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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한국상고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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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상고사학보(Hanguk Sanggosa Hakbo)

  • 발행기관 : 한국상고사학회(Korean Ancient Historical Society)
  • 출처구분 : 학회
  • 간행물유형 : 학술저널
  • 발행주기 : 계간 (발행월:2,5,8,11)
  • ISSN : 1229-0084
한국상고사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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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산리식토기에 식물 비짐이 사용되었을까?
왜 고산리식토기에 식물 비짐이 사용되었을까?
장성윤(Sungyoon Jang);이기길(Gi Kil Lee)
한국상고사학회 / 한국상고사학보 제102호 / 2018 / 5-23 (19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아시아(아세아)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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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석기시대의 이른 시기로 편년되는 고산리식토기는 바탕흙(태토)에 식물을 섞어 만들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아왔다. 최근 연구에서 식물규산체분석을 통해 그것의 종류가 벼과 식물로 밝혀진 바 있다. 그리고 식물을 비짐으로 쓸 경우 성형하기 쉽고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고산리식토기는 음식의 조리에 일회용으로 사용한 후 폐기된 것이라는 견해가 피력되었다. 그러나 토기 제작에서 섞음재인 비짐은 바탕흙의 종속 요인이므로 다양한 종류의 비짐 중에서 유독 식물이 선택된 이유를 무엇보다도 바탕흙과 관련하여 살펴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필자들은 고산리유적, 오등동유적, 강정동유적, 김녕리유적의 고산리식토기와 유적지 주변에서 채취한 토양을 대상으로 물리적, 광물학적, 지구화학적 분석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진행하였다. 분석 결과를 검토해 보면 식물을 섞음재로 사용한 이유는 유적별로 차이가 있다고 추정된다. 즉 고산리유적의 경우는 지질환경 요소인 바탕흙의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석되지만, 강정동유적, 오등동유적, 김녕리유적의 경우 환경보다는 제작전통 등의 요인이 더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2년 『환단고기』 역주본, 고고학적 비판
2012년 『환단고기』 역주본, 고고학적 비판
김재윤(Kim Jae Youn)
한국상고사학회 / 한국상고사학보 제102호 / 2018 / 25-51 (27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아시아(아세아)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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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원문은 이미 위서로 규정되었으나, 2012년 출판된 『환단고기』 역주본은 고고자료가 대거 이용되어 생산되었다. 이 책에서는 세계 각국의 고고문화자료가 언급되었는데,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와 관련해서 중국 신강성과 요서, 한반도가 관련이 있다. 중국 신강성에서 발원한 ‘환국’이 각 지역으로 퍼져서 동쪽으로는 요서지역에 안착해서 이 지역 신석기문화를 형성했고, 요서의 소하서문화, 흥륭와문화, 홍산문화가 한반도 신석기문화계통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홍산문화의 C자형 동물형옥기가 강조되었으나 정작 한반도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홍산문화의 토기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이전 시대인 소하서문화 및 흥륭와문화 토기가 한반도 빗살무늬토기계통이라는 주장만 거듭되었다. 유물의 단순형태비교가 중심이 된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과 이 책이 대중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검토가 필요하다. 이른바 「환국」이 시작된 연대와 지역은 9,200년 전 중국 신강성 「신석기시대」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 신강성에서는 토기등장을 기준으로 한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의 구분이 모호해서 ‘석기시대’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9,000여년 전 중국 신강성은 세석기를 사용하는 시대이며, 6,000~5,000년 전에 석기시대 내에서 구분된 신석기시대 유적이 있다. 그러나 토기가 출토되지 않고, 세석기의 모양이나 크기가 그 이전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중국 신강성은 토기등장을 기본으로 한 동북아시아 신석기 문화와는 다르며, 요서지역 신석기문화의 기원지로 보기 힘들다. 요서지역 소하서문화는 흥륭와문화에서 이른 단계의 유물을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나 아직 학계에서 논쟁중이다. 이를 제외하고도, 특징적인 토기가 무문양이기 때문에 한반도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없다. 또한 흥륭와문화의 之자문토기를 한반도빗살무늬토기로 여겨, 결상이식과 함께 한반도가 요서지역 신석기문화계통으로 간주되었다. 근거가 된 압록강 유역의 미송리 유적 하층 토기 중 2점은 인접한 요동남부나 하요하유역과 비교 가능하지만, 그 연대가 4,800~4,400년 전으로, 흥륭와 문화가 기원전 6,200~5,400년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시공간적 차이가 크다. 이 문화와 한반도 각 지역의 신석기 토기를 비교했으나, 한반도신석기문화를 요서지역으로 확대해석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뿐만 아니라 흥륭와문화의 결상이식과 고성 문암리를 비교한 결과 토기, 무덤양상, 결상이식의 종류와 제작방법 등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환단고기』 역주본의 내용은 단순한 유물형태연구를 근거로 한 것으로 고고학적 분석은 결여되었으며, 사실과 다르다.
마한 와형토제품(瓦型土製品)의 시론적 검토
마한 와형토제품(瓦型土製品)의 시론적 검토
차인국(Cha in guk)
한국상고사학회 / 한국상고사학보 제102호 / 2018 / 53-76 (24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아시아(아세아)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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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형토제품은 파수가 부착된 것을 제외하면 평기와와 거의 비슷하며 나주를 중심으로 영산강유역에 주로 분포한다. 그러나 출토사례가 많지 않고 그나마도 파편의 형태가 많아 관련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와형토제품의 현황과 특징을 정리하고, 이를 통해 용도와 변천양상을 살펴보았다. 와형토제품의 종류는 암키와형과 수키와형으로 구분되며, 암키와형이 약간 더 길고 두껍게 제작되었다. 문양은 격자문의 비율이 높고, 선문과 조족문, 승문이 소수 시문되었다. 좌ㆍ우 측면에는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분할한 흔적이 남아있으며, 상ㆍ하부는 절단흔과 물손질흔이 나타난다. 와형토제품의 상면 중앙부에는 파수가 1개가 부착되었는데, 우각형이 대부분이다. 와형토제품은 대부분 고분의 분정부에서 암ㆍ수키와형이 공반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본래 용도는 매장주체부를 보호하기 위한 덮개시설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와형토제품은 주거지에서 부뚜막 축조재료와 배수관, 고분에서 관, 시신 덮개 등의 용도로 활용되었다. 와형토제품의 등장시점은 5세기 전반경으로 백제 한성기 기와의 영향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와형토제품에 시문된 모든 문양이 확인되며 파수의 부착위치와 상ㆍ하부 조정흔 역시 다양하다. 무엇보다 바닥판을 이용한 제작이 이루어지는 점이 특정적이다. 이후부터는 파수의 부착위치가 상단에서 6.2~8.5㎝ 범위로 정형화되고 바닥판 없이 제작이 이루어진다. 6세기 중반경에는 격자문이 소멸되고 선문만 시문되며, 상ㆍ하부 조정방법은 절단하는 방식으로 일원화되어 7세기 전반까지 이어진다. 한편 백제 사비기 유적인 순천 검단산성에서 파수 달린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마한 와형토제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은 다른 유물과 마찬가지로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건축에너지 관점에서 본 풍납토성 축조의 사회정치적 함의
건축에너지 관점에서 본 풍납토성 축조의 사회정치적 함의
허진아(Heo Jina)
한국상고사학회 / 한국상고사학보 제102호 / 2018 / 77-111 (35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아시아(아세아)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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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전쟁으로 인한 급격한 사회변화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백제 지도자들이 행사한 정치적 리더쉽과 그것의 사회정치적 함의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풍납토성이라는 거대한 기념비적 건축물이 장기간에 걸쳐 조성된 이유를 건축에너지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를 위해, 먼저 풍납토성의 구체적인 건설 공정과 동원된 노동력의 수준을 살펴보고 당시의 인구 수준을 검토하였다. 한성백제 중앙의 지배층에게는 건설 활동에 수반되는 특정 조직 형태의 노동(즉 건축에너지)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사회정치적 권력이 존재하였으며 동원된 노동력의 수준은 새로 편입된 지방사회(멀리 전라지역까지 아우르는)를 포함하는 수준이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풍납토성 건설 기간 동안 지방사회로 확산된 한성백제양식의 분포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백제 지도자들이 이중적 전략, 즉 차별화와 통합을 동시에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풍납토성 축조가 방어적 기능과 중앙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단일한 정치적 틀 안에서 지방사회를 통합하고자 했던 통치자의 국가운영전략의 일환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풍납토성과 같은 기념비적 건축물은 전쟁 후 인구와 영토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사회조직과 질서를 구축해야 할 과제에 직면한 백제 지배층이 선택한 통치 수단이자 중앙집권화를 이끌어 낸 사회정치적 토대로서 백제가 고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渤海古墳 出土 唐式 帶裝飾具의 基礎的 檢討와 意味
渤海古墳 出土 唐式 帶裝飾具의 基礎的 檢討와 意味
Jung Bum Choi(崔正凡)
한국상고사학회 / 한국상고사학보 제102호 / 2018 / 113-144 (32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아시아(아세아)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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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왕조에 널리 사용된 당식 대장식구는 관인을 상징하는 허리띠로서 당 왕조는 물론이고, 발해와 신라, 일본에서도 널리 사용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율령을 나타내는 고고 자료로 그 중요성이 높다. 이를 염두에 두고 그동안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한 발해에서의 당식 대장식구 출토 양상을 살피고, 그 의미에 대한 기초적 검토를 시도한다. 발해 내에서 출토되는 당식 대장식구는 중국 당 왕조에서의 변화과정과 동일한 변화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장식구를 착용할 때 배열되는 방형과판과 반원형 과판의 위치 역시 당 왕조, 신라와 같이 강한 규칙성과 정형성을 보여준다. 아울러 홍준어장 고분군에서 당식 대장식구와 공반된 발해토기의 상대서열, 북대 고분군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 동경과의 교차연대를 통해 실연대 도출이 가능하였다. 이에 발해에서 사용된 당식 대장식구는 중국에서의 변천과정과 그 궤를 함께 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형태의 변화 역시 동일하다. 발해 내부에서 당식 대장식구는 발해의 중심지였던 5경 인근의 고분군뿐만 아니라 발해의 주요 지역에 고루 분포하고 있어 관인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다. 한편 발해 영역서 출토되는 이른바 ‘말갈패식’이 공존한다. 발해의 주민구성에 말갈족이 포함되는 점에 미루어 말갈패식은 말갈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표상이자 발해 지방사회에 존재했던 수령의 존재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당식 대장식구와 말갈패식의 공존은 당 왕조 및 신라와 차별성을 보임과 동시에 발해 문화의 다원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연해주 지역 사원지 출토 발해 불상 시론
연해주 지역 사원지 출토 발해 불상 시론
양은경(Eun Gyeng Yang)
한국상고사학회 / 한국상고사학보 제102호 / 2018 / 145-175 (31 pages)
인문학>역사학 / KDC : 역사 > 아시아(아세아) / KCI : 인문학 >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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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지역의 발해 불상은 사원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된 배경으로 인해 그 특징과 연대, 공반유물과의 관련성, 금당건물과 불상의 연관성 등 이 지역 발해 불상과 불교문화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연해주 발해 불상은 파편으로 수습되었거나 혹은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은 이유로 인해 불상의 존격, 특징, 양식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어려움이 있으며, 그 결과 연구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연해주 발해 불상은 유물자체가 희소한 발해시대 불교유물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중국, 북한에 소재하는 사례들은 자료로서의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현실로 인해 연해주지역 발해 불상의 중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본고에서 연해주 발해 불상을 자료소개하는 의미에서 우선 재질을 기초로 한 분류작업을 실시하였으며, 현상과 제작연대에 대해 중점적으로 언급하였다. 또한 이렇게 분류된내용들을 기초로 하여, 연해주지역 발해 불상의 제작기법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는 앞에서 검토한 내용들을 종합한 후 금당의 내부에서 불상이 안치되었을 모습에 대해 그 추정안을 미력하나마 제시해 보았다. 필자가 현지에서 조사한 연해주지역 발해 금동상은 총 7점이었으며, 소조상은 파편까지 모두 포함하여 20여 점이었다. 연해주지역 발해 금동, 소조상은 조사과정에서 간략하지만 제작기법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지역 금동상은 조각상 내부가 공간이 없이 꽉 찬 통주식의 주조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주조기법은 동시기 발해 상경성의 금동상이 통주식과 중공식으로 주조된 것과는 다소 차별성이 확인되었으며 전체적인 제작수준은 간단하고 조잡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연해주지역 발해 소조상은 제작기법면에서 성형, 채색, 건조의 제작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성형방법은 손빚기, 틀찍기가 모두 활용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제작방식은 상경성, 팔련성의 발해 소조상에서도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연해주지역 소조상은 상경성, 팔련성 유물에 비해 전체적으로 제작수준이 낮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보리소프카, 아브리코스사원지의 금당지에서는 소조상만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사실을 통해, 이 두 사원지 금당 내부에는 소조상이 주존 불상으로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금당 속에서 주존불상이 안치된 복원안을 추정한 결과, 연해주지역의 금당지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한 시설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동시기 상경성의 금당 속에는 안칸, 바깥칸의 내외진 이중구조가 마련되었으며 안칸에는 불상을 안치하기 위한 토단의 불단이 축조되어 있었던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