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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간행물:
  • 권/호:

동방학지(THE DONG BANG HAK CHI)

  • 발행기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Institute of Korean Studies)
  • 출처구분 : 학회
  • 간행물유형 : 학술저널
  • 발행주기 : 계간 (발행월:3,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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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학지 제184집 목차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동방학지 제184집 / 2018 / 1-3 (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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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연세의 민족운동〉
이기훈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동방학지 제184집 / 2018 / 1-2 (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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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 김원벽의 생애와 민족운동
박종린(Park, Jong-Rin)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동방학지 제184집 / 2018 / 1-28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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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벽은 1894년 황해도 은율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독교의 자장 속에서 성장한 그는 경신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이후 중앙YMCA와 승동교회의 활동을 통해 기독교 학생들의 리더로 부상하였다. 또한 동문회와 지역 학생친목회의 조직을 주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백아덕(Becker), 박희도, 이병조 등과 밀접하게 교류하였다. 김원벽은 종교계와 함께 3․1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학생지도부의 조직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관원 모임 이후 강기덕․한위건과 함께 학생지도부의 리더로 제반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종교계와 학생계의 ‘일원화’ 합의에 관여하고,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전개된 제2차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1921년 11월 출옥한 김원벽은 사회운동에 매진하였다. 먼저 식민지 조선이 처한 현실과 문제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대중강연을 통해 설파하였다. 1922년 1월에는 박희도, 이병조 등 황해도 인맥과 함께 신생활사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 극복이라는 지향성을 함께 했던 ‘신생활사그룹’의 사회주의자들과 󰡔신생활󰡕을 발행하였다. 식민지 조선을 개조하기 위한 ‘신생활’의 ‘신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신생활사 필화사건 이후 언론계에서 활동하던 김원벽은 건강상의 문제로 사리원으로 낙향하였다. 낙향한 이후 그는 지역의 대중운동에 참여하였다. 특히 선운동우회(鮮運同友會)의 활동에 적극적이었는데, 일제의 ‘1역(驛)1점(店)주의’에 반대하여 ‘1역2점주의’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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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세브란스의 독립운동
신규환(Sihn, Kyu-Hwan)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동방학지 제184집 / 2018 / 29-5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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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3·1운동 시기 세브란스가 어떻게 3·1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세브란스 출신들이 3·1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인 제중원 설립 이후, 제중원의학교 출신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3·1운동 이전부터 의료활동과 선교활동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문명개화와 고등교육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1운동 전후 세브란스인들이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 데에는 제중원의학교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등이 지닌 정치사회적인 독특한 위상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은 기독교 선교기관이자 의료기관으로서 외국인뿐만 아니라 외부인들도 손쉽게 왕래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거점이 되어 있었다. 주로 기독교계 인사들이 세브란스병원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 또한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은 교직원, 의사, 간호사, 학생, 환자 등 다양한 직군과 인물들이 모이고 교류했던 곳으로 정보수집 및 선전활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특히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 배출 이래로 세브란스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양산했으며, 안창호, 여운형, 김구 등 독립운동가들과도 다양한 인적 교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갑성 등 교직원들은 기독교계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하였고, 학생들은 YMCA 조직을 통해 3·1운동을 전국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스코필드 교수 등은 3·1운동의 진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간호부들은 가두시위 참가뿐만 아니라 수감자들의 지원, 독립운동 자금 모집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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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학교의 학생자치단체와 간행물
홍성표(Hong, Seong-Pyo)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동방학지 제184집 / 2018 / 55-8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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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지라는 조선의 현실 속에서 ‘기독교주의’에 근거한 교육을 받으며 실력과 인격을 양성했으며, 학생자치단체를 결성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연전의 학생자치단체는 전도회로부터 시작되어 1915년에 전도회가 확대된 기독학생청년회가, 1923년에는 일반 학생들의 자치를 위해 학생회가 조직되었다. 이 외에 문과 학생들로 구성된 문우회, 상과 학생들로 구성된 경제연구회, 수물과 학생들로 구성된 이학연구회와 연극구락부, 관악단, 관현단 등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학생들은 전도, 연극, 음악, 체육 등 여러 활동을 통해 식민지 조선사회와 소통하였고, 자신들의 생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간행물을 발간하였다. 학생들이 발간한 간행물로는 학생회 기관지「연희」를 비롯하여「시온」, 「문우」, 「경제연구」, 「과학」등의 잡지와, 월간신문 󰡔연전 타임스󰡕 등이 있었다. 학생들의 간행물 발간은 일제의 식민지라는 조선 민족의 현실을 바탕으로, 학교의 교육방침인 기독교주의와 민족독립의 수단으로 세력을 넓혀가던 사회주의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 졌다. 학생들은 민족운동의 실천을 위해 사회주의의 주장을 수용하였으며,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던 조선 기독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등, ‘올바른 기독교주의의 실천’을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학생들이 간행물을 발간하기 위해 모은 원고는 먼저 학교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허가를 받은 원고는 다시 일제의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일제는 엄격한 검열을 통해 식민지배에 대한 문제제기, 민족의식의 강조, 사회주의와 관련된 내용은 발간을 금지하였다. 일제는 연전의 학생 간행물이 과격사상을 선전한다는 이유로 수시로 발간을 금지하였고, 학생회를 해산시키는 등 학생활동을 탄압하였으나,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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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무(巫)의 종교적 역할과 분화
박 경 안(Park, Gyong-Ahn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동방학지 제184집 / 2018 / 85-122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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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巫’는 다양한 용례가 있지만, ‘무당’ 호칭은 別祈恩祭에 참여하는 京中 및 畿內各處의 國巫堂ㆍ巫堂內 巫女를 가리키는 속어에서 나왔으며 공식적으로는 ‘國巫’ㆍ‘巫女’로 표현되었다. ‘巫’는 司祭로서의 역할에 따라 私巫ㆍ神祠의 堂巫ㆍ別祈恩의 國巫로 구분되며, 모시는 神格은 靈怪ㆍ大王神ㆍ城隍神에서 佛道계열의 外來神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으나 天上과 人間을 오가는 靈媒로서의 巫의 역할은 동일하였다. 기왕의 國祭에도 불구하고 別祈恩祭가 등장한 것은 무신정변 이후 새로운 禳災의 필요성과 司祭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형화된 의례에 나타나는 각 거리의 神格은 歌舞祀神의 과정을 통해서 표현되며, 󰡔時用鄕樂譜󰡕에 수록된 俗樂歌詞들은 공동체적 除厄求福과 관련된 神格을 대상으로 한 敍事巫歌의 흔적을 보여준다. 다만 어느 경우에나 神語는 神이 巫의 몸에 내린 것(憑)을 전제로 神格의 성격이라든가 神格들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 禳災를 위한 國行의례로 이어진 祈禱는 순수한 巫儀와는 구별되는 주술적 효과를 기대한 것으로 여말 지방의 曝巫의례로 이어졌다. 呪詛의 요체는 높여 기원(唯在宗祈)하는데 있으며, 厭勝과 解厄의 과정에서 番僧ㆍ道士ㆍ術僧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占卜은 주술의 힘을 빌려 추리하거나 판단하되 巫的 화해를 통한 治病의 효과를 기대한 측면이 있다. 한편 인종조 이후 私巫의 영향력은 확대되고 있었으나 淫祀에 대한 통제는 神祗에 대한 尊號와 마찬가지로 禮的 秩序觀을 보여준다. 또한 이를테면 錦城山神이 封號 내지는 경제적 보상을 요구한 것은 스스로 독자성을 잃고 국왕중심의 질서체제로 편입하고자 한 것으로 堂巫 역할의 직능화, 세속화를 반영한 것이다. 나아가 ‘呪人巫女’ㆍ‘盲人巫女’ㆍ‘賣卜盲人’의 등장은 巫業의 기능적 수요를 보여주는가 하면, ‘盲人巫師’는 經師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존재로서 도교적 신령체계가 영향을 주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巫覡戱’ 등 歌舞의 戱化현상은 민간의 풍습을 모방한 것으로 祀神과는 상관이 없는 비종교의 새로운 영역이 형성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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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民正音」 制字解에 함유된 宋代 象數易과 朝鮮易
조희영(Cho, Hie-Young)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동방학지 제184집 / 2018 / 123-147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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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정음 해례편 제자해에 깔린 역학적 배경을 宋代 (圖書)象數易의 입장 - 소강절, 주렴계, 주희의 저서- 에서 관찰한 후 朝鮮易을 도출하려는 것이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제자해를 관통하는 핵심의 하나는 宋易思想이다. 제자해는 소강절의 황극경세서에 나오는 圖說에 영향을 받았고, 특히 ‘聲[人聲]’으로 정음을 창제한 점이 그러하다. 제자해에 나오는 음양오행론은 주렴계의 태극도설과 주희의 이론에 기반을 둔 것이 많다. 이어 나오는 五聲, 五臟, 五常, 五時 등과 陰陽互根論도 비슷하다. 제자해는 주희의 역학계몽에 나오는 하도와 그에 대한 논설을 인용했고 이를 계사전의 천지지수와 결합하여 역리를 전개했다. 삼재사상으로 중성의 제자논리를 전개한 것과 제자해 뒷부분에 나오는 음양과 동정, 천지와 강유 등을 연결한 것은 송역과 계사전 및 설괘전의 영향이다. ‘성’과 ‘象[발음기관의 상, 천지인의 상]’을 제자의 소재로 택한 것은 ‘상수’로 성음의 이치를 파악하고 문자를 창제하려는 정음 관련자들의 상수학적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또 하나 제자해를 관통하는 핵심은 ‘사람중심’인 ‘人本主義 思想’이다. ‘사람중심’ 사상은 제자해 도처에서 확인된다. 정음은 ‘사람의 소리’를 기초로 창제되었고, 초성 17자를 ‘사람의 발음기관’을 본떠서 만들었으며, 중성은 삼재를 형상했으며, 이를 설명하면서 ‘사람의 중요함’을 강조한 부분 등이 그것이다. 제자해의 역학사상은 강절, 렴계, 주희 등 송역과 불가분의 관계이나 역학적 논리를 적용하는 양상에서 모종의 ‘조선역’을 엿볼 수 있다. 신유학이 채 여물지 않은 선초에 송역의 대표적 논설을 착종하듯 엮어서 창제된 정음과 그 속을 ‘사람중심’으로 채운 제자해에서 開物成務한 ‘조선역’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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琿春 旗地의 소유와 운영, 1879-1931
윤 욱(Yoon, Wook)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동방학지 제184집 / 2018 / 149-18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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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琿春 지방의 당안사료를 분석하여 淸末부터 만주사변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훈춘의 기지가 겪었던 독특한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종래의 연구자들은 청말 民人이 만주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이곳에 있던 旗地가 民戶에게 이전되고 旗人은 雇農, 貧農으로 몰락했다고 주장하지만 훈춘에서는 民人, 朝鮮人이 유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旗人들의 旗地 소유권은 별다른 침해를 받지 않았다. 旗人들의 생활터전이었던 훈춘평야는 旗丁墾區로 지정되고 외지인의 개간이 금지되었다. 이방인에 의한 開荒은 주변지역에 한정되었다. 뿐만아니라 旗人은 황무지의 개간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서 오히려 旗地를 확장시켰다. 청조가 멸망한 후에 駐防의 재산이었던 隨缺地, 八旗官地, 官荒 등은 민국정부에 의해 관물로 지정되어 수용되고 매각되었지만 旗人들은 매각되는 旗産을 승계하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旗産의 처분으로 생긴 재산도 旗生의 遊學, 旗人을 위한 공장의 설치 등으로 용도가 지정되었고 훈춘의 기인들은 실질적으로 그 혜택을 입었다. 특히, 청말부터 旗人의 교육을 위해 등장하는 學田은 민국시기에 더욱 확대되었고 계속 旗人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旗人자제의 교육과 사회진출을 위한 재원이 되었다. 琿春에서 旗地의 위기는 民人 등 이주민이 아니라 日帝에 의해 찾아왔다. 일제가 법적으로 토지매매에 하자가 없는 입적한 조선인을 앞세워 토지를 고가로 매입하면서 대량의 旗地가 조선인들의 손을 거쳐 日帝에게 넘어갔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조선인 권익 보호를 빌미로 국경지역에서 旗地를 침탈했다. 본 연구는 다양한 지역의 旗地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연구를 진행함으로서 旗地의 실상에 더욱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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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초기 경성시위에 대한 세대론적 분석
주동빈(Joo Dongbin)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동방학지 제184집 / 2018 / 183-211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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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3·1운동 초기 경성시위에서 지식인들의 세대별 운동방식에 나타난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고찰했다. 조선인 지식인들에게 3·1운동은 식민지기 예외적인 ‘기동전적 상황’이었다. 경성은 식민권력의 정치적·물리적 무게중심이자 인쇄소·학교가 밀집한 공론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초기 경성시위는 조선인 지식인들에게 ‘공통경험’의 발원지였다. 청년 지식인으로서 ‘在京학생’은 능동적으로 대중시위를 조직하고 지도했다. 그들은 기숙사·하숙집·교회 등 ‘집합적 생활공간’에서 시위를 모의했다. 또한 1일 행진시 덕수궁에서 조의를 표하거나 각국 영사관에 독립의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지만, 행렬을 지휘하면서 총독부 청사로 행진을 시도했다. 또한 2차 시위인 5일 시위에서는 종로에서 모이지 않고 ‘경성의 현관’인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군중을 모았다. 그리고 비록 남대문에서 저지되었지만, 총독부 청사를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1일 시위 이후에도 기성세대 지식인으로서 ‘京中유림’과 ‘在京유력자’들은 대중시위를 조직하기보다 소위 ‘민족대표 33인’의 운동방식에 규정되었다. 학생 2차시위가 있던 5일 ‘京中유림’은 청량리 고종 반우식에서 순종에게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총독부 경찰이 두려워했던 것은 낭독으로 인한 ‘대중 선동’이었다. 12일 조선민족대동단의 규합하에 일부 목사, ‘京中유림’이 일으킨 장서 사건도, ‘33인’의 후계자를 자임하며 총독에게 청원서를 바치고 불특정 군중에게 자신들의 대의를 호소했다. ‘청년-학생’들의 ‘대중시위’ 조직과 지도는 초기 경성시위의 중요한 특징이었고, 이 점에서 종래 기성세대 중심의 공론 형성은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점에서 ‘3·1운동 세대’의 등장을 논할 수 있다. 다만 3·1운동 당시의 청년은 그 이후의 청년은 아니었다. 이후 지식인들은 한반도 내의 정치체와 대중의 역할을 두고 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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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소식 (2018년 7월∼9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동방학지 제184집 / 2018 / 213-218 (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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