 지식인들은 후기에 비해 적어도 지리적으로는 더 넓은 세계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한계는 존재했다. 세계의 중심에 그려진 중국, 매우 확대되어 그려진 조선, 작게 그려진 주변국들과 같은 것이다. 중국과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고 다른 지역은 주변국으로 여겼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지리적 인식도 이보다 더 협소해질 뿐 아니라 강화된 화이관으로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은 더욱 협소해진다. 이를 살펴보는 것은 추후의 과제이다.
姜世晃의 「七灘亭十六景圖」와 李玄煥의 「七灘亭十六景」 詩의 비교
姜世晃의 「七灘亭十六景圖」와 李玄煥의 「七灘亭十六景」 詩의 비교
최경환(Choi, Kyung-hwan)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東洋漢文學硏究 第56輯 / 2020 / 57-118 (62 pages)
어문학>한국어와문학 / KDC : 문학 > 한국문학 / KCI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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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강세황의 「칠탄정십육경도」 그림과 이현환의 「칠탄정십육경」 시를 비교하여 화면상의 풍경과 시적 풍경이 어떠한 관계 양상들을 보이며 또 그러한 양상들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럼으로써 화면상의 풍경이 언어를 통해 시적 풍경으로 재산출될 때 시적 변형이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규명하였다. 화면상의 풍경과 시적 풍경의 관계 양상은 시적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이 화면상의 풍경에서 확인될 수 있는지 그리고 확인될 수 있다면 그 요소들이 어느 정도 되는지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추출할 수 있다. 즉 부각 관계, 보완 관계, 대체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현환의 「칠탄정십육경」 시 16수는 모두 화면상의 풍경을 언어를 통해 시적 풍경으로 재산출한 시이다. 이 중에서 시적 풍경이 화면상의 풍경과 보완 관계를 보이는 시는 모두 12수이고, 시적 풍경이 화면상의 풍경과 대체 관계를 보이는 시는 모두 4수이다. 시적 풍경이 화면상의 풍경과 부각 관계를 보이는 시는 없다. 화면상의 풍경이 언어를 통해 시적 풍경으로 재산출될 때 시적 변형이 발생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그림의 표제에 대한 화가와 시인의 상이한 관점과 표현 매체로서 그림과 시의 상이한 속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이 개별적으로 작용한 것도 있고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도 있다. 이 글에서는 그림과 시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각 시에서 발생되는 시적 변형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오휴자 안신의 禮說書 특징과 작품 세계
오휴자 안신의 禮說書 특징과 작품 세계
하강진(Ha, Kang-Jin)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 東洋漢文學硏究 第56輯 / 2020 / 119-165 (47 pages)
어문학>한국어와문학 / KDC : 문학 > 한국문학 / KCI : 인문학 > 한국어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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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휴자 안신(1569~1648)은 예학에 관한 독특한 저술로 한국 예학의 성립 단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지은 밀양의 다섯 현인에 대한 산문 기록과 시는 한국 유학의 계보를 파악하고 당시 지역사회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그의 예학과 작품 세계에 대해 처음 종합적인 고찰한 결과를 요약한다. 첫째, 오휴자는 부친과 예학 전문가인 재종숙부 안여경을 통해 가학을 전수했고, 이들을 연결고리로 삼아 사우의 범위와 지역을 확장했다. 둘째, 『가례부췌』는 임란으로 무너진 예학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예설을 광범위하게 섭렵해 1628년에 6권 분량으로 일차 완성했다. 이후 주석을 증보하거나 산삭해 오휴자의 생존 시 최종본은 8권 4책 형태의 필사본이었다. 셋째, 목판본 『가례부췌』 발간은 1758년 첫 시도되었으나 담당 주역의 타계로 중지되었고, 1788년경 목판본 저본이 완성되었으나 간행 담당자의 별세로 또 중단되었다. 결국 1899년에 이르러 후손들이 비로소 완성했으니 첫 간행을 시도한 지 140년만이었다. 넷째, 「오현전」은 예학을 통한 오휴자의 장소 사랑이 고을 인물의 현창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立傳을 통해 지역 사람들의 희미한 기억과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음으로써 그들의 인문 가치가 밀양인의 자부심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했다. 다섯째, 오휴자는 장소성이 짙은 문화 경관을 제재로 시를 지어 현재를 성찰하는 역사의식을 강조했고, 은거를 지향한 창작 경향성은 선비 정신의 실천과 후진 양성을 통해 세상이 바로잡히기를 바란 데서 비롯되었다. 끝으로 새로 발견한 시 두 편은 그의 작품 세계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